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울리는 글쓰기 / 김종회 #2

2011.03.26 09:29

강학희 조회 수:469 추천:9

글로벌 시대, 한민족 문화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 한국문학의 정체성과 방향성, 그 과제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이 눈부시도록 급속하게 변화하는 새로운 세기의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분명 그 변화와 속도감을 창안한 중심 세력이 있을 터이나, 대다수의 우리는 그저 그것을 바라보며 그로부터 파생되는 생각의 끝자락이나 매만지고 있을 만큼 무기력할 뿐이다.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세계를 일일생활권으로 하는 국제화 시대에 들어섰다. 이와 같은 때에 한 국가의 고유한 언어나 문학이 과거와 같은 독립적 영역을 지키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한 민족언어 내부의 고유한 미덕, 독창적 면모, 자발적 감응력 등속이 이 발빠른 변화에 밀려 훼파되기 쉽지 않겠는가?

그런데 한국문학의 영역문제와 관련하여 이처럼 글로벌 시대로 변화하는 측면이 긍정적 추동력을 유발한 대목이 있다. 문화 또는 문학적 영역의 불필요한 경계를 소거하고, 유연하고 포괄적인 의미의 연대를 생산하며, 그 영역의 차별성이 오히려 상생의 기력으로 작용하는 그런 경우 말이다. 이른바 ‘재외 한국문학’이란 문화집단의 개념이 그것이다. 이는 우리의 대응 방략에 따라서 민족언어의 영역 확장, 그리고 만만찮은 실과의 추수를 기대할 수 있는 텃밭의 확장에 이를 수도 있다. 그것은 또한, 그동안 한국문학이 이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의 노력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반성적 성찰과도 그 의미가 소통된다.
재외 한국문학에 관해서는 먼저 그 개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재외(在外)’라는 어휘가 표방하는 바와 같이, 문학의 창작이 이루어지는 강역(彊域)에 대한 규정이 요구된다. 외교통상부에서 발간하는   󰡔외교백서󰡕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재외 한국인의 숫자는 대략 530만 명에 이른다. 그 중 일본 ․ 중국 등 아주지역에 270만, 미국 ․ 캐나다 등 북미지역에 180만, 브라질 등 중남미지역에 10만, 독일 등 유럽지역에 2만 5천 등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모두 화려한 외형이나 순탄한 길을 따라 이주한 사례가 거의 없다. 격동의 근 ․ 현대사를 거치면서, A.랭보의 표현처럼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모국을 떠났던 것이다. 재외 한국문학이란 결국 이들이 자리잡고 있는 그 삶의 터전에서 솟아 오른 문학적 산출이다. 재일 조선인, 재중국 조선족,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그리고 미주지역의 한인 문인들은 그 작품에 있어서 그래도 어느 정도의 질적 수준과 양적 부피를 확보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문학 자체가 일정한 논의를 형성할 수 있는 형편이다.

둘째, 문학의 창작자가 누구냐 하는, 창작 주체의 문제이다. 재외 한국문학이란 나라 밖에 있는 한국인, 곧 재외 동포가 쓴 문학을 말한다. 이 때의 한국인이란 정치적 또는 법적인 지위를 말하지 않는다. 재외의 어느 문인이 살아가는 형편에 따라 살고 있는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고 모국의 국적을 버렸을지라도, 문화적 의식적 차원에 있어서 한국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가 쓴 문학을 재외 한국문학이라 부르지 못할 바 없다. 이는 범박하게 말하여 세계 각처의 한민족 문화권을 창작 주체를 중심으로 하나로 묶는 발상과 관련된다.

셋째, 한국문학이라 이름할 수 있도록 하자면 그 창작에 소용된 언어가 무엇이냐, 모국어로 창작된 작품에 국한할 것이냐, 아니면 모국어가 아니더라도 한국문학의 일반적인 주제와 정서 및 분위기 등을 끌어안고 있는 작품을 포함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보는 시각에 따라 서로 상반되는 견해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김은국의 󰡔순교자󰡕나 김석범의 󰡔화산도󰡕를 한국문학에 편입시킬 것이냐, 아니면 미국문학이나 일본문학으로서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볼 것이냐 하는 논란이 된다. 언어의 국적에 무게중심을 두는 사람은 영어 또는 일본어로 씌어진 작품을 한국문학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작품이 무엇을 중심 주제로 하느냐에 주목하는 사람은 그 태도가 이와 다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순교자󰡕 나 󰡔화산도󰡕가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한국문학이 된다고 할 것이냐?’

