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시인의 ‘문학과 언어’

2011.05.14 06:01

강학희 조회 수:291 추천:6


"맹물은 가고 소주만 오라” -고은시인 ‘문학과 언어’ 강연 내용  
  
기사-고은시인 ‘문학과 언어’ 강연 내용

[문학]고은시인 ‘문학과 언어’ 강연 내용은?


김훤주 기자 / pole@dominilbo.com



“맹물은 가고 소주만 오라”

강연 첫 마디부터 화두를 던졌다.“맹물은 가고 소주는 오라.”

마련돼 있는 샘물을 물리치고 맑은 소주와 김치 한 보시를 주문한 것이다. 시인은 김치 씹는 소리를 그대로 냈다. 소주도 거나하게 잔에 따라 거푸 마셨다.

시인은 “바쁜 현실에서 문학 이름으로 만나는 것도 큰 복”이라며 “친밀한 비밀집회에 참석한 느낌이 드는데, 마음 속 절실한 몇 마디를 하겠다”고 말했다.

강연뒤 밀양의 신은립 시인이 “지금까지 펴낸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 기억하시냐”고 묻자 시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바로 “아리랑”을 불러댔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춤사위를 곁들여서. 그러잖아도 한글날이 다가오는 가운데, 우리의 말글에 대해 ‘예사로이’생각하면 안된다는 시인의 말이 ‘예사롭지않다.’

인도에 10억 넘는 사람이 살고 있다. 언어도 그렇게 많다. 아마 1660개쯤 될 것이다. 지역의 표준어말고 갈라져 나온 사투리까지 포함되는데 우리 방언과는 수준이 다르다. 우리는 방언이 몇 개 안 되는데 인도 방언은 표준어라고 해야 할만큼 서로 다르다.

태평양의 파푸아뉴기니는 협곡을 지날 때마다 언어가 달라진다. 4000명 정도 주민에 언어만도 900가지라고 한다. 20리만 지나면 통역이 있어야 할 정도라니 아주 절망이다.

우리나라 같이 큰 땅덩이에서 이 많은 사람이 한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남과 북이 갈라져도 말이 통한다는 게 커다란 행복이다. 몇 십 년 동안 다르게 살았는데도 동질감을 이룰 수 있다는 게 굉장하다는 얘기다.

세계에 언어가 6430개 남짓이라고 한다. 엄청나게 많은 언어가 있었는데 다 없어지고 몇 가지만 살아 남은 셈이다. 이런 가운데 볼 때 우리 언어가 살아 남은 것은 소름끼치는 기적이다. 긴장 속에 우리 언어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며 살아야 한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을, 그 전부터 있던 우리 말을 민족어로 쓰는 것을 당연하다거나 태평스럽게 생각하면 안된다.

우리 언어가 위기에 부닥쳐 있다, 이를 우리 모두가 인식해야지 않겠는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무엇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만 시와 시학이 감정과 정서만을 담는 게 아니다, 시대의 폭풍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인식을 해야 한다.

어떤 사회든 언어만 유지되면 끝끝내 다른 세력이 접수할 수 없다. 일본 식민지 정책 담당자가 뒤늦게 알고 조선말 쓰지 말라, 이름도 바꿔라 했는데 이광수가 가오야마인가로 이름을 바꾸고 바꿨더니 이렇게 행복하다, 글을 썼다. 이름을 바꾸고 언어를 바꿔도 이전 존재가 그대로일 것 같지만, 바로 그 순간 이광수라는 존재는 성립이 안된다.

일본이 ‘조선’이라는 주체는 가져갔지만 서술 주체는 끝까지 남았다. 말과 글, 서술 주체는 절대 주체를 잊지 않는다. 언어가 없어지면 민족도 마지막이다. 우리가 쓰는 한국어만이 국경이다. 시장원리에 따라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다. 국경에 갇힌 문학은 없어진다.

언어를 모국어라 하지 조국어라고 하지는 않는다. 한 다리 건너 할아비한테 배우지 않고 어미한테 바로 배웠다. ‘조국’에는 역사의 무게가 얹힌 당위가 들어 있는 반면 ‘모국’에는 몸소 겪은 체험과 첫 사랑의 절실함이 배어 있다.

어미와 자식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은 배고픔밖에 없다. 임진왜란 때 피란길에 어미가 갓난애를 업고 가는데 배가 너무 고파 자식이 중병아리로 보여서 바로 잡아먹고 말았어.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바로 자기 애인 거라.

60년대 제주도에서 미친 여자를 만났었다. 저녁만 되면 부두에 나와 애절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기 아버지가 배신하고 떠나는 바람에 집안에서 구박을 받아 미쳐버렸는데 그래도 아기는 끝까지 보살폈다.

우리가 문학을 한다고 허공을 붕 떠 있는 것도 아닌데 물질을 경멸하고 고도한 정신성을 말하는 것은 그래서 가짜다. 부처도 ‘삶의 공동체는 밥의 공동체’라는 취지로 설파한 적이 있다.

마찬가지 비유의 허영도 버리라고 하고 싶다. 물론 비유 없이는 문학이 안되지만 직유·은유·환유를 남용하면 안된다. 그럴 바에 곧장 그대로 서술하는 것을 무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 속 인물과 사물과 사건이 스스로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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