단편소설:집시의 별

2012.12.09 13:36

연규호 조회 수:955 추천:58

15. 단편 소설: 집시의 별(The Star of Gypsy) 1. 미모사 잎 새가 미풍에 흔들리듯, 오른손이 이따금씩 파르르 떨리는 증세 때문에 무뚝뚝한 신경내과 전문 의사를 찾아 진찰을 받게 된 것이 이번이 세 번째가 된다. “미세스 허친손(Mrs. Hutchinson)은 파킨손씨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앞으로 병원에서 처방하는 약들을 평생 드셔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한 달에 한차례 씩 병원을 방문하시고 중간 중간 물리치료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넘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도와 줄 사람이 곁에 있으면 안전하겠습니다.” 스탠포드 의과대학 병원 교수인 닥터. 코번이 여러 차례 진찰을 한 후 내린 최종진단과 주의 사항을 들으며 나는 낙심이 돼 고개를 털썩 떨구었다. 그리고 찝찔한 눈물이 콧등과 얼굴 사이로 주르르 흘러 내리는 것이 마치 거미가 미끄럼을 타는 듯했다. ‘파킨손 병이라니? 게다가 치매(Dementia)가 동반할 수도 있다고 하니, 내 나이 이제 겨우, 40살인데....기가 막혀서.’ 나는 왈칵 치밀어 오르는 절망과 분노로 휘청 넘어질 뻔했다. 뇌 신경세포의 퇴화로 인해 발생하는 파킨손 병 환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여러 차례 본 일이 있기에 더 난감했다. -파킨손 환자들은 대부분 노인들로 허리가 구부정하며 얼굴에는 표정이 없어 마스크 얼굴이라고 불린다. 게다가 파킨손 병 환자들은 손을 떠는 것은 물론 걸음 거리가 경직 돼 앞으로 넘어지듯이 쏠리기에 쉽게 넘어진다. 그러기에 자연 여기저기에 상처가 있게 마련이다. 결국 지팡이를 짚던지, 보행기(워커)를 밀고 다니던지, 아니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도움이가 주는 음식을 마지못해 받아먹으며 죽기만을 기다리는 병이다. 게다가 치매까지 동반해 침을 주르르 흘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바보였다.- 그런데 내 나이 40살, 한참 활동할 수 있는 젊은 나이인데 어쩌자고 파킨손 병에 걸리다니.......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몹쓸 병에 걸렸는가? 나는 눈물을 쑥 빼고 말았다. “미세스 허친손? 어려서 연탄불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의 중독으로 인해 쓰러진 적이 있다고 했지요? 아마도 일산화탄소 중독, 후유증 때문에 파킨손 병이 젊은 나이에 발병한 것 같습니다.” “일산화탄소라면, 연탄 중독?” 내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아주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연탄불이 방에 스며들어와 온 가족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잠시 응급실에 갔었던 일이 있었다고 어머니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심코 들었는데 그것이 내 병의 원인이 될 줄이야. 35년 전의 일인데, 지금에 와서. * 생각해 보면 파킨손 병의 증세를 보인 것은 어름 잡아 일 년은 넘었다고 생각한다. 얼추 이년 전부터 말이 조금씩 느려지며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면서 바이올린 연주가 힘들어 지는 것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런 증상은 일시적이었기에 피곤해서 그럴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는데 6개월 전에는 뜻밖에도 정기 연주하는 도중에 바이올린을 떨어뜨린 불상사가 있었다.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바이올린은 생명과도 같은 데 떨어뜨리다니....다행히도 카펱에 떨어지면서 손으로 받았으니 망정이지 통째 깨졌더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내 손, 특히 오른 쪽 손이 조금씩 떨리며 바이올린 음을 제대로 내지 못하자 지휘자, 김현식 선생이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정순씨? 음이 틀리네. 손이 떨리나보군?” “예? 손이 떨린다구요, 김 선생님?” 나는 당황하여 되물었다. “내가 보기엔 요즘 정순씨의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것 같군요. 피곤하신가요? 아니면 한번 의사를 찾아 진찰을 받아 보시지요.” 난감했다. 손이 떨리다니, 게다가 바이올린을 떨어뜨리다니.... 바이올린을 못 치게 된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데. 게다가 지휘자가 눈치를 챘으니 바이올린 연주자로서는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털어 놓고 도움을 요청했다. “허니? 나도 당신의 손이 조금 떨리는 것을 알고 있었어. 신경과 의사를 만나봅시다.” 나의 남편 빌. 허친손(Bill Hutchinson)은 백인 의사답게 자상하며 나를 끔찍이 사랑했기에 나에 관한 어떤 일도 도와주었다. 나보다 세 살이 많다보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 성숙하였기에 나는 늘 그가 하는 대로 따라하면 모든 것이 잘 되었다. 말이 잘 통하는 한국의사를 찾아 가고 싶었으나 남편이 예약한 백인, 미국내과 의사를 마지못해 찾아 간 것이 일주일 후였다. 그는 세심하게 진찰을 하였다. 그리고 몇 가지 가능성 있는 병명을 말해 주면서 혈액검사를 하라고 지시해 주었다. 곧이어 약을 처방해 주었다. “미세스 허친손? 수전증, 다시 말하면 떠는 병이 몇 가지 있습니다. 