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2013.05.20 14:14

연규호 조회 수:943 추천:47

2013년, 5월호 "나의 인생, 나의 문학" 의사-소설가: 연규호의 인생과 문학 제목: 네 개의 수례바퀴 처럼 돌아간 문학 소년의 꿈과 인생 1. 네 개의 잎사귀에 쓴 인생의 꿈(포부)들 1960년 4월 19일--- 4.19 민주혁명이 나던 날, 나는 꿈 많은 대광고등학교 1학년(10th grade) 16세 소년이었다. 수 백 년을 이어갈 것 같았던 자유당정권이 학생과 시민에 의해 허망하게 붕괴되고 희망찬 민주정부가 따스한 봄날에 파릇파릇 새싹으로 돋듯이, 시골소년의 작은 가슴속에도 소용돌이치는 인생의 꿈들이 추운 겨울을 이기고 언 땅을 비집고 고개를 삐쭉 내밀고 있었다. 소년 연규호에게도 작고 숭고한 꿈들이 푸른 새싻이 되어 기지개를 펴고 네 잎사귀를 만들며 솟아나고 있었다. -첫째 잎사귀(꿈)에는 의사(醫師)가 되자. 둘째 잎사귀에는 소설가(小說家)가 되자. 셋째 잎사귀에는 사람을 돕는 기독교(基督敎) 신자가 되자. 그리고 마지막 잎새에는 가문(家門)을 빛내는 아들이 되자.-라고 쓰여 있었다. * 그리고 53년의 세월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흘렀다. 내 나이 68세 노인이 됐다. 과연 그 때 그 작고 연두색 나던 그 잎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작은 꿈(잎새)들은 어떤 모양이 되었을까? 인생의 황혼에 그 잎새(꿈)들을 결산을 해보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어 마음 아프다. 우선 마지막 잎새(꿈), “가문을 빛내는 아들이 되자.”는 산산히 부서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고향을 등진 실향민이요, 조국을 잃은 방랑자, 미국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내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싶었다. 그러기에 나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내과 전문의사 과정을 수련하고 고향 청주로 내려가 도립병원에서 내과 과장과 원장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성공적으로 은퇴한 후,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증평군 도안면에 작은 진료소를 세워 연(延)씨들과 동네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죽어 선산에 묻치는 것이 나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을 마친 후 내 꿈은 180도 반대 방향으로 바뀌어 공군군의관을 마친 후 미국으로 유학와 힘들게 공부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내과 전문의사가 돼 칼리포니아 로스앤젤스 남쪽 가든그로브에서 내과 개업을 하고 있으니 인생의 아이로니가 아닌가? 나는 1973년에 미국으로 와, 뉴저지주에서 4년, 오하이오주에서 2년, 칼리포니아주에서 34년, 도합 40년을 살아 온 셈이다. 육신은 미국에, 마음은 한국에 그리고 내 영과 혼은 태평양 상공에서 방황하는 고향 없는 방랑자로 살았다. “아니? 미국에서 내과 전문의사로 개업을 하고 있으면 성공한 것 아니요? 괜히 넉두리 하자 마소!”라고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마는 내 마음속에 있는 고향생각을 달래기 위해 뒤늦게 소설가가 되었다. * 1960년 4월, 16세 문학소년, 나는 주저함 없이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성공(成功)이라는 두 글자를 벽에 써 붓치고 의사가 되려고 이를 악물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틈틈이 시(詩)와 수필(隨筆)을 써 학원과 학생문예지에 투고를 해 운 좋게 입선도 됐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나는 단편소설을 써 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쉽사리 되질 않았다. 