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께
2007.10.21 10:55
<편지 글>
o o 스님께
아침나절, 씻은 고춧잎을 한 소쿠리 건져놓고 잠시 거실로 들어 왔습니다. 가을햇살이 먼저 거실까지 들어와 있네요. 시방, DVD에서는 뮤지컬 ‘레 미제라블’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디오기기를 오랫동안 작동을 안 하면 고장이 날 수 있다기에 아까 켜놓고 나갔다 들어 왔거든요. 소파에 앉아 화면을 보다가, 마저 장 발장의 ‘그를 살려 주소서!’란 노래까지 듣고 있습니다. 매번 들어도 눈물이 나는 노래입니다. 가슴밑바닥에서 끌어내는 듯 절묘한 저 노래는 어찌 저렇듯 슬프도록 아름답고 장엄한지요?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나오는 장 발장은 프랑스 혁명이전, 정의롭지 못한 정치경제 구조 밑에서, 어려움에 처한 나머지 빵 하나 훔친 일로 19년의 중형을 살아야 했었지요. 그는 주교 집에서 은식기를 훔쳤지만 오히려 주교는 그를 보호해주고 값비싼 은촛대 한 쌍까지 더 주었지요. 이러한 주교의 온정에서 장 발장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고, 헌신적으로 가난하고 약한 자의 이웃으로 살았잖아요?
‘그를 살려 주소서!’는 극중에서 장 발장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좋은 세상을 꿈꾸던 청년, 마리우스가 시민군에 가담해서 진압군과 대치하다 부상하게 되었지요. 장 발장은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마리우스를 살려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간절하고 애절한 기도지요. 마리우스는 장 발장의 양녀, 코제트의 연인이었잖아요? 코제트는 판틴의 딸이었고요.
스님! 저는 이 이야기에서의 감동이 여운으로 남아 노래까지 가슴을 파고들지만,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장중하고 호소력 있는 이 노래를 작곡가 숀베르그만이 풀어내지 않았나 싶네요. 내 나름으로 내게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간절함이 저 노래 속에 동화됩니다. 살아갈 시간을 차분하게 바라보게 하는 영혼의 울림이 저 노래에 담겨있는 듯싶고, 살아온 시간 회한의 정(情 )도 저 곡 속에 녹아있는 듯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둘째딸아이와 통화했는데 그가 들려준 선시(禪詩)가 참 좋았습니다.
대 그림자 마당을 쓸어도 먼지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물속에 들어가도 물위가 흔들리지 않네
이런 시인데 이 시는 어떤 분의 작품일까요? 지고한 인품을 지닌 분의 시일 듯싶네요. 이 나이에도 마음의 물결을 잠재우지 못하는 나를 되돌아 보았습니다.
2006, 9. 25.
스님! 여기까지 써 놓았던 편지, 끝맺지 못하고 어느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요. 다시 정서를 하고 이어서 몇 자 더 적습니다. 보내주신 ‘山色’ 은 잘 읽었습니다. 머리맡에 놓고 늘 토막토막 읽으며 마음을 다듬어 보면 좋을 듯싶은 내용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날이 밝아 옵니다. 앞산에는 부옇게 안개가 덮여 있네요. 창과 마주 놓은 책상 앞의 의자에 잠시 앉아 있습니다. 투명 유리창 너머로 산을 바라보노라면 타인과는 공유할 수 없는 시름도 정리될 때가 있습니다.
스님도 지난여름 무척 바쁘게 지내셨군요. 감히 우리 속인들로서는 공감할 수 없는 엄혹한 수행을 하시는 ㅇㅇ스님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매번 스님의 편지는 깊고 청아하고 은근한 인상을 받습니다. 신학을 공부하셨다는 스님에게 친근감을 갖게 된 것은 나 역시 신학을 공부해서일까요? 지난봄에 강원도 산사를 찾은 것은, 주지스님을 뵙고자 해서였는데 뜻밖에 ㅇㅇ스님까지 만나게 되어서 제게는 귀한 친구를 한 분 더 만난 셈입니다.
저는 이제 좋은 시절 다 갔는데 무에 그리 열정이 남았다고, 한지 공예개인전도 계획을 새우고, 글도 쓰고 싶고, 못 읽은 책도 더 읽고 싶으니, 78세의 욕심치고는 부질없는 탐심이 아닐까요? 지난날, 80세를 바라볼 때면 아득 했었는데 짐짓 해놓은 일 없이 어느덧 일 년여 반 앞으로 다가왔네요.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 한 번 새겨 봅니다.
이제 바깥에 나가 고구마를 캐야겠습니다. 올해 처음으로 심어 봤거든요. 늦은 봄에 두럭을 만들고 거기에 고구마 줄기 하나씩 꽂아 놓고, 여름에 푸세 한 번 매주었는데 가을에 투깔스럽게 밑이 들었군요. 얼마나 예쁜지, 이런 게 시골 사는 재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소식 전하지요. 강원도에는 벌써 첫눈이 내렸다면서요? 더구나 강원도 산사에는 추위가 더 빨리 올 터이니 늘 몸조심하시고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2006. 10. 20.