갑상선 항진증, 항 에피네프린, 파킨손병, 소뇌의 질병, 알콜, 카페인 과다복용 등... 파킨손 병이라고 확정 짓기 전에 우선 이 약을 4주간 복용 하고 나서 그 결과를 보고 결정하기로 합시다.” 결국 4주 동안 혈액검사, 뇌 단층 촬영 등을 했으며 내과 의사가 준 약을 복용했으나 증세는 별로 좋아 지지 않았다. 내가 불만스러운 듯이 얼굴을 찡그리자 내과 의사는 책임을 피하려고 신경과 전문 의사를 소개했다. 소개 받은 의사가 스탠포드의대 신경내과, 닥터 코번이다. 그는 이름 그대로 유태계 미국인으로 전문의사 답게 냉정하고 신속하게 진단과 치료를 하였다. 세 번째 방문했을 때 결국 그는 결론을 지었다. “파킨손 병에 약간의 우울증과 치매 증세가 동반 됐군요. 생각보다 병의 진행 속도가 빠를 수도 있습니다”라고. “그러면 어찌 됩니까?”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불행하게도 보행이 불편해 지며 손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 그러면 바이올린도 못하게 되나요?” 나는 다급해서 물었다. “그럴 수도 있을 겝니다. 어쨌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러나 이 약을 잘 사용하면 호전 될 수도 있으니까요.” 맙소사! 나는 생각지도 못한 파키손 병 환자로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내 인생의 꿈,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지 못하는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미세스, 허친손? 약 3개월, 바이올린을 하지 말고 조금 쉬는 것도 좋을 듯 하군요.” 스탠포드 신경내과 교수의 충고를 들으며 나는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허니? 당신 곧 좋아 질 거야, 아무렴 바이올린도 치고...” 남편은 한 손으로 운전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웠다. 그러나, 바이올린을 못하는 것도 안타깝지만 내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지휘자 김현식 선생을 앞으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더 안타까웠다. 2. 내가 태평양 심포니 오케스트라(Pacific Symphony Orchestra)의 단원이 된 것은 약 5년 전, 35세의 중년의 나이였다. 산프란시스코 음악대학(SanFrancisco Conservatory)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으나 빌(Bill)과 결혼을 한 후 집안 살림하랴, 애를 키우랴, 실제로 음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아니 바이 올린을 만져 보기도 힘들었다. “바이올린을 못하다니? 결혼 때문에?” 나는 결혼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여자의 운명이려니 했다. 나는 남편(Bill)에게 간청을 했다. 애들이 어느 정도 크면 내 꿈, 바이올린을 계속하게 해 달라고...... 남편은 흔쾌히 허락 해 주었다. “허니, 물론이지!” 35세가 되자 친정어머니가 자진해서 두 애들을 뒷바라지 해주게 돼 마침내 큰 마음을 먹고 팔로 알토(Palo Alto)에 있는 Pacific Symphony Orchestra에 단원이 되고자 시험(오디숀)을 보았다. 다행이도 나는 제 2 바이올린 맨 말단 자석에 가까스로 합격됐다. 감지덕지, 기뻣다. 그 때 실력이 다소 딸리는 나를 뽑아준 분이 김현식 지휘자였다. 도리켜 보면 그는 나의 은인이었다. 그는 2세 한국인으로 산프란시스코 음악대학 출신, 10년 대선배였다. “가정을 꾸리고 사시느라 연습을 못하셨군요. 거의 10년이나.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 열심히 연습하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연주를 한다면 크게 성장 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보수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의사 남편이 뒷바라지를 해주시니 큰 문제가 없군요. 환영합니다. 정순씨.” 그는 아주 친절하게 나를 격려 해주었기에 거의 10년이나 손을 놓고 연습을 못해 바이올린을 단념했던 내가 심포니 단원이 될 수가 있었다. 나는 그의 도움을 마음 깊숙이 감사하며 살아 왔다. 실력이 안 되는 나를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가 뽑아 준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바이올린은 내게 있어 가정보다도 더 중요했으며 내 전부라고 생각하였기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을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고 과외 공부도 시키면서 나는 나 나름대로 바이올린 연습을 열심히 했다.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옛 실력을 되찾았기에 마침내 제1 바이올린 말단자리로 승격되었다. “축하 합니다. 정순씨. 역시 노력의 대가입니다. 역시 한국 사람은 대단하군요. ” 지휘자 김현식씨는 나를 ‘허깅’해 주었다. 순간 나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애인의 품에 안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포근함을 느꼈다. 지휘자, 김현식 씨- 그는 말 수는 적으나 또박또박 영어를 구사하는 1.5세였기에 한국과 미국을 두루 아는 사람이었다. 10살 때 미국으로 이민와 음악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마치고 독일에 가서 2년간 공부를 한 후 산프란시스코 음악대학, 모교에서 음악 교수로, 한편 Pacific Symphony를 이끌어 온지도 거의 10년이나 되었다. 