그리고 고 3이 되자, 문학은 일절 접어두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해 연세대학교 의예과에 입학, 그리고 6년 후 의사가 되었을 때, 나는 고교 때 접었던 문학을 할 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으나 천만의 말씀, 전문의사가 되는 과정은 의과대학보다 더 힘들었기에 아예 문학을 단념했다. 그래도 한 가닥의 미련이 있어, “전문의사가 되면 문학을 하리라”라고 마음을 먹었으나, 모든 것이 경쟁적인 미국에서 백인들 속에 묻혀 살다보니 문학의 문자도 생각 할 수가 없었으며 한국 말 조차 퇴화돼 철자법조차 잊고 말았다. “문학은 저 먼 하늘의 별...도저히 가까이 갈 수없는 그런 별”이 되었다. 가까스로 미국내과 전문의사 과정을 마친 후 전문의사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그뿐인가, 미국이란 나라에서 내게 주어진 경제적인 책임을 다 하기 위해 나는 밤낮 없이 병원으로 진료소로 뛰어 다니다 보니 ‘문학이란 것이 있어나?’라고 반문 할 만큼 천치 바보가 되고 말았다. 남을 돕는 기독교인이 되고자했던 또 다른 잎새의 꿈도 덩달아 실천 불가능한 한줌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의사란 직업은 남을 돕는 것은 고사하고 나 잘살기 위해 밤낮 없이 뛰어 다니는 돈버는 노동자에 불과 했으며 고등학교 때 품었던 문학 소년의 꿈이란 허드슨 강 거너편 뉴욕 시내, 마천루에 걸려있는 오색의 네온사인에 불과했다. 남을 돕겠다고 한 기독교인의 꿈은 허울 좋은 가식 일 뿐이요 허드슨 강을 오고 가는 유람선에 불과한 허망한 꿈이었다. 이렇게 칼리포니아에서 골프나 치며 햄버거나 먹으며 살다가 죽어 로즈 힐 공동묘지에 묻혀 사라진다면 내가 사는 의미는 아무것도 아니요 헛되고 헛된 인생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우울해지다 못해 죽고 싶은 마음도 났다. 고향을 버리고 미국에 와서 내과의사로 돈이나 벌다 죽는 것보다 차라리 청주에 가서 농사 짖다가 죽는 편이 더 좋으련만......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것이 내 인생이라면? 의미가 없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니 꿈 많던 문학 소년의 인생도 어느새 50세가 됐다. * 1994년 5월 7일. 내 나이 49세, 의과대학 졸업 25주년 재상봉(再相逢)의 날은 내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이 되었다. - 한국과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졸업동기들이 25년 만에 가슴 설레며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만나던 그날이었다. 졸업당시 24-25살이었든 청년의사들도 25년이 지나고 보니 49-50세의 중년이 되었으며 교수, 부자, 성공한 사람이 되어 당당하게 나타났는가 하면 성공하지 못해 뒷전에서 말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하라는 대로 하는 동창도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쓰리고 아프게 한 것은 이미 죽어 이 세상을 하직한 친구들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나와 짝을 했던 유상진이었다. 졸업25년 후에 만난 동창들은 성공과 실패라는 명암이 선명했으며 행동 거취도 완연히 달랐다. 성공한 동창은 어디에서 보나 우뚝 솟은 탑처럼 달라보였다.- * 그렇다면 꿈 많았던 문학소년 연규호의 위상은 어찌 되었는가? 성공한 의사? 아니면 성공하지 못한 평범한 의사? 나의 모습은 쌓다가 우루루 무너져 버린 시골 언덕의 성황당 돌더미만도 못해보였다.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었으니까..... -솔직히 평가해보면, 의사 연규호는 학문적으로는 논문 한편도 못 쓴 밑바닥 인생이요, 돈도 제대로 못 벌은 평범한 개업의사로 집 월부금내고 애들 학비를 불편 없이 내주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무명의 의사였다. 