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속마음

2007.10.30 11:18

김세웅 조회 수:48 추천:15

술의 속마음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김세웅


학창시절, 가끔 들르던 학교 앞 다방에서는 홍차가 인기였다. 홍차를 가져와 커피에 프림을 타듯 위스키 두어 방울을 떨어뜨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컵의 홍차는 불그스레하게 투명해져서 어찌나 고운 빛깔인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환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 차를 마시면 후각(嗅覺)을 자극하는 향긋한 레몬 향이어서 정신이 산뜻해졌다. 홍차에는 각성제인 카페인이 많이 들어 있어서 몇 방울의 술이 그렇듯 신통한 상승효과(相乘效果)를 냈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된 초창기에 할아버지께서는 발 빠르게 예수님을 영접하셨고 고향교회의 장로로 개척자적인 역할을 하셨다. 그리고 조상님들이 몸 바쳤던 믿음의 유산은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오늘날에는 목사, 장로 등 직분자가 수두룩한 기독교 집안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지난 날, 한국의 기독교는 술이나 담배 그리고 도박을 영과 몸을 갉아먹는
것으로 여겨 팔을 걷어 부치고 막은 적이 있었다. 교회에 나가는 신도는 술, 담배를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일반인가운데는 크리스천이라면 모두 그런
틀 속에 갇혀 사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조선 조 말기, 나라의 운명이 저무는 해처럼 어
둠 속으로 떨어지는 때였다. 앞날에 대한 희망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백성들에게는 술이나 담배나 도박 등이 기댈 언덕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라의 형편이 도롱이 옷을 입은 거지나 진배없이 가난하고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처지에서 백성들이 그렇게 자포자기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기독교에서 용납하기는 심히 어려웠던 것이다. 까닭에 집안에서는 술뿐만 아니라 담배나 도박 따위는 명함조차 내밀 수가 없었다. 나는 대학 3학년 때까지 언감생심(焉敢生心), 그런 것들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뒤늦게야 술의 악의(惡意) 없는 속마음을 알아
차리게 되었다. 담배는 치명적으로 건강을 무너뜨리는 것이어서 가까이
해서는 안 되고 범죄적인 오락인 도박이나 아편 등도 끝까지 뿌리째 뽑아야 마땅하겠지만 술은 무절제하게 마시지만 않는다면 딴 음식과 같이 오히려 건강에 유익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술은 마치 칼과 같은 것이라고 느낀
것이다. 죽어가는 병자를 살리는 수술용 칼도 되는 것을 흉기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몇 방울의 술이 홍차의 맛을 좋게 하고 정신을 맑
게 해 주던 옛 기억은 좋은 쪽으로만 이용하면 술은 얼마든지 긍정적인 구
실을 해 주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 뒤, 종교적인 계율과 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겨 목사님 생일에
포도주로 손님을 대접하는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술이나 담배
등은 건강을 생각해서 스스로 알아서 태도를 가질 일이지 타율적으로 강요
할 일은 절대 아니라고 믿게 된 것이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운다고 해
서 죄책감을 가진다든가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
다. 술의 속마음은 우리의 생활을 한층 윤택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자기를 무절제하게 거칠게 마셔서 사람들이
나쁜 놈으로 미워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무척 좋아하는
돈처럼 쓰는 이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칭송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첫 번째 이적을 행하셨다. 술이 사람들에게 해롭고 나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구태여 포도주를 만드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술을 죄악시하지 않으셨고 제자들이나 따르는 사람들과 포도주를 마셨기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사람>이라고 비방하기도 했던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가진 저녁식사 때도 포도주를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 친히 마셨고, 또 술을 결코 죄악시 하지 않으셨거늘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마시면서 찜찜해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술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이 근래에 관대해진 것은 사실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지만 기독교의 많은 성직자들 도 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 주독에 걸려 폐인이 되거나 건강을 무너뜨리고 타락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인 작용을 하지만 반대로 적당량의 술을 마시면 오히려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어진 까닭일 것이다. 어떤 것이던 양면성(兩面性)이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영양가 높은 좋은 음식이라도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건강을 해치고 병을 불러오게 되는 것과 같다.
내 아버지께서는 고혈압이어서 술을 일체 안 마셨음에도 어이없게 결국 57세에 생을 마감하셨다.

경험상 누구나 인정할 것이지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기분 좋게 술을 마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차 한 잔을 앞에 놓고도 정다운 얘기를 얼마든지 나눌 수 있거늘 어찌 그것이 어렵다고만 핑계를 대는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매 중 하나가 ‘절제’이지 않은가.
낭만이란 그럴듯한 이유로 몸을 상하게 하거나 탈선을 하는 어리석은 일은 어떤 이유로도 안 될 말이다. 나는 술의 속마음을 잘 알기에 술을 마실 때에는 꼭 맥주나 과실주만을 마시기로 작정하고 그를 실행해 온지가 이미 십 수 년이 지났다. ‘말하기 좋을 만하게’ 마시는 게 나의 한도(限度)다.
처음엔 쓰기만 하던 맥주가 입맛에 익으니까 쓴 나물처럼 지금은 마시기 좋아졌고 갈증이 날 때는 시원한 한 잔의 맥주가 특효약이다. 저혈압을 높여 주거나 혈행(血行)을 좋게 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전에는 맥주에 '마주 앙' 이라는 백포도주를 섞어 즐겨 마셨었다. 그러면 어느 애주하시는 선배의 말처럼 흑백텔레비전이 컬러텔레비전으로 보일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아서 좋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맥주만 마시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어느 사이 맥주는 나의 전용 술이 되어 버렸다. 반가운 손님을 만나 얘기를 하거나 즐거운 식탁에서는 말 할 것도 없고 자식들과도 한두 잔의 술을 주고받으며 기분 좋게 담소를 나누곤 한다. 앞으로도 전과 다름없이 계속 맥주나 과실주만을 애용할 것이다.

구태여 술에 관해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은 그리스도인일수록 세상 사람과
는 다른 종족인 체 할 것이 아니라 누룩처럼 비 그리스도인들과 섞여 어울려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이다.
(200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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