그날 밤, 나는 김현식 선생을 생각해 보았다. -웬일일까? 김 선생을 존경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모하는 것인가? 나는 문득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파도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나를 허깅 했을 때, 왜 나는 행복한 마음을 느꼈는가? 칭찬을 해 주어서? 아니면 나와 같은 피를 나누는 한국 사람이기에? 나는 잠을 자면서도 그를 생각해 보았다. 지난 5년, 나는 성실하게 지휘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음악뿐만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 속에서 이렇게 자랐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의 손 깃이 나에게 닿기만 해도 마치 전기에 감전 된 듯 했다. 아니, 말이 다르고 문화와 풍속도 다른 백인 사회에서 질식되어 숨이 막혔던 나의 숨통을 열어준 분이 바로 김현식씨 였다. 그를 만났기에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아니, 내 마음 깊숙이,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같은 한국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3. 100% 순 한국 토종인 내가 어쩌다가 아이로니칼 하게 미국에 와, 자존심이 강한 유태계 미국 남편을 만나 같이 살게 된 것이 어찌보면 행복이라기보다 역설적으로 불행이었다. 큰 소리치고 저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백인 의사들과 종교적으로 외골수인 유태인들 사회에서 아내로서 같이 산다는 것이 아주 부자연스러웠으며 힘에 겨웠다. 마치 얼굴에 베일을 쓰고 밖을 바라다보는 것과 같았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큰 아버지의 초청으로 미국, 산 호세로 온 것이 10살 때였다. 환경이 확 바뀌고 보니 당황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없다보니 어머니가 바뻣다. 먹고 살기위해 동분서주하며 젊음을 희생했다. 이민 초기에 어머니는 큰 아주버님의 도움을 받았지만 스스로 마켙에 취직해 종이봉투를 접으며 허드레 일을 하여 나를 길렀다. 가난했지만 바이올린 렛슨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오로지 딸, 박정순(朴貞順)을 위해서였다. 검은 머리가 점점 희여 지고 얼굴에도 주름이 잡혀 늙어 보였으나 어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서니베일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쥴리아드, 커티스 음대에 입학이 됐지만 이를 마다하고 산프란시스코 음대에 진학한 것은 장학금 혜택도 있었지만 가까운 곳이기에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산프란시스코 음악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중 나는 빌 허친손을 만났다. 그는 산프란시스코 의대(UCSF)생으로 수재였다. 백인, 명문가문 출신이었다. 아니 돈 많은 유태계 명문이었다. 스탠포드와 산프란시스코 의대라는 최고 엘리트 학생이기에 그의 미래는 보장돼 있었다. 그는 음악을 좋아해 의과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음대 콘서트에 자주 왔다가 바이올린을 치는 나를 보고 마음이 빼앗겼다고 했다. 백인인 아버지는 의사요 어머니는 약사였다. 게다가 여기저기에 부동산도 있어 부자였다. 그런 남편과 결혼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그리고 당당했다. 나보다 세 살 위인 그는 졸업과 동시에 스탠포드 병원에서 심장내과 전문의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결혼과 더불어 나는 많은 보석을 선물로 받았으며 주식도 양도 받았기에 갑작스레 부자의 대열에 끼었다. 그리고 고생 많던 어머니도 일손을 놓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유태교와 내가 믿는 기독교는 많이 달랐기에 나는 그들만의 종교적인 행사에서 늘 배제되었다. 아니 내가 그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나 먹고 사는 대는 문제가 없었다. 남편 빌은 육체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정말 자상하며 남자다웠다.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기에 그의 음악 실력은 오히려 나보다 더 월등했다. 처음에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바이올린을 좋아 한다고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기회에 내 앞에서 연주를 했을 때 나는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 그러기에 한국계 내 친구들의 한국사람 남편과 비교해 보면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그는 월등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사회에서 상위 5%에 드는 최고 엘리트며 신사였으니까... 그러나 치명적으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같은 말(한국어)과 같은 풍속(한국풍속)에서 벗어 난 것이 나에게는 힘들었다. 비록 궁궐 같은 팔로 알토와 서니베일의 상류 주택가에 번쩍이는 벤즈를 타고 다닌다고 해도 나에게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걸어 다는 것만 못했다. 