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절대고독 / 김현승

2011.05.14 08:21

강학희 조회 수:443 추천:7

절대고독(絶對孤獨)

  

김현승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하품을 하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 끝에서

아름다운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무엇인가 내게로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그 체온으로 내게서 끝나는 영원의 먼 끝을

나는 혼자서 내 가슴에 품어준다.

나는 내 눈으로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본다.

  

그 끝에서 나는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꿈으로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낸다.

  

나는 내게서 끝나는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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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그 누군가를 향한 존재의 모험

  

                                                                                         임 동확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자들은 결코 타인을 찾지 않는다.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해 확신하는 자들이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거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한계 또는 인간으로서 유한성을 절감하는,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을 수 없는 자들이 타인과의 사랑을 갈구하고, 타인의 숨결을 그리워한다. 자신만의 긍지를 갖지 못하거나 이 세계의 무의미를 홀로 견뎌낼 자신감을 잃은 자들이 비로소 누군가를 향해 눈길을 돌리거나 자신을 향해 돌아선다. 모든 시들은 그 가운데서 타인을 매우 절실하고 간절하게 부르는 손나팔이며, 시인은 필시 그 속에서 모든 이들의 그리움과 슬픔을 대신해 우는 ‘곡비’(哭婢) 또는 때로 도리를 어겨가면서까지 타인을 옹호하는 ‘곡비’(曲庇)이다. 언제부턴가 역사의 주변부 또는 밑바닥에 살도록 운명 지어진 시인들은, 제 자신과 고향으로부터 추방당한 자들과 함께 하며 존재 해방을 추구하는 혁명가이자 사랑의 완성을 꿈꾸는 고독한 수도자이다.

집요하게 ‘고독의 시인’의 길을 걸었던 김현승의 고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 목이 길어 회의(懷疑)에 기울기 좋고,/혈액은 철분이 셋에 눈물이기”에 “포효(咆哮)보담 술을 마시는 나이팅게일”(「자화상」)이라고 스스로를 평한 청교도적 시인 김현승은, 그의 시「고독」「견고한 고독」 「고독의 끝」「절대고독」 등을 통해 우리들 모두가 근본적으로 뿌리 뽑힌 자들이며, 어디에선가 떨어져 나온 자들이라는 것을 넌지시 일러준다. 또한 그것들은 타고난 본성과 본래의 천진함을 잃어버린 이들이 어쩔 수 없이 겪는 소외감 내지 외로움과 맞물려 있다. 제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에게 동화시킬 수 없는 영원한 타자, 차라리 없음이라고 해야 할 그 누군가나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데서 느끼는 오는 감정의 하나가 바로 고독이다.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 분열과 찢김 사이에서 그의 고독 시편들은 극단의 허무나 절망에 맞닿을 지라도, 그러나 원칙적으로 가장 단단한 삶에 대한 열망과 불굴의 의지를 숨기고 있다. 그 어떤 종류의 방해나 저지도 제지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단호한 비타협과 비순응의 인간적 투지가 그의 고독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런 만큼 김현승의 고독은 단순히 타인과의 소통부재나 신의 존재 같은 무한성 앞에서 느끼는 절망감에서 오는 고립감이나 소외감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김현승 역시 “신은 무한히 넘치어/내 작은 눈에 들일 수 없”으나 “나는 너무 잘아서/신의 눈에는 끝내 보이지 않았”을 거라고 말함으로써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와 비교되는 인간의 왜소함 내지 유한성을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곧바로 “바람”마저도 “따르지 않는/곳으로 떠나면서” “할 일”이 다름 아닌 “영혼의 옷마저 벗어버”(「고독의 끝」)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고독은 인간과 세계로부터의 수동적이고 자폐적인 단절감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오히려 그것은 진정으로 고독해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과 마치 처음처럼 대면하고자 스스로 세상에서 물러서는 수동적 능동성을 내포한 고독에 해당한다. 자동차 소음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을 신의 소리로 듣는 소음의 세계와의 자발적 격리 또는 후퇴와 맞물려 있다. 그야말로 혼자만의 길, 혼자만의 세계를 갖기 위한 쓸쓸하고 절망적인 고독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과 친교하며 말을 걸 수 있는 고독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진리와 정의를 독점하기 위한 간계와 책략을 위한 배타적이고 독불장군식의 고독의 길에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또는 “이승이나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견고한 칼날”의 고독.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견고한 고독」)과 같은 전대미문의 순수함에 이를 때까지 절대적 언어 순수를 꿈꾸는 고행과 수양의 고독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김현승의 고독은 근본적으로 보잘 것 없고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자아를 내세우거나 펼쳐가는 것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의 고독은 개개의 모든 인간들이 비로소 처음으로 모든 본질적인 것의 가까이에 이르게 되는 개별화, 즉 세계의 가까이에 이르게 되는 그런 고독화(Vereinsamung)와 관계되어 있다. 오랜 방황과 고통이 “끝나면서 나의 처음”을 “알게”(「고독의 끝」)되는 인간의 궁극적인 고독이 김현승의 고독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고독 속에서 시적 주체로서 나는 “너를 잃은 것도/나를 얻은 것도 아”(「고독」)닌 그 어떤 상태에 도달한다. 어느 순간 나는 각기 마치 자신이 유일무이한 자처럼 홀로 영원의 먼 끝으로 비유되는 그 어떤 거대한 전체 앞에 서 있다. 결국 자발적인 고독의 길을 통해, 비로소 나는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해오고 추구해왔던 영원 또는 무한과 마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물처럼 만지거나 바라본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철저히 피할 수 없는 고독이 안겨준 행운이자 선물이다. 결국, 김현승이 고독이라 지칭하고 있는 그것은 곧 내가 타자와 분리되기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의 일종이며, 본래적 존재를 회복하기 위해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본사태를 가리킨다.