우리가 한국문학의 영역 개념을 지나치게 경직시키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는 조금 부드러운 인식 방식에 동의한다면, 비록 창작의 강역이나 창작 주체, 사용된 언어 등에 결손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재외 한국문학을 우리 문학의 한 특수한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데 우리가 너무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확대 수용하고 과감하게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전세계적인 한민족 문화권을 형성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 모든 영역의 재외 한국문학을 한민족 문화권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전반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통하여 민족언어의 터전을 넓히는 한편 이 지구촌 시대, 국제화 시대에 대응하는 한국문학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더 덧붙여 언급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가 있다. 이 한민족 문화권의 논리와 그 의미망 가운데로, 해방 이래 한국문학과 궤(軌)를 달리해 올 수밖에 없었던 북한문학을 초치하는 일이다.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니와 더욱이 문학에 있어서, 북한문학에 남북한 대결구도의 인식으로 접근해서는 남북한 문학의 접점을 마련하거나 남북한 문화 통합의 전망을 마련하거나 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구체적 경험을 통해 이를 보아 왔다. 그렇다면 어떤 방안이 있느냐는 반문이 당장 뒤따를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지금껏 우리가 논의한 한민족 문화권의 개념을 제시할 수 있을 터이다.

이는 남북한 문학을 포함하여 재미 한인문학, 재일 조선인문학, 재중국 조선족문학, 중앙아시아 고려인문학 등 재외 한국문학의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남북한 문학의 지위를 자리매김해 나가는 한편 극동과 제3세계로 확산되는 동아시아론의 범박한 논리를 차입하여 남북 상호간의 대결구도를 희석시키자는 논리이다. 그리하여 남북한 양자의 문학이 무리없이 만나 악수하게 하고 그것의 대외적 확산을 도모하며 통일 이후의 시대에 개화(開化)할 새로운 민족문학의 장래를 예비하는, 다목적적 기능에 유의하고 이를 실천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한민족 문화권이라는 부피가 큰 이름 또는 개념과 관련된 이 절실한 요청은, 오늘날과 같이 인간의 의식이 다원화되고 파편화되며 민족문화의 진로와 그 성취의 목표가 불투명해진 시대에 있어, 우리가 문학의 이름으로 내거는 하나의 작은 등불이라 할 것이다. 문학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풍요하고 보람있게 해야 한다는, 그 소박하면서도 귀한 소망을 위해서 말이다.


Ⅳ. 삶의 아름다움


황혼과 저녁별
시간이 없어요
선한 사마리아인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용서하는 자의 영광


황혼과 저녁별



스코트는 오랫동안 스스로 의도하고 목적이 있는 죽음에 대해 얘기해왔다. 그는 자신이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려고 했다. 요양소에서 두려움에 떨며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왜 우리의 마지막 날과 죽음을 그렇게 소란스럽게 만들어야 할까?”하는 의문을 가졌다. 쾌적하고 낯익은 환경 속에서 조용하고 조화롭게 사라지는 대신에, 우리는 비싼 돈을 들여 우리가 사랑해온 이들을 병원이나 요양소로 보내어, 그 과정을 편안하게 돕기보다는 자연스럽지 못한 수단으로 막으려는 낯선 사람들에게 맡긴다. 우리는 불편함 속에서 울음으로 인생을 시작하지만, 떠날 때는 적어도 어느 만큼 우리의 목표를 이룬 가운데 위엄과 완전함을 지닌 채 갈 수 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가 지향해서 일해 온 우리 삶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허친슨이 1925년에 쓴 소설 『커가는 목표』에서 묘사한 주인공처럼 스코트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안이 잘 정돈된 문가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이하는 남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스코트는 자기 힘이 아주 사라지기 전에 가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가기를 원했고, 의식을 갖고 또 의도한 대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 과정에 협조하면서 죽음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는 죽음의 경험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기꺼이 그리고 편안하게 몸을 버리는 기술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기대했다. 그동안 어떻게 사는지 배워왔는데 이제 어떻게 죽는지 배우고자 했다. 노자는 “생명이 열매를 맺고, 떨어지게 하라”고 말했다. 스코트의 삶은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되었으니, 이제 가도록 놓아둘 준비가 되었다.