아니 불편했다. 왜 그럴까? 그 대답은 뜻밖에도 백인 사회에 대한 나의 열등의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현식 지휘자를 만나면서 비록 그와 나는 한 가족은 아니지만 그를 보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한국 사람이기에 그리고 나와 같이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는 동질감, 그것 하나로 모든 것이 무조건 좋았다. 그와 같이 있으면 열등의식을 느끼지 않고 동료의식을 느끼는 것은 내가 불륜한 마음을 품어서 일까? 아니면 자연스러움일까? 매주 한번 씩 만나 3시간 동안 연습하는 시간은 나에게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었으며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 그와 자주 만나다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휘자는 반듯하게 살아 왔으며 나를 친동생처럼 아끼며 열심히 지도해 주었다. 그동안 정기 연주회를 통해 남편과도 인사를 나눴으며, 남편도 가끔은 심포니에 같이 참석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특권을 받았다. 그러나 남편은 지휘자가 단원인 내게 각별히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같은 민족이기에 오는 자연스러운 관계를 인정을 하면서도 어느 때부터인지 조금씩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는 듯했다. 엘리트 백인 의사인 그와 동양인, 지휘자와는 도무지 경쟁의 상대도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질투의 투정을 내게 했다. 4.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가리켜 의도적인 유혹이요 추파라고 말 할지 모르나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사건이 기억난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있은 이후부터 우리는 스스로를 얽어 맨 사랑의 공간 속에 매이게 됐다. 뿐만 아니라 죄를 받은 것인지 내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타락과도 같은 맥락이랄까....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눈이 약해지고 죽어야 하는 운명이 되듯이.... 내 눈 가장 자리가 떨리면서 시력이 떨어지고 물체가 흔들려 보이는 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악보를 순간적으로 보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며 음을 놓치기도 했다. “정순 씨? 음을 못 잡네요?” 지휘자가 몇 차례 주의를 줬다. 부끄럽기도 하며 우울해 지는 느낌이었다. 안과 의사를 만나 진찰을 받았다. “피곤하면 안면 근육뿐만 아니라 안구 근육도 약해져 가끔 그런 일이 생깁니다. 눈을 많이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주의를 주며 안약을 주었다. 그리고 2차례에 걸쳐 결석을 했기에 지휘자가 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 “몸이 아프시군요?” 지휘자는 사무적으로 묻는 듯 했으나 나에게는 감격적인 물음이었다. 나를 이토록 아껴주다니.... “예, 근자에 눈이 떨리고 잘 보이지 않아서, 두 차례나 빠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지휘자님!” “눈이 떨리고, 안 보인다니요? 그게 무슨 병이란 말이요?” “아직 확실한 병명을 못 잡았습니다.” “병명을 아직 못 잡았다고요?” “예.” “정순 씨? 내가 내일 집에 찾아가도 되겠는지요?” “예, 물론이죠.” 심포니 단원이 된지 3년 만에 지휘자가 나를 방문하겠다고 하니 나의 가슴이 소녀처럼 떨렸다. 다음날, 오후 1시에 병문안 차 오기로 했는데 내게는 병문안 이상의 의미 있는 방문이었다.. 아니, 몇 년을 기다리던 만남이었다. 4.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이성을 잃고 만다. 그리고 그 잃은 이성을 애틋한 사랑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남모르는 둘만의 숨겨진 비밀로 유지 된다면 환상으로 이어지는 정신세계의 변화도 찾아온다. 다음 날, 오후 1시, 지휘자가 나를 방문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기에 나는 집안을 청소도 하고 그를 위해 차를 끓였다. 점심을 준비하려고 했으나 그가 내게 말한 것이 생각났다. “점심은 먹고 가겠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지만 맛있는 떡도 조금 준비하고 과일을 깍아 놓았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집안에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는 출타했으며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 올 시간은 멀었다. 지휘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내 마음은 마치 소녀 시절, 총각 선생님을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아니 사랑하는 애인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나는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찌 보면 흰옷 속으로 불레지어가 살짝 보이는 듯했으며 가슴도 밖으로 비취는 듯해 선정적이었다. ‘띵 동’, 마침내 지휘자가 내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으며 나는 앞문을 열고 대문으로 가 그를 맞아 드렸다. 