단풍의 고장 전라북도 정읍에서, 정 원 정 올림
o o 스님께
아침나절, 씻은 고춧잎을 한 소쿠리 건져놓고 잠시 거실로 들어 왔습니다. 가을햇살이 먼저 거실까지 들어와 있네요. 시방, DVD에서는 뮤지컬 ‘레 미제라블’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디오기기를 오랫동안 작동을 안 하면 고장이 날 수 있다기에 아까 켜놓고 나갔다 들어 왔거든요. 소파에 앉아 화면을 보다가, 마저 장 발장의 ‘그를 살려 주소서!’란 노래까지 듣고 있습니다. 매번 들어도 눈물이 나는 노래입니다. 가슴밑바닥에서 끌어내는 듯 절묘한 저 노래는 어찌 저렇듯 슬프도록 아름답고 장엄한지요?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나오는 장 발장은 프랑스 혁명이전, 정의롭지 못한 정치경제 구조 밑에서, 어려움에 처한 나머지 빵 하나 훔친 일로 19년의 중형을 살아야 했었지요. 그는 주교 집에서 은식기를 훔쳤지만 오히려 주교는 그를 보호해주고 값비싼 은촛대 한 쌍까지 더 주었지요. 이러한 주교의 온정에서 장 발장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고, 헌신적으로 가난하고 약한 자의 이웃으로 살았잖아요?
‘그를 살려 주소서!’는 극중에서 장 발장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좋은 세상을 꿈꾸던 청년, 마리우스가 시민군에 가담해서 진압군과 대치하다 부상하게 되었지요. 장 발장은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마리우스를 살려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간절하고 애절한 기도지요. 마리우스는 장 발장의 양녀, 코제트의 연인이었잖아요? 코제트는 판틴의 딸이었고요.
스님! 저는 이 이야기에서의 감동이 여운으로 남아 노래까지 가슴을 파고들지만,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장중하고 호소력 있는 이 노래를 작곡가 숀베르그만이 풀어내지 않았나 싶네요. 내 나름으로 내게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간절함이 저 노래 속에 동화됩니다. 살아갈 시간을 차분하게 바라보게 하는 영혼의 울림이 저 노래에 담겨있는 듯싶고, 살아온 시간 회한의 정(情 )도 저 곡 속에 녹아있는 듯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둘째딸아이와 통화했는데 그가 들려준 선시(禪詩)가 참 좋았습니다.
대 그림자 마당을 쓸어도 먼지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물속에 들어가도 물위가 흔들리지 않네
이런 시인데 이 시는 어떤 분의 작품일까요? 지고한 인품을 지닌 분의 시일 듯싶네요. 이 나이에도 마음의 물결을 잠재우지 못하는 나를 되돌아 보았습니다.
2006, 9. 25.
스님! 여기까지 써 놓았던 편지, 끝맺지 못하고 어느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요. 다시 정서를 하고 이어서 몇 자 더 적습니다. 보내주신 ‘山色’ 은 잘 읽었습니다. 머리맡에 놓고 늘 토막토막 읽으며 마음을 다듬어 보면 좋을 듯싶은 내용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날이 밝아 옵니다. 앞산에는 부옇게 안개가 덮여 있네요. 창과 마주 놓은 책상 앞의 의자에 잠시 앉아 있습니다. 투명 유리창 너머로 산을 바라보노라면 타인과는 공유할 수 없는 시름도 정리될 때가 있습니다.
스님도 지난여름 무척 바쁘게 지내셨군요. 감히 우리 속인들로서는 공감할 수 없는 엄혹한 수행을 하시는 ㅇㅇ스님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매번 스님의 편지는 깊고 청아하고 은근한 인상을 받습니다. 신학을 공부하셨다는 스님에게 친근감을 갖게 된 것은 나 역시 신학을 공부해서일까요? 지난봄에 강원도 산사를 찾은 것은, 주지스님을 뵙고자 해서였는데 뜻밖에 ㅇㅇ스님까지 만나게 되어서 제게는 귀한 친구를 한 분 더 만난 셈입니다.
저는 이제 좋은 시절 다 갔는데 무에 그리 열정이 남았다고, 한지 공예개인전도 계획을 새우고, 글도 쓰고 싶고, 못 읽은 책도 더 읽고 싶으니, 78세의 욕심치고는 부질없는 탐심이 아닐까요? 지난날, 80세를 바라볼 때면 아득 했었는데 짐짓 해놓은 일 없이 어느덧 일 년여 반 앞으로 다가왔네요.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 한 번 새겨 봅니다.
이제 바깥에 나가 고구마를 캐야겠습니다. 올해 처음으로 심어 봤거든요. 늦은 봄에 두럭을 만들고 거기에 고구마 줄기 하나씩 꽂아 놓고, 여름에 푸세 한 번 매주었는데 가을에 투깔스럽게 밑이 들었군요. 얼마나 예쁜지, 이런 게 시골 사는 재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소식 전하지요. 강원도에는 벌써 첫눈이 내렸다면서요? 더구나 강원도 산사에는 추위가 더 빨리 올 터이니 늘 몸조심하시고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2006. 10. 20.
단풍의 고장 전라북도 정읍에서, 정 원 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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