다일런 토마스는 “이렇게 좋은 밤에 점잔을 떨 수는 없잖은가”하고 노래했지만, 스코트는 자신의 죽음이 점잖고 목적이 있으며 아울러 평온하게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는 궁극적인 경험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몽롱하거나 의식이 없는 채로 가는 대신 죽음을 음미하고 심지어 즐기고자 했다. 그이는 특히 소로와 웰즈와 같은 평온한 최후를 좋아했다.

1862년 소로의 누이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오빠가 오랫동안 앓고 있을 때도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불평이나 우리와 같이 남아 있으려고 하는 소망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빠의 완벽한 만족감은 참으로 훌륭했으며, 생기와 기쁨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윽고 숨이 점점 약해지고, 아무런 저항없이 오빠는 우리를 떠나갔습니다.”
기자가 웰즈의 마지막 날 즈음에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웰즈는 지나치리만큼 기자를 소홀히 대접했다.    “나를 방해하지 마시오. 내가 지금 죽는다고 바쁜 걸 보지 못하시오?” 하는 말이 기자가 들은 말 전부였다. 이 두 이야기는 스코트를 즐겁게 했으며, 의심할 바 없이 그 자신이 떠나는 데 좋은 모범이 되었다.

죽음을 맞닥뜨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방법들이 있는가? 죽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다. 죽음이 실제로 어떨지는 우리 자신이 갈 때까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뒤틀린 떠남 또는 꽝 닫힌 문처럼 만들 수도 있고 또는 조화로운 정점, 절정으로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태도, 어떤 행동으로 죽음을 맞는가 하는 열쇠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바람직하기로는 열린 눈과 감각을 가지고 떠나며, 옮겨감을 환영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준비하면 우리는 분별 있고 평온한 마음으로 뜰을 걸어 내려가, 문을 열고 그 길의 모든 과정을 눈여겨보면서 갈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훨씬 더 위험하고 혼돈스러운 과정인 탄생의 과정을 겪었으며 그것을 넘어 살아왔다. 이제 우리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보아야 할 때다.

스코트가 여든이 되기 전에 그 사람을 ‘노인이라 부르는 것을 듣고 나는 화가 났다. 아흔이 넘어서는 받아들이긴 했지만, 스코트는 90대 중반까지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이 힘이 조금 줄어드는 기색을 보였을 뿐이었다. 뛰어난 건강을 지닌 그도 노년기를 피할 수 없었다. 그의 타고난 체질, 환경, 식사법, 습관, 감정, 삶의 방식,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의 건강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주었다.
(…)
아흔 여섯이 지나자 스코트는 몽테뉴를 인용하면서 말했다. “나는 죽어서도 양배추를 심고 싶소.” 그는 전 같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정원 일과 장작더미 쌓는 일을 했다. 여전히 “날마다 집안 일을 하고 밖에서 나무를 가져오리라”고 읊조렸지만, 통나무를 여섯 개 대신 세 개, 마침내 미안해하면서 한 번에 한 두 개를 가져온 데서 보듯, 그가 이제 더 이상 일을 할 힘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
스코트의 기력이 떨어짐에 따라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내가 그 대신 약속을 이행하고 그는 조용히 집에 머물렀다. 그가 손으로 쓴 마지막 편지 하나가 보스턴 교회 앞으로 보내졌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일 년쯤 전부터 나는 꽤 빠르게 늙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건강이 괜찮다고 느끼지만 다음 날은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상태가 이렇기 때문에 특정한 날짜에 강연하러 나갈 수가 없습니다. 참 유감입니다! 하지만 그게 인생이지요. 올해에 이르기까지 나는 꽤 건강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바로 앞의 미래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여건으로 나는 공식적인 강연 약속을 할 수가 없군요. 좋은 계절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 관계에서 새로운 단계였으며, 나로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위급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내가 멀리 나갈 때면 친구들더러 그를 눈여겨보도록 주선해놓았다. 여기 나날이 하는 일과 그의 상태를 나타내는 지침으로 남겨놓은 일정표가 있다.