총총히 심어 놓은 정원수와 야생 꽃으로 장식된 앞뜰을 슬금슬금 감상하며 지휘자는 나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 왔다. 나는 마치 오빠나 아버지를 만난 반가운 느낌이었으나, 지휘자는 외국인과 사는 가정에 대한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미국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살까? 한국 가정과 무엇이 다른가?’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실망을 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 집은 평범한 한국 사람이 사는 그렇고 그런 집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자개상과 자개농이 놓였으며 신을 벋고 들어오면서 마치 한국 사람의 집에 온 느낌을 받았을 것 같았다. 손님을 다이닝 테이블 의자에 앉게 한 후, 준비된 과일과 차를 그에게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떡을 주었다. 놀라는 눈초리였다. 미국 사람 집에서도 떡을 먹는가? 아마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그와 잠시 담소를 한 후 그에게 집 구경을 시켜 주었다. 아래층에 가지런히 기르는 관상수와 수많은 화분들을 보며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순 씨? 화원 같군요?” “예. 제가 꽃을 좋아해서....” 그리고 그를 안내해 2층으로 갔다. 바이올린 연습실을 보여 주었다. 바이올린이 3개가 나란히 탁자에 놓여 있었다. 하나는 내 것이며 또 하나는 남편의 것 그리고 하나는 여분으로 둔 것이다. “여분의 바이올린을 갖고 있군요? 아주 비싼...” 지휘자는 혼자 말을 했다. “예. 하나 더 사려고 합니다.” 나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순간 나는 뜻밖의 행동을 하였는데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주저하는 그를 안내해 나의 침실을 보여 주었다. 그는 머뭇머뭇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그의 손을 잡아 침실로 들어왔다. “꽤 넓군요...” 그는 부러운 듯이 말했다. 그리고 더 당혹스러운 것은 옷장과 곁들여 욕탕이 있는 유리문을 열고 여분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아주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는 머뭇머뭇 주저하였다. “보여 드릴 옷이 있습니다. 지휘자님!” “........” 그는 대답을 못하고 당황한 듯 주저주저 했다. 나는 옷장을 열고 나의 옷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여우 털옷과 수달피(水獺皮) 코트와 같은 겨울용 옷은 비싸기도 하지만 나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이 원피스, 참, 부드럽지요?”나는 내가 아끼는 수달피 털이 밖힌 연주용 원피스를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부드럽군요. 수달피 원피스가....” “수달피 원피스를 갖고 싶었서요.” “수달피 원피스를?” “예. 연주할 때 입으려고요.” “연주할 때? 아! 정순씨? 기억납니다. 6개월 전, 정기 연주할 때, 솔로로 연주 할 때 입었지요?” “어머! 지휘자님, 기억하시는 군요?” “물론이죠, 지고이네르 바이젠! 집시의 노래, 아니 집시의 별을 솔로로 치실 때, 입었던 그 옷이군요? 아주 예쁘고 우아했었는데...” “예. 지휘자님. 기억하셨네요.” 나는 지휘자가 6개월 전 정기 연주 때 입은 이 수달피 원피스를 이토록 소상하게 기억해 주다니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그런데, 수달피 원피스? 무슨 사연이 있나보죠? 하필이면 수달피 털이 밖힌 원피스를 입다니, 정순 씨?” 그는 수달피 털이 밖힌 원피스를 내 손에 다시 쥐어 주면서 물었다. “예, 사연이....있었습니다.” 나는 순간 나의 예 과거를 생각하며 울먹였다. “슬픈 일이?”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다보며 물었다. “예. 기억도 하기 싫은.....” 나는 그 수달피 원피스를 받아 옷장 속의 옷걸이에 걸려고 뒤로 돌아 섰다. 순간, 그는 돌아선 나를 뒤편에서 가만히 끌어 잡아당기며 포옹하였다. 그의 얼굴과 내 얼굴이 앞 거울에 비치고 있었으며 그의 두 팔이 내 가슴을 감싸고 있었다. 내 눈에는 눈물이 몇 방울, 그리고 그의 눈은 행복한 듯이 지긋이 감고 있었다. ‘아!’ 나는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아니 그가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따스하군요, 정순씨의 온 몸이... 아니, 사람의 체온이....” 그의 목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 나는 눈을 더 감았다. 잠시 후 그는 나를 살며시 밀치면서 말했다. “수달피 털처럼 포근하군요. 정순 씨.” 나는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그런 느낌이었으며, 어찌 보면 내가 그를 유혹한 느낌이었다. 침실 깊숙이 옷장이 있는 그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이 내 뿜는 따스한 입김으로 인해 유리문이 뿌여지는 듯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외간 남성의 포옹을 나는 나의 행복함으로 느끼고 있다니. 아니 그것을 바라고 있는 요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 후 나를 살며시 밀치고 유리문을 열고 침실을 통해 복도로 나가고 있었다. ‘아!’ 