그러나 고독의 길이 이끌어준 ‘영원의 먼 끝’은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고 기원하다고 해서 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뜻밖의 선물이며, 예기치 않는 방문 형태를 띤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나 자신이 문득 낯선 타인이라는 것을 느끼도록 만든다. 나란 존재가 자명한 사실이 아니라, 지금 내게로 다가오는 무엇인가에 대한 경험으로 존재함을 일러준다. 그 과정을 거쳐 영원의 먼 끝이라는 타자성의 지각을 통해 나는 오랜 타성과 일상의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감지한다. 그리고 타자성의 계시로서 ‘영원의 먼 끝’은 손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오랜 시간의 인내와 기다림을 통해 가능하다. ‘무한의 눈물겨운 끝’을 만지는 영광 또는 신성의 체험은, 그러나 나의 바깥에 있는 대상 또는 절대자가 준 선물이 아니다. 따스한 체온을 지닌 채 내게로 더 가까이 다가오는 무엇인가는, 놀랍게도 내 안에 은폐되어 있던 그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종교성보다 더 원초적이고, 즉자적인 그 어떤 체험과 관계되어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타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체험이 아니다. 나 혼자서만 체험 가능한 근본경험의 일종이다. 내 눈과 손으로 감지할 수 있는 분명한 실재로 체험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비가시적이고 비가역적이기에 그 경험을 언어로 재현하려는 자들은 자칫 광인으로 내몰리거나 헛소리꾼으로 내몰리기 쉽다. 영원 또는 무한의 실재는 더욱이 그 어떤 언어나 말의 침투도 허용하지 않기에, 설령 언어의 마술사라는 시인이라도 이방인 취급당하기 일쑤다. 근본적으로 언어화 이전에 있음으로 하여, 그 세계를 곡진히 재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무기력하게 나의 언어들을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접근하려고 할수록 빗나가는 그 어떤 세계라는 것을 드러낸다.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로도 그 세계를 정확히 번역해낼 수 없기에 티끌처럼 날려 보내야 하는 무능력은, 그것이 견주어보거나 비교할 대상이 끊긴 절대의 세계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손으로 어루만질 만큼 분명하게 체험하고 목격할 수 있는 것이지만, 과거의 신성한 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라는 시조차 접근하기 어려워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고독을 통해 도달한 무궁 또는 무의 세계이다.

그러나 오히려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적시함으로써 나의 시는 그 생명력을 얻는 역설에 직면한다. 시적 언어의 무기력 내지 한계를 느끼는데서 오는 절망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무한의 끝과 마주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으로 뒤바뀐다. 즉 고독한 시인의 한 명인 내가 도달한 절대고독의 세계는 언어활동의 완전한 해체와 더불어 새로운 말이 탄생하는 용광로이다. 또한 그러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나의 시는 말 이전과 말 이후, 하나의 침묵과 다른 침묵 사이를 가로지르며 연결시키는 메신저이다. 말의 침묵, 침묵의 말이 그야말로 절대 고독의 세계이며, 그 결과로 그 세계에 다가가는 그의 언어는 투명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단단하게 마른/흰 얼굴” 또는 “그늘에 빚지지 않고/어느 햇빛에도 기대지 않는/단 하나의 손발”(「견고한 고독」)의 세계. 습기어린 내적 체험이나 감정 기폭이 심한 서정적 열망보다는 잘 마르고 절제된 견고한 고독의 형이상학과 맞닿아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의 고독은 단순한 고립감이나 외톨이로서 느끼는 외로움 따위가 아니다. 그의 시「견고한 고독」에서 보여주듯이 “높은 언덕에 떨어진” “굵은 열매”의 “쌉쓸한 자양(滋養)/에 스며드는/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고독의 참된 의미다. 그리고 그것은 획일적인 삶이 아닌, 진실된 삶 또는 참된 존재감이라고 할까. 그의 고독은 낯선 곳에 홀로 떨어져 있다는 느낌과 동시에 우주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을 선사하는 그런 고독이다. 홀로이면서 홀로가 아님을 느끼게 하는, 그 누군가나 그 무엇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을 동반시키는 고독이다. 어느새 우릴 하늘의 무한함에 자신을 열고, 동시에 대지의 어두움에 뿌리박도록 유도하는 고독. 모든 의지처와 타인과의 상실한 고독의 극단으로서 절대고독에 이르러야만 눈물겨운 ‘무한’의 끝을 어루만질 수 있으며, 그리하여 원초적인 온전한 나가 출현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는 고독이 김현승이 일생을 두고 추구한 고독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다. ( 격월간 '에세이스트' 30호(2010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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