부엌 불을 지핀다.
거실에 불을 넣는다.
가능한 오래 스코트가 자도록 둔다.
그가 깰 때까지 부엌 또는 거실에 앉아 있는다.
겉옷이나 스웨터 입는 것을 돕는다.
그의 침상에 담요를 펴고 낮동안 그대로 둔다.
난로에서 물이 끓으면 차를 만들고, 주스 한 잔과 바나나를 준다.
팝콘을 조금 원하지 않으면 이것이 그가 점심까지 먹는 것 모두이다.
그는 나무를 구하러 가고 날이 좋으면 아침 내내 밖에서 일할 것이다.
점심으로는 스프와 사과 또는 바나나, 땅콩 버터와 꿀을 곁들여 약간의 밀이나 죽을 정오에 먹는다.
그는 점심 전후에 침상에서 낮잠을 자야한다.
1시 반쯤 우편물이 오면 읽어본 뒤에 아래층 그의 방에 있는 커다란 빈 상자에 넣는다.
날씨가 좋으면 오후 시간에 밖에 나와 있으려고 할 것이다.
4시에 부엌 불을 지핀다.
감자, 사탕무, 순무 또는 당근을 볶는다.
5시 30분에 내가 샐러드를 만들고, 보통 6시에 함께 식사를 한다.
그는 8시 30분쯤 자러 간다. 이제 앉아서 책을 읽어도 좋다!

메인으로 이사 온 1, 2년 뒤부터 우리는 장의사에 돈을 주고서 미리 우리 자신의 화장에 대비했다. 지금 내가 할 수 모든 것은 스코트가 ‘주위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내게 남긴 지침을 따르는 것인데, 이 지침은 1963년에 처음 쓰고 1968년에 그의 이름 머리글자를 써넣었으며 1982년에 다시 그렇게 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요망사항을 기록해두기 위해 쓴다.

1. 마지막 죽을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2.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3. 나는 되도록 빠르게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
- 주사, 심장 충격, 강제 급식, 산소 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할 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열심히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4. 장례 절차와 부수적인 일들.
-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 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내 몸을 처리하는 데 관여해서는 안 된다.
-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스프루스 나무나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 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 사이에 언제, 어떤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 밖에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스피릿 만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나는 죽음에 관해 말한 30개쯤 되는 인용구를 담은 쪽지를 만들어, 그가 죽는 마지막 날의 부고용으로 친구들에게 보낼 준비를 했다. 그 쪽지는 그가 가기 전 해에 보여주고 허락을 받았다. (헬렌 니어링)

시간이 없어요



  너무 바빠서 정말로 너무 바빠서 무릎 꿇어 기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세금 고지서의 마감 날짜에 맞추느라 바삐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설교만 듣고 서둘러 일어나야 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는 다했다 싶어 그래도 마음만은 편했답니다.
  하루가 다가도록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 시간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 할 시간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비웃을까봐 겁이 나기도 했었구요.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어요.”
  이것이 항상 나의 외침이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에게 베풀 시간은 더 더욱 없었습니다.
  드디어 생명이 다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불리어 갔을 때 나는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생명록을 펼치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름은 여기 없구나. 한때 너의 이름을 기입하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없었단다.”

이 시의 지은이는 확인되지 않았다. 어느 기독교인 교수 부부가 필리핀을 여행하면서 소책자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이 시 한편을 얻음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제하더라도 그 여행이 의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정말로 바쁜 일정에 쫓기며 “시간이 없어요”를 연발하며 살아간다. 기도할 시간이 없고 예배도 겨우 참석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일 여유를 확보하기 어렵다.
하루하루 쌓이는 이 바쁜 일상 생활은, 그러나 나중에 영혼이 심판받는 날에 이르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에 이른다. 하나님의 생명록에 자기 이름의 자리가 비어 있는 사태, 드려야할 시간을 드리지 못한 그 결과를 당면할 수밖에 없이 되는 것이다.

그 때 혹시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면, 이렇게 바쁘게 서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데 어떡하란 말인가요? 어렵게 꾸려가는 생업과 세상의 모든 인간 관계를 포기하란 말인가요?”
포기? 그렇다! 이 세상의 삶과 하나님께의 충성 가운데서 둘 다 감당할 수가 없다면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기에 신앙은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이리라. 그것은 또한 물밀듯이 밀려와 우리의 시간을 압박하는 숱하게 많은 일들 가운데, 어디에다 우선 순위를 둘 것인가를 결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물질로써 뿐만이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도 온전히 드리는 성숙함으로, 나중에 하나님 앞에 불리어 갔을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는 기독교인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아! 네 이름이 여기에 있구나. 네 이름을 기입할 무렵에 내가 참으로 바빴지만 네가 바쁜 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수고하는 것을 보고 나도 시간을 내었단다.”