나는 감탄했다. 아니 안타까웠다. 그도 한갓 남성일 뿐인데 나의 유혹을 뿌리치다니..그리고 ‘따스하군요’라는 말만 하고 돌아 서다니... ‘자신의 마음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 내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쉬운 마음을 느끼며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와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순씨.’라는 인사를 한 후 그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급히 그를 따라 밖으로 나온 나는 어떻게 작별을 했는지 모른다. ‘수달피 털처럼 부드럽군요.’라고 말했던 지휘자, 그는 그의 감정을 스스로 자제한 신사였다. 그것이 내게는 더 존경스러웠다. 아니 사랑스러웠다. 스스로를 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깨끗한가.... 그와 헤어진 후, 나는 옷장이 있는 공간 카페트에 떨어진 만년필을 발견해 주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만년필처럼 생겼으나 접었다 늘렸다 할 수 있는 지휘봉이었다. ‘지휘봉을 떨 구고 갔군....’ 전화로 알려 줄까? 생각을 하다 나는 돌려주지 않고 사랑의 징표로 내가 갖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랑의 정표, 영원히 그리고 내 가슴속 깊이에.... 순간 나는 내 마음 속에 들려오는 자책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는 한국 사람일 뿐, 너의 남편은 아니다. 네 마음속에 이미 속된 음욕을 품고 있느니라....’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사람의 심정이었다. 아니 남편에게 큰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으나 마음속 다른 한편에서는 당당한 변명이 도사리고 있었다. * 내 마음에 이런 죄책감과 당당함이 생기다보니 자연스레 남편도 내 마음을 읽고 있다고 느껴졌다. 아니 무엇인가를 의심한다고 느껴졌다. 지휘자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고 생각했다. 5. 코번 박사에 의해 파킨손 병이 진단된 이후 좋은 약을 받아 복용을 하건만 내 병세는 좋아 지기는 커녕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손이 떨리는 것도 문제지만 사고로 인한 외상이 더 큰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2층에서 내려오다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응급실로 가 뇌 검사 그리고 골절 검사를 한 결과 갈비뼈에 금이 갔다고 했다. 그 후에도 소변이 급해 화장실로 가는 도중 나는 몇 차례 넘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넘어지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이 더 커지다보니 실수를 더 하는 듯했다. 엎친대 곂친다고, 기억력도 점차 나빠지고 쉽게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아! 내가 어쩌지? 내가 어쩔꼬?” 나는 절규를 하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동차 운전을 못하다보니 오케스트라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만 있어야했다. 그러기에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휘자를 볼 수가 없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지휘자님을 보고 싶은데.... 내가 아픈 것을 그는 알고 있나?’ 나는 조급했으며 어서 속히 알려 주고 싶었다. 나는 전화를 걸어 나의 상태를 몇 차례 지휘자에게 알려 주었다. “오케스트라는 걱정 마시고 치료나 잘하세요. 그리고 파킨손 병에서 회복되는 대로 다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꼬옥,....” 아주 사무적인 대답 속에 꼬옥이라는 단어 하나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며칠 후 나는 지휘자를 만나보려고 큰 마음을 먹고 자동차를 몰고 집밖으로 나와 동네를 벗어나다가 갑작스레 차가 흔들리면서 가로수를 드려 받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이 혼몽함을 느꼈다. 앰부란스가 달려와 나를 인근 세인트 쥬드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얼마 후 남편과 아들이 응급실로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가족으로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있었다. -이처럼 응급 상황이 돼도 나는 지휘자님을 부를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남편과 아들은 불러도 되지만 그는 식구가 아니기에, 아니 남자이기에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다른 사람보다 그가 달려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인데...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나는 그를 부를 수가 없지 않은가? 남편이 아니니까...- 남편을 따라 집으로 돌아 왔지만 자동차는 폐차가 되었으며 더 이상 자동차를 탈 수 없다는 경고를 받았다. 