조국을 버리고 미국의 변방 가든그로브에서 밥 먹고 살기위해 뛰어 다니는 '볼 품 없는 쓰레기 같은 의사, 연규호'가 졸업 25년 후의 솔직한 성적표였다. 어찌 보면 잘 먹고 잘 살기위해 당시 가난했던 조국을 버리고 미국에 간 매국노, 배신자에 불과했기에 얼굴이 화끈해 지면서 부끄럽기만 해 어서 행사가 끝나고 미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와서 졸업생이라고 서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토록 곤혹스럽고 힘들었던 25주년 재상봉 모임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준 전환점이 될 줄 누가 알았든가........ 생각지도 못하게 재상봉 행사 중에, 동기 동창, 강군순과 정병찬군의 죽음을 내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는 사건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정형외과 교수로 존경을 받던 친구, 강군순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자상하고 다정한 친구, 정병찬의 아련한 49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아- 친구도 가는구나...속절없이...그러면 죽은 후에 그들이 간곳은 어디인가?" 나는 죽음 뒤에 찾아가는 새로운 영적 세계를 그들의 죽음을 통해 체험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큰 축복이요, 긍휼이었음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있다. 나에게도 죽음이 있다. 그렇다면 그 죽음을 준비해야지......" 도리켜 보면 미국에서 내과 전문의사가 된다는 것은 피 눈물 나는 노력이며 외국인을 상대로 개업을 한다는 것은 전쟁과도 같은 고역이다. 밤잠도 제대로 못자고 휴가도 제대로 해 보지 못했기에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2. 뒤 늦게, 50살 나이에 문학 소년의 꿈을 다시 시작하다. 나이 50세가 되고 보니 내게도 인생 경험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다른 말로 소재가 많이 있었다는 말이다. 죽음, 실연, 그리고 인생의 실패로 인해 병들었던 환자들의 아련한 기억들이 살살 밖으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문학 공부는 커녕 소설쓰기 작법도 한번 읽어 보지 못했지만 책상에 앉아 글을 쓰노라면 글이 자연히 써 지기 시작했다. 결국 내게도 문학의 재능(끼)이 있음을 알게 됐다. 하나님이 내게 문학이라는 은사를 주셨음을 나는 알게 됐다. 1995년 1월부터 나는 내과 의사라는 직업뿐만 아니라 문학에 몰두하는 또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 아울러 교회에서 파송하는 단기 의료 선교사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과테말라, 니카라카에 10여년 간 15차 다녀왔다. 고등학교 때 포기했던 소설에 도전하여 단편 소설은 물론 마침내 장편 소설을 쓸 수가 있었다. 1997년 산문집. ‘의사 그리고 25년’을 출판했으며 1998년 단편 소설 모음집.‘이슬에 묻혀 잦아든다 해도’를 출판했다. 2000년 1월과 4월에 걸쳐 나는 장편 소설 4권을 동시에 출판했다. -장편 소설, 안식처(安息處), 망상의 담쟁이 넝쿨, 깔리만탄의 사랑 그리고 사랑의 계곡- 등단도 하지 않은 무명의 내과 의사가 4편의 장편소설을 출판 했을 때 내개 돌아온 반응은 두 가지였다. 첫째: 기성작가들의 못된 반응이었다. “의사가 무슨 소설을? 게다가 등단도 하지 않은 주제에. 의사나 하지! 돈이나 벌지? 철자법도 틀리면서.” 두 번째 반응은 내 글을 읽은 평범한 나의 환자 그리고 교포들의 진솔한 반응이었다. “닥터. 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건강을 책임지는 내 주치의사가 글을 썻으니 자랑스럽습니다. 언제 그렇게 글쓰기를 배웠나요? 나도 쓰고 싶습니다. 그러니 계속 쓰세요. 계속....