선한 사마리아인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우리 작은 아이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 가끔 걸려오는 전화가 있었다. “성룡이 있어요?”하는 조금 어눌하고 머뭇거리는 듯한 목소리. 나는 금방 같은 반에 있는, 몸과 다리가 매우 불편한 친구인 줄 안다. “그래, 바꿔줄께. 조금만 기다려라아.” 한껏 친절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얼른 아이에게 수화기를 넘겨 준다.

아이에게 들은 얘기이다. 반의 다른 아이들이 그렇게 그 불편한 친구를 집적거리고 때리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네가 나서서 그러면 안된다고 좀 말리지 그랬니?”하고 물었더니, 너무 그 친구를 감싸고 돌면 반에서 ‘따’를 당하기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친구를 돕는 일은 고사하고 돕는 다른 친구에게조차 압박을 가하는 현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값없는 형편에 이르렀는지를 웅변으로 증명한다. 나는 아이에게 “비록 ‘따’를 당하더라도 그 친구를 도와야하지 않겠니?”하고 일렀지만, 참담하고 씁쓸한 마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에는, 한 뇌성마비 여학생이 있었고 4년간 이 학생을 도와 가방을 들어주고 계단 오르내리는 것을 보살펴 준 남학생이 있었다. 4학년 2학기에 이르러서야 학과에서는, 이 남학생에게 겨우 한 학기 ‘모범장학금’을 주는 것으로 소략하고 때늦은 격려를 했다. 물론 이 학생이 보답을 바라고 그 여학생을 도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남학생은 신앙이 깊은 기독교인이다. 그의 가슴 속에 있는 신앙이 그로 하여금 이름없는 사마리아인처럼 오랜 선행을 계속하게 했을 터이다. 이 경우 장애인에 대한 사랑은 곧 사람에 대한 사랑이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장 순수하게 사랑하는 경우는 그 사랑이 예수의 이름에 의거해 있을 때이다. 다시 말해, 우리 속에 있는 예수의 사랑이 다른 사람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사랑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장애인 문학의 대표적인 사례로 존 밀턴의 『실락원』을 꼽는다. 밀턴은 영국 청교도혁명 당시 크롬웰의 비서였으며 나중의 왕정복고 후에는 정치적 자유를 상실했고, 아내를 잃었으며, 급기야는 두 눈마저 잃어버린 비극의 주인공이다. 밀턴은 이 가혹한 환경적 조건에 굴하지 않았다. 여섯 살 난 딸 데보라의 손을 빌어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의 삶을 구술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열두 권에 달하는 종교적 문학의 걸작을 남겼고 스스로는 영국 르네상스 시대 최후의 거인이라는 호명을 거두어 들였다.

예거하기로 하자면 역시 눈을 잃은 호메로스, 귀를 잃은 베토벤, 다리가 불편했던 바이런, 간질병에 시달렸던 도스토예프스키, 궁형을 받아 불구가 되었던 사마천 등등, 인류의 예술사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애인 예술가들과 그들이 남긴 걸작들이 있다. 이들의 작품이 가진 예술성의 배면에는 참으로 어려운 삶의 조건을 뜨거운 예술혼으로 극복한 이들의 의지와 그 인간승리가 숨어 있어, 우리를 갑절로 감동케 한다. 그러할 때 그들은 이미 장애인이 아니다. 사소한 외형적 불편의 모습을 넘어서는 정신적 승급(昇級), 그로 말미암은 찬연한 광휘(光輝)가 우리를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나는 KBS 라디오의 ‘내일은 푸른 하늘’이란 프로에 고정 출연을 한 적이 있다. 장애인 문학에 대해 그 의의와 가치 등을 말하는 코너였는데, 이 프로와 관련이 된 것은 한국장애인문인협회의 방귀희 회장 때문이었다. 이 분은 휠체어에 의지하고서도 다른 분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처지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얼굴에 구김살 하나 없다. 뿐만 아니다. 그 자신의 장애를 정신적으로 극복한 것은 물론, 다른 장애인들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쾌척하는 삶의 태도를 갖고 있다. 그를 보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이 겉모습만 멀쩡한 내면적 장애인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나는 그렇지 않을까? 내 속에 약한 자의 자리에서 약한 자의 이름으로 정말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는 선한 정신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런데 이 선한 정신이란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나중’에는 없는 것일 시 분명하다.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1992년에 타계한 이병주라는 작가는, 당대의 한국문학에 보기드문 면모를 남긴 인물이었다. 1921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하여 일본 메이지 대학 문예과와 와세다 대학 불문과에서 수학했으며, 진주농대와 해인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국제신보 주필 및 편집국장을 지냈다.