다리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더욱이 오케스트라에 갈려고 했던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신? 그 지휘자, 다시는 만나지 말라!” 남편은 미국사람답게 강경하게 똑 부러지는 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요?” “무슨 말이긴? 몰라서 묻나? 한국 사람끼리 한국말만 하면서, 불쾌해.” 남편은 중간에 말을 멈췄다. 얼굴이 붉게 상기돼 있었다. 남편은 내가 남편 몰래 지휘자와 정을 통한다고 생각하였는지 전보다 강경하게 그리고 예의 주시를 하는듯했다. 한편, 파킨손 병의 치료를 위해 몇 가지 약을 먹으며 남편이 개업하는 진료실 근처에 있는 물리치료실에 가서 걷기 운동을 계속했다. 남편은 물리치료실에 불쑥 찾아와 나를 보곤 했다. 골절은 많이 회복됐으나 일어나 걷기가 힘들었다. “아무래도 워커(Walker.보행기)를 사용해야겠습니다. 미세스 허친손!” 지팡이를 집고 일어날 때와 워커를 집고 일어나는 것은 엄청난 차이였다. 워커를 집고 일어나다 또 다시 넘어졌다. 이번에는 골반을 다쳤기에 일주간 꼼짝을 못하다가 다행히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휠체어를 사용해야 했다. 휠체어에 의존하다보니 이젠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됐다. 남편이 시간 날 때마다 휠체어를 밀어 주다가 일에 바쁘다보니 도움이 백인 아주머니를 고용해 나를 24시간 보살펴 주었다. 그래도 나는 불안 했으며 김현식 지휘자가 보고 싶었다. “김현식 씨가 보고 싶다. 어떻게 해야 그를 볼 수 있을까?” 나는 온통 그이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완전히 마취가 된듯했으며 뿅 간 느낌이었다. 몸이 불편하고 부자유스럽다보니 전화 걸기도 힘들었다. 그러기에 전화가 울려오기를 고대했다. 아무라도 좋으니 전화가 왔으면 하고 기다렸다. 따르릉-전화가 울렸다. 워커를 밀며 전화기를 향해 돌진했다. 누군가가 보내준 전화 벨 소리가 나에게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전화기를 잡기 전에 전화벨이 꺼졌다. “누구였을까? 누구? 혹시? 지휘자님?” 나는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나치다보니 전화마저도 그에게서 왔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잠시 후 전화벨이 다시 울렸을 때 이번에는 용케 전화기를 손에 잡을 수가 있었다. 뜻밖이었다. 내가 그토록 사모하던 지휘자님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걷기 힘들다고요?” 그는 놀라 내게 되물었다. “예. 겨우 발자국을 뜁니다. 지휘자님? 드릴 물건이 있는데....” “알고 있습니다. 그날 집에 놓고 왔군요. 당분간 가지고 계십시오. 제가 찾으러 갈게요. 꼭.” 그는 내게 약속을 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어디로 온다는 말은 없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약속을 꼭 지킬 사람이기에 나는 그를 곧 보리라고 생각했다. 파킨손 병이 이토록 빨리 악화 될 줄 알았더라면 그 날, 그 옷장이 있는 공간에서 진한 추억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아니 평생을 기억할 추억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사람? 죽으면 그만인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나 자신을 정에 굶주린 요부라고 생각했다. 6. 엉뚱한 인종편견으로 인해 생각지 못할 사건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한국사람, 김현식 지휘자는 미국사람과 살고 있는 나를 마치 인질로 잡혀 한 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는 가엾은 한국사람, 동족이라고 생각을 하다 보니, 뜻밖에도 의협심이 생겼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나의 엉뚱한 추측일 수도 있으며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망상일 수도 있다. -비록 내가 산프란시스코의 유태인 가문에 시집간 것을 백인들은 행운이라고 말하지만 한국사람, 동족의 눈으로 본 나는 분명 납치돼 감옥소에 매여 사는 불행한 여인이었다. 그러기에 그(지휘자)는 자신을 의협심이 강한 사나이이기에 나를 오지에서 구출해 내려고 뛰어든 특공대라고 생각을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내게 보여준 얼굴 모습과 내 남편, 빌을 향에 표시한 반감을 보아서 알 수 있다.- 파킨손병에 걸려 손발을 떨다가 이젠 걷기도 힘들어 휠 체어에 의존해 사는 나를 언젠가 찾아와 나를 그의 등에 들쳐 업고 속박된 부자유의 세계로부터 나를 자유의 세계로 데리고 가리라고 나는 진심으로 믿고 있다. 나를 해방 시켜 줄 구세주라고 생각하니까.... 오늘도 그는 오지 않았다. 물리치료실에 찾아 올 수 있으련만......, 아니면, 멀지기 서서 나를 바라다보고 갈 수도 있는데, 왜 지휘자, 그는 오지 않는가? 나는 그의 모습을 오늘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일은 볼 수가 있을까? 나는 손을 꼽아 하루하루를 세어보는 바보가 되고 말았다. * 설상가상으로 병이 점점 더 악화 돼 나는 휠체어에 앉아 있기도 힘들어 침대에 눕는 날이 더 많다. 파킨손 병뿐만 아니라 동반된 약간의 치매(Dementia)증세가 나를 괴롭힌다. 기억력이 떨어지며 활동도 극히 제한돼 이빨 빠지고 헛소리하는 노인처럼 되었다. 파킨손 병의 권위자라는, 코번 박사도 내 병의 진행 속도가 이토록 빠를 줄은 예측 못했다고 했다. 요즘 나는 고독하다. 그리고 허무하다. 나이 40세에 파킨손병과 치매로 인해 내 인생을 접어야 한다니...아니 접을 수도 있다고 하니, 한 때는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바이올린 솔로로 그들을 매료시키기도 했었는데... 