“ 환자들과 교포들의 칭찬이 나를 더 격려해 주었다. 2000년 이후 나는 매해 한편 이상의 장편 소설을 써 지금까지 장편 13편, 단편 소설집 1편 그리고 산문집 1편 그리고 영문, 스페인어 번역 소설 3권을 발표 했다. 2001년, 장편소설, “마야의 눈물” 그리고 “마야의 꿈”이 그것이다. * 2002년 나는 “샤이엔강의 사랑”이란 단편으로 기성작가들이 문제 삼던 등단을 하였으며 한국 펜 문학과 한국 문협에 회원이 되었다. 그 후 영문으로 내가 쓴 소설 두 편을 번역해 발표했기에 미국 펜클럽 정회원(PEN USA)이 되었다. 미국 펜클럽 정회원으로 가입된 한국 사람은 몇 명 안 되었다. 나는 문학소년 시절부터 펜 클럽 회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것을 실현해 보았다. 그 후 나는 장편 소설, “오하이오강의 저녁노을”을 발표했다. 연이어 쓴 장편 소설, “내가 사랑한 몽골의 여인들”은 미국에서 쓴 한국과 몽골의 얘기이다. 연이어 쓴 장편 소설, “거문도에 핀 동백꽃은...” -미국에서 본 거문도는 아름답고 가보고 싶은 섬이다. 이 섬에 내 마음을 빼앗겼다. 1967년 월남전쟁에 참전했던 친구, 김권후 중위의 죽음을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남가주 월남타운을 연계해 쓴 사랑의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 나의 고향, 청주와 그곳에 있는 성공회당의 모습이 아련하다. 참으로 소설은 어느 곳으로든지 어느 말로든지 자유자재로 통하는 마력을 가진 것이기에 나는 세계 속을 헤집고 다닌다. 물론 이 소설은 영문으로 번역, 출판해 한국과 월남 2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연이어 쓴 장편소설,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는 피츠버그 미식축구 선수, 하인즈 우드를 소재로 쓴 혼혈아에 대한 소설이다. -1964년, 내 이웃에 살던 백인 혼혈아 김금자는 어느날, 미국에 산다는 백인 아버지를 찾아 갔다. 그 후 내 마음 속에는 ‘금자는 미국에 가서 어떻게 됐을까?’ 늘 궁금했었다. 그런데 오하이오 데이톤에서 나는 국제 결혼한 여인들을 볼 수 있었다. 이들 중에 혹시 금자가 있지 않을까? 연이어 쓴 장편 소설, “내 고향은 소록도” -1967년 의과대학 3학년 때 나는 유준 교수님과 같이 고흥반도 끝자락에 있는 눈이 큰 사슴처럼 생겼다는 소록도를 찾아간 일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양성 나병환자들을 보면서 무서워했었다. “너희들! 문둥병 환자가 무서워서 벌벌 떨면 어떻게 의사가 되겠는가? 다미엔 신부와 손양원 목사님을 보라!” 유준 교수님의 가르침이 40년 후에도 생생히 들려 왔다. 연이어 쓴 장편소설: “아오소라(靑空)” -나는 미국에서 내과 전문의사 수련을 받으면서 2번에 걸쳐 낙제를 하였다. 전문의사가 되는 길이 이토록 힘들었을까? 이유는 내가 미국 사람이 아닌 외국인, 즉 한국인이기 때문이었다. 낙심, 수치심 그리고 우울증과 자살 충동까지 느꼈던 30대 초반, 나를 구해준 은인이 있었다. 뜻밖에도 어려서부터 배워 온 한국민족의 원수인 일본 사람 의사였다. ‘제임스 타구치’ 의사는 오하이오 데이톤에 있는 라이츠 의과대학 외래 교수였다. 그는 데이톤 원호병원의 내과 과장으로 절망 속에서 인생을 포기하려고 한 나를 구해주었다. 그러기에 나는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세월이 흘러 나의 큰 아들이 일본 경도 대학에서 교환 학생으로 일 년 공부를 한 후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 졸업을 했다. 내 아들은 일본을 좋아해 아예 일본 규수에가서 취직을 하고 그곳에서 일본 아가씨와 결혼을 하였다. 동아일보 유광렬 논설위원이 쓴 글, “멀고도 가까운 이웃 일본”에서 한국인은 일본 사람을 가르켜 ‘쪽발이, 냉혈동물’등으로 표현했으며 일본인은 한국인을 ‘더럽고 거짓말 잘하는 그리고 게으른 민족’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일본인 며느리를 통해 태어난 내 손녀들은 더럽고, 거짓말하고, 게으르며, 쪽발이, 그리고 냉혈동물의 피를 받은 아주 나쁜 인간일진대, 그렇지가 않았다. 나는 내 손녀들을 사랑하며 그들은 분명 나를 사랑한다. 