필자는 그의 데뷔작을 비롯한 초기 단편들을 통하여 이국적 정서의 수용과 수미상관한 마무리 기법을 보았고, 시대적인 사실을 소재로 한 장편 및 대하소설에서 역사를 보는 문학의 시각과 문학 속에 변용된 역사의 의미를 걷어 올릴 수 있었다. 특히 역사와 문학의 상관성에 대한 그의 통찰은 남다른 데가 있어, 역사의 그물로 포획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문학이 표현한다는 확고한 시각을 정립해 놓았다. 어느 날 그를 만난 필자가 ‘역사적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선문답류의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서슴없이 ‘역사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표면상의 기록으로 나타난 사실과 통계수치로서는, 파란만장한 시대적 삶의 실상과 그 가운데 스며 있는 사람들의 뼈아픈 사연들을 반영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관부연락선󰡕, 󰡔산하󰡕, 󰡔지리산󰡕 등 그가 남긴 유수의 작품들에도 불구하고, 당대 문단에서 그의 세계를 정석적인 작가론으로 평가해 주지 않는데는 또 그 나름의 사유가 있었다. 현대 사회의 애정문제를 소설로 쓰면서 지나치게 대중적 성격이 강화되고, 심지어는 글쓰기의 다발성에 대한 경각심에 소홀하여 그에 대한 비난을 받기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의 소설을 거의 빠짐없이 읽어온 문학평론가로서 필자도, 꽤 오랫동안 그에 관한 본격적인 글을 쓰지 않았다.

한 세대를 격한 연령의 차이로 인해 별다른 교분은 없었지만, 매스컴을 통해 그의 부음을 접했을 때의 느낌은 매우 처연한 것이었다. 마치 가까운 친지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처럼 가슴 한 구석이 쓰라려 왔으니, 필자는 정신적인 차원에 있어 그의 의식세계와 적잖이 지근한 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그를 보내고 나서 돌이켜 보았을 때, 지울 길 없는 두가닥의 아쉬움이 새삼스레 되살아났다. 먼저는 그의 문필과 더불어 더욱 유장한 경계를 열 수도 있었던 우리 문학의 전망에 관해서였다. 극적인 재미와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의 구성, 등장인물의 생동력과 장쾌한 스케일은 그에게 부여된 ‘한국의 발자크’라는 별호가 결코 허명이 아님을 증거해 주었다. 다만 정규적인 문학수업이나 훈련없이 자력으로 체득한 문학의 생리가, 그에게서 순수문학에의 지구력 및 자기 절제를 쉽사리 허물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그의 소설 처처에서 드러나는 사상성이 더욱 웅숭깊은 곳까지 심화되지 못한 사정에 관해서였다. 만약 그에게 종교적 체험의 축적과 신성을 향한 정돈된 열정이 내재해 있었다면 어떨까? 서구문학에 있어서 불후의 고전으로 인정되고 있는 밀턴의 󰡔실락원󰡕이나 톨스토이의 󰡔부활󰡕이 그 바탕에 강렬한 기독교적 메시지를 포괄하고 있음을 환기해 보면 어떨까?

물론 이병주는 이 결정론적 논법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심오한 사상이란, 인간의 유한한 사유에서가 아니라 절대자의 은혜로운 선물로 주어져야 가능한 것이다. 이는 선포되는 것이지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이 쉽고도 어려운 이치를 깨우친 작가의 겸손이야말로, 진실로 한 작가를 거장으로 성장케 하는 추동력이 되지 않을까? 이병주를 회고하는 씁쓸한 심사의 뒤끝에서 필자가 얻었던 작은 결론이다. 바로 그 이병주가 자신의 감옥 체험을 소설로 쓴 작품이 여럿 있지만, 그 가운데 단행본 두권 분량으로 된 장편소설로 󰡔풍설󰡕이란 것이 있다. 이 소설 속에서 그는 미국의 단편소설 「발자욱 소리」에 대해 매우 주의깊게 언급하고 있다. 「발자욱 소리」는 진실이 진실로서의 의의와 보람을 갖기 위해서 깊고도 기막힌 고통을 동반한다는 하나의 예를 제시한 작품이다.