우레 같은 박수소리를 들으며. 바이올린의 신동이요, 천재라는 칭찬도 들었는데. 이젠 내 발로 서지도 못하고 바이올린도 내손으로 들 수가 없다니.... 눈물이 찔끔 솟았으며 허무한 생각으로 휘청했다. 7. 문득 지휘자가 놓고 간, 아니 내가 돌려주지 않고 사랑의 징표로 갖고 있는 지휘봉을 조물락 조물락 만져보노라니 4년 전, 정기 연주회 때 심포니와 협연했던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 바이젠(집시의 노래 또는 별)’ 음악이 내 귀에서 들린다. 분명, 단원과 나를 향해 지휘자는 내가 갖고 있는 이 지휘봉을 들고 지휘를 했었던 기억이 눈에 선명하게 재생되어 나타난다. “그래. 바로 이 지휘봉으로, 그는 나를 향해 지휘를 했었지.....” 그가 지휘봉을 휘두르는 모습이 내 망막 속에서 크게 떠오른다. 달팽이관에서 크게 증폭된 소리가 왕왕 울려온다. * -그날, 나는 부드러운 수달피(水獺皮) 털이 옷깃과 소매 그리고 가슴중앙에 세로로 밖힌 화사한 붉은 원피스 옷을 입고 무대에 섰다. 내 솔로연주를 위해 전체 단원들이 흥겹게 바이올린과 각종 악기로 대답하던 그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갑작스레 크게 울려온다. 나는 집 없이 떠도는 집시, 아니 애틋한 사랑을 찾아 헤매는 붉은 옷을 입은 집시 여인이요,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달라 숨이 막혀 집을 뛰쳐나온 한국에서 온, 집시라고 생각하며 바이올린 줄을 신들린 사람처럼 튕기고 있다. 어느새 내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다. 스페인 풍의 흥겹고 신나는 박자에 맞춰 지휘자는 온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듯하다. 관중들은 조요히 그리고 숨을 죽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놀라운 것은 해가 지자 사방은 어두워진다.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집시들은 모닥불을 피운다. 그리고 박수를 치며 노래를 하다가 옷을 던져 버리면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나도 그 들과 더불어 바이올린 현을 강하게 그리고 약하게 잡아당긴다. 어느새 캄캄한 하늘에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다. 집시의 노래 아니 집시의 별들이 내 손에서 더 감미롭게 울려나온다. 나를 향한 지휘자는 강렬한 눈빛으로 와인을 마신 남자 집시처럼 잡아 삼킬 듯이 나를 뚫어지게 처다 본다. 나는 지휘자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순간 지휘자, 김현식 씨의 손끝에서 지휘봉이 크게 그리고 길게 뻗쳐 나오고 있는 듯하다. 수달피 털로 장식된 붉은 내 의상은 부드럽게 바이올린 소리를 빨아 드리는 듯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바이올린 활을 강하게 그리고 애처롭게 위 아래로 당기고 밀고 있다. 순간 내 코앞에서 연미복을 입은 지휘자, 김현식 씨가 그 지휘봉을 높이 들더니 나를 향해 크게 원을 그리며 소리친다. “사랑하는 정순씨, 못 견디게 외로우면 내 지휘봉을 잡으세요. 내가 그대를 건져 내리다.”라고. “지휘자님? 나를 잡아 주세요. 내 가슴이 터지는 것 같군요.” “정순씨? 힘을 내소. 어짜피 우리들은 집시들입니다. 밤마다 별을 따라 방황하는 집시오. 당신이 활을 던지는 지고이네르 바이젠은 바로 집시의 별이 아닙니까? 우리 집시들은 밤이면 모닥불을 피워 놓고 먼 하늘의 별을 바라다보며 둥근 원을 그리며 춤을 주지 않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허깅하며 사랑을 나누지 않소! 한국을 떠난 우리들도 어찌보면 고향이 없는 집시들이지요. 정순씨? 당신의 손에 잡힌 그 활을 더 당기세요. 저기 모닥불에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집시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위해서, 어서! 어서!” “지휘자님? 모닥불이 따스하군요. 수달피 털처럼. 그리고 저 하늘의 별, 집시의 별이라고 했지요? 지휘자님이 바로 그 별이군요. 멀리서 반짝이며 내 손을 기다리는 그 별이군요.” “........”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갑자기 단원들이 나를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지휘자는 내손을 잡고 청중을 향해 내 손을 높이 들어 준다. 그리고 그는 내가 입은 수달피 원피스를 감싸 크게 허깅한다. “정순씨? 수달피 털, 정말 부드럽군요.” “그 때, 저를 안아 주셨지요. 거기서.....” “....................”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가 지휘하는 대로 나는 나의 바이올린 활을 당기련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비록 내 몸은 휠체어에, 아니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린다고 해도. 소설 끝. 2012년 12월. 계간 문학과 의식에 등재. 저자 소개: 연규호(延圭昊, kyu ho yun,) 연세의대 졸업 내과 전문의사 한국 펜. PEN USA. 회원 한국, 미주 문협 회원. 한국. 미주 소설가 협회 회원 미주 펜 문학상(소설) www.mijumunhak.com/yunkyu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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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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