나의 큰 손녀의 이름이 아오소라(靑空)이기에 나는 장편소설“아오소라”를 완성해 출판을 했으며 일본어로 번역을 마쳐 일본에서 출판하려고 한다. 연이어 쓴 장편소설, “샤이엔”과 “샤이엔의 언덕“ -나는 중국역사와 한국역사의 만남을 좋아한다. 카나다를 대륙 횡단하다보니 마니토바, 사스카춘 근처에서 소쿠리를 들고 다니는 한국사람 들을 기차에서 보았다. “웬 한국 사람들이?”나는 궁금했다. 그리고 이내 알게 된 것은 “아! 이들은 수. 인디안이다! 수 인디안.....” 엘로우스톤 공원에서 본 수 인디안과 버팔로가 나를 샤이엔강과 불랙힐스를 알게 해 주었기에 나는 장편소설, “샤이엔”과 “샤이엔의 언덕“을 쓸 수가 있었다. 3. 네 바퀴가 같이 돌아야 전진한다. 1960년 4월, 16세 고등학교 일학년 때 품었던 네 가지의 꿈은 어찌보면 아직도 이루지 못한 미완성으로, 네 바퀴는 아직도 전진하고 있다. 미국에서 내과 전문의사로 바쁘게 지냈으나 머지않아 은퇴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의사라는 직업은 의료선교로 계속되며 그로인해 얻은 소제들은 소설로 연결된다. 그래도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은, 내 고향에 돌아가 작은 진료실을 만들어 내 고향 사람들과 연씨(延) 종친들을 위해 봉사할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소설쓰기는 눈이 안보일 때까지, 그리고 청진기는 귀가 안 들릴 때까지 의료 선교는 걷지 못할 때까지 네 개의 바퀴는 계속 돌 것이다. 파랬던 네 잎사귀는 점점 떡잎이 돼 낙옆으로 나무에서 떨어지겠지마는...... 톰 존스의 노래, ‘고향의 푸른 잔디’ 가 들려온다. “내가 고향에 돌아오니 산천은 변함없네. 부모님이 나를 마중 나왔네. 기차에서 내려 언덕아래를 바라보니 붉은 입술에 금발의 메리가 나를 향해 뛰어오네. 우리는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걸었네.” -의사 소설가, 연규호가 나이 들어 고향에 돌아오니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산천은 몰라보게 변했으나, 백발이 된 옛 소꿉친구, 아리가 나를 반겨 주리라. “미국에 가서 고생 많이 했구려. 백인들 등살에 숨도 못 쉬고, 뼈 빠지게 일했으나 손에 남는 것이 없군. ‘연규호’, 여기서 편히 쉬시게. 냇가에 가서 송사리, 메기도 잡고 뚝방에 가서 메뚜기도 잡으면서. 비오는 날, 같이 비를 맞으며, 함박눈 내리면, 눈사람도 만들자. 그리고 뜨거운 커피를 타 줄게. 홀홀 마시며 눈물 나던 미국 얘기, 꿈에도 보고 싶었던 고향 얘기. 그리고 너와 나의 사랑 얘기를 소설로 써 보시게. 규호!“ 내 손을 꼭 잡은 그녀의 손등에 따스한 눈물이 몇 방울 떨어지는 구나. 그리고 네 개의 잎새는 낙옆이 돼 땅으로 떨어진다.- 돌이켜 보면 16세 소년의 꿈을 담은 수레는 네 개의 수레바퀴 때문에 전진했다. 네 바퀴가 조화를 이루면서 돌 때는 앞으로 전진하나 어느 바퀴가 거꾸로 돌면 수례는 전진하지 못하고 그곳에 정차하고 말았다. 의사, 소설가, 기독교 신자, 가문을 위한 아들, 이 네 바퀴는 아직도 돌아야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했듯이 연규호라고 하는 수레는 진리를 향해 오늘도 굴러간다. 끝. 저자 소개: 연세의대 졸업 후, 미국에서 내과 전문의사 PEN(한국과 미국) 회원 미주. 한국 문협. 소설가 협회 회원 미주 펜 문학상. 연세의대 총동창회 공로상(문학) 장한 연세인상(미주) 작품: 장편소설: 안식처. 망상의 담쟁이 넝쿨, 깔리만탄의 사랑. 사랑의 계곡. 마야의 눈물 오하이오강의 저녁 노을, 내가 사랑한 몽골의 여인들. 샤이엔.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거문도에 핀 동백 꽃은. 내고향은 소록도. 마야의 꿈. 아오소라. 샤이엔의 언덕 산문집: 의사 25년. 단편소설 집: 이슬에 묻혀 잦아든다 해도. 영문 소설(3) 스펜인어 소설(1) www.mijumunhak.com/yunkyuho kyuhoyun@yahoo.com 7146360133 7148874213 9982 Bixby C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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