지폐를 쓰지 않고 금화를 쓸 무렵이었으니까 1세기 정도 전쯤의 얘기일까? 장소는 미국의 동부 해안에 있는 조그마한 항구. 부두에서 직선으로 5백미터 들어간 길에 장님 노인이 운영하는 구두방이 있었다. 구두방 가게는 길에 면해 있고 살림집은 가게 뒷쪽에 있는 2층 건물이었다. 아래층엔 노인과 스무살 되는 아들이 살고 윗층엔 그 지방 유일한 은행의 은행원인 청년이 세들어 살았다. 노인은 장님이면서도 구두를 만들고 고치는 기술이 월등했을 뿐 아니라 쾌활하고 말솜씨가 좋았기 떄문에, 가게는 언제나 근처의 청년들이 놀러와서 유쾌한 사교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의 한가지 결점은 자기 아들을 너무 방임하는 것이었다. 아들은 스무살이나 되었으면서도 할일없이 놀기만 하고 아버지에게서 돈을 얻어 썼다. 사람들은 노인에게 아들을 비난하여 지금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충고하곤 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럴 때마다 아들이 어려서 어미를 잃고 불쌍하게 자라서 그렇다며, 지금 놀고는 있어도 마음씨는 착하다고 변명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노인의 아들이 은행원을 때려 죽이고 윗층 셋집에 불을 지른 다음, 그 은행원이 은행에서 가져다 둔 금화 자루를 훔쳐서 달아났다. 시체의 얼굴과 몸은 형체를 남기지 않을 정도로 타버렸고 다만 타다남은 옷을 보고 은행원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노인의 가게는 폐허가 되었다.

아들에 대한 비난이 노인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어, 노인은 주위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었다. 노인은 가게에서 기거하며 망치로 가죽끈을 다리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면서 노인을 늘 가게 밖의 발자욱 소리를 듣고 있었다. 노인이 그렇게 사는 세월이 10년을 넘겼다. 낮이면 망치를 휘둘러 가죽을 다듬고 밤이면 가게 안에 불을 휘황하게 켜놓고 홀로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가끔 혼잣말을 할 때도 있었다.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그런데 어느날 밤 노인의 귀가 번쩍했다. 어떤 발자욱 소리가 들리더니 차츰 가까와오는 것이었다. 노인은 벌써부터 출입문에다 닫히면 열리지 않는 장치를 해 두었었다. “영감님 안녕하시오?” 발자욱 소리는 문을 밀고 물었다. “거 뉘시오? 가까이로 오시오.” 노인은 무관심한 척 말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기척이 있자 노인을 문을 잠그고 불부터 껐다. 들어온 자는 급히 도망하려 했으나 문이 열리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10년동안 망치를 휘두르며 반력을 강화해 놓은 노인의 힘에 당적할 수 없었다. 노인을 발자욱 소리의 사내를 쓰러뜨리고 그를 밟고 서서 사람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언제나 밤새 불이 휘황하게 밝혀져 있던 가게에 불이 꺼져 있자, 사람들은 혹시 노인이 죽은 것이나 아닐까 하고 들여다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오?” 이웃 사람들이 물었다. 노인은 말했다. “여러분, 불을 켜 주시오. 지금 내가 밟고 서 있는 놈의 얼굴을 봐 주시오. 이 놈이 내 아들을 죽인 놈이오.” 노인은 10년 전 죽은 사람이 아들인줄 알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죄지은 자는 반드시 범죄의 현장으로 와 본다는 말을 믿고 10년을 참으로 준비하며 기다렸던 노인의 그 집념, 그 슬픈 집념이 있고서야 진실은 진실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었던 터이다. 노인은 덧붙여 말했다. “내 아들은 철이 들지 않았지만 나쁜 놈은 아니었소.” 

세상을 사는 데, 진실이 진실로 소통되지 않는 경우가 어쩌면 이렇게 많을까? 노인은 죄인이 아니었으나 아들의 죄를 둘러쓰고 쉽사리 죄인이 되었던 것인데, 어느덧 사람들은 그것을 노인의 죄로 알고 있었다. 누가 있어 그 노인의 것과 같은 아픔과 슬픔을 알겠는가? 참으며 준비하며 기다릴 세월이 얼마인지 모든 것을 아시는 신은 아신다. 그것을 믿고 우리 삶의 고통스러운 그 현장에서 우리가 깨닫고 승리하고 일어설 때까지 끝까지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작가 이병주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하나의 거울로 삼고, 소설 「발자욱 소리」의 참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이야기를 또 하나의 거울로 삼으며, 이 두서없는 글을 정리하는 동안 다시금 내 삶과 문학에 대해 그리고 그 지금과 나중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용서하는 자의 영광
 
 

동양문화권, 특히 한문문화권에서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저술 가운데에는 중국의 4대 기서(奇書)를 빼어놓을 수 없다. 이른바 󰡔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가 그 제목들인데 이 중 󰡔삼국지연의󰡕에는 3천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위 ․ 오 ․ 촉 등 3국시대의 파란만장한 사회상과 처세 철학을 수놓고 있다. 여기서 더 범위가 확장된 중국 역사를 살펴보려면 󰡔열국지󰡕를 읽어야 한다. 거기에는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와 걸출한 인품의 주인공들이 처처에 모래밭의 사금처럼 널려 있다.
󰡔열국지󰡕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춘추5패의 한 사람인 초나라 장왕의 이야기이다. 어느날 장왕이 신하들을 데리고 밤중에 촛불을 휘황하게 밝힌 다음 연회를 베풀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 느닷없이 일진광풍이 불어 불을 모두 꺼버렸다. 온 주석(酒席)이 어둠에 잠겼다. 그러자 신하 한 사람이 술기운으로 장왕이 총애하는 애첩의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그 신하의 갓끈을 뜯어쥐고는 어서 불을 밝혀 갓끈의 임자를 찾으라고, 장왕에서 자신의 정절을 자랑했다. 장왕은 불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에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스스로 갓끈을 뜯어버리게 했다. 취중의 사소한 실수로 치부하고, 색출할 수도 있는 범인을 즉석에서 사면한 셈이다.

많은 나날이 지난 다음 장왕이 전쟁터에서 적군에게 포위되어 죽을 고비에 이르렀다. 한 사람의 장수가 목숨을 내던져 장왕을 구출하고는 부상으로 숨지게 되었다. 장왕이 물었다.“그대는 어찌하여 그대의 생명으로 나를 구했는가?”
“왕이시여, 제가 바로 옛날의 연회 때에 갓끈을 빼앗겼던 자입니다. 그 은혜를 이제야 갚습니다.”그리고 그는 죽었다. 남을 용납할 만한 도량을 금도(襟度)라 부르는데, 역사는 장왕의 금도를 실증한 그날의 연회를, 끊을 ‘절’, 갓끈 ‘영’자를 써서 절영연회(絶纓宴會)라 기록하고 있다. 장왕과 같이 비범한 수준에 이르기 어렵다 하더라도, 이 일화는 범상한 우리의 일상에서 잘못을 범한 상대방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웅변으로 증거해 준다.

우리는 얼마만큼 남을 용서하는 일에 훈련되어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큰 잘못은 쉽게 용서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에 석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보면,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성경의 비유가 뼈아픈 채찍이 아닐 수 없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무리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한 스데반의 서원이나,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예수의 가르침이,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되기가 난감하도록 너무도 사악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참으로 악하고 패덕한 무리들이 부귀와 권세를 누리고 선하고 신심 깊은 사람들이 고난과 핍박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필자는 신의 공의로움이 살아 있다면, 왜 이처럼 불합리한 상황을 무사불능한 능력의 손으로 조정하지 않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이 오랜 의문이 욥의 시련을 읽으면서 해명되는 느낌이었다. 악한 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신의 인내, 선한 이들을 연단하여 더 큰 일꾼으로 양육하기 위한 신의 예비가 여기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용서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계획에 있다고 믿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닐까? 우리가 진정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기를 소망한다면, 이를 깨우쳐서 우리 안에 화평과 용서의 새로운 품성이 생성되도록 애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 곧 참된 용서가 우리에게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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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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