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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과 젓가락

2007.02.05 13:55

김 학 조회 수:174 추천:5

                    숟가락과 젓가락

                                                         三溪 金 鶴

나는 단군의 자손들이 식사 때마다 즐겨 사용하는 한국의 토종 숟가락이다. 우리 숟가락집안의 족보를 펼쳐보면 나무숟가락을 거쳐 청동숟가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유구한 내력을 지닌 명문집안임을 알 수 있다. 젓가락은 우리 숟가락보다 한참이나 늦게 태어났다.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젓가락이 지금까지는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여겨진다니까 말이다.

어느 식당이나 식탁에는 수저통이 놓여 있고, 그 통 속에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수북하게 담겨져 있다. 우리의 운명은 그날 어떤 손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희비가 결정된다. 우리 숟가락이나 젓가락에게는 손님을 선택할 권한이 없다.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지 날씨가 후텁지근하다. 금세 소나기 한 줄기라도 쏟아질 것 같은 날씨다. 점심시간이 되자 60대 중늙은이 세 분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우리 식당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주인아주머니가 물병과 컵을 가져다 놓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꺼내 놓으며 식사주문을 받는다. 미리 의견을 모으고 왔는지 백반을 시켰다.

나는 ㄱ씨를 맡게 되었다. ㄱ씨는 먼저 시원한 오이냉채 국물을 한 숟갈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내가 그 냉채국물을 가득 싣고 ㄱ씨의 입안에 들어가 보니 위아래 모두 틀니가 아닌가? 어제는 미인의 입안에서 미인의 애무를 받으며 열심히 일을 했는데 오늘은 노인의 입안에서 일을 하게 되다니……. 이게 바로 우리 숟가락의 운명이다. 나의 오랜 경험에 따르면 이런 손님은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좋아하고, 건더기보다는 국물을 즐겨 먹는다. 그러니 젓가락보다는 숟가락인 내가 더 바쁠 수밖에.

어제는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어제 점심때는 우리 식탁에 싱싱하고 발랄한 20대 미녀 네 사람이 자리를 잡았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어서 화제가 무궁무진했다. 수다쟁이들인지 잠시도 조용할 틈이 없었다. 귀가 따가웠지만 견딜 만했다. 그날 나는 넷 중 가장 예쁜 ㅇ양을 맡게 되었다. 다른 숟가락들이 무척 나를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 예쁜 ㅇ양은 식사가 나오자 된장찌개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된장찌개가 맛이 있었는지 아니면 버릇인지는 몰라도 나를 쪽쪽 빨아주었다. 뜨거운 국물 속으로 들어갈 때는 힘들었지만 미인이 혓바닥으로 나를 핥아주니 황홀하기 짝이 없었다.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나는 그녀가 밥 한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심부름을 해 주었다. 식사가 끝나자 나는 할일이 없어져 서운했다. 언제 또 저런 미인의 입 속을 드나들며 즐겁게 일할 수 있을지…….

오늘은 틀니할아버지의 식사 심부름을 맡게 되었다. 이 틀니할아버지 올해 나이는 예순 넷. 서너 살 때부터 숟가락을 사용했을 터이니 나는 이 할아버지가 사용한 몇 번째 숟가락쯤 될까. 정답을 알 수 없으니 부질없는 계산이다. 이 틀니할아버지도 본인이 결혼할 때는 신부가, 아들이 결혼할 때는 며느리가 은수저를 가져와 사용했을 것이다. 또 젊은 시절 군대에 가서는 항상 전용 숟가락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식사를 하다 제대를 했을 것이다.

이 틀니할아버지도 자기 집에서는 자기 전용숟가락을 정해두고 사용할지 모르지만, 문밖에 나서면 네 숟가락 내 숟가락 가릴 수가 없다. 숟가락과 손님의 만남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기 때문이다. 전생에 인연이 있었기에 그렇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가족들이 자주 찾는 단골식당에서는 실제로 별의 별 일들이 다 벌어질 것이다. 지난번 회식 때 시아버지 입속에서 놀던 숟가락이 다음번에는 며느리 입속을 드나들고, 지난번 사위 입속을 드나들던 숟가락이 이번에는 장모 입속에서 놀기도 할 것이다. 숟가락을 사용했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숟가락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알 것이다. 단골손님만을 맡겠다고 고집을 피울 수 없는 게 숟가락과 젓가락의 운명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운명은 기생(妓生)과 다를 바 없다. 그게 과연 숟가락의 비극일까 희극일까?

숟가락의 동반자는 젓가락이다. 그러나 숟가락과 젓가락이 항상 세트로 다니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따로따로 때로는 함께 일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단거리 운반도구는 젓가락이다. 그 젓가락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베트남, 싱가포르, 몽골 등지에서 약 15억 명이 사용한다는 통계가 있다. 이중 한‧중‧일 세 나라가 젓가락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이 젓가락을 사용할 때는 손바닥, 손목, 팔굽 등 30여 개의 관절과 50여 개의 근육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포크를 쓸 때의 운동량은 젓가락을 쓸 때에 비해 절반밖에 안된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젓가락을 사용하는 어린이들이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젓가락의 크기나 모양도 나라에 따라 다르다. 중국은 식구가 둘러앉아 식사를 하기 때문에 음식과 거리가 멀고 반찬에 기름기가 많아 집기가 어려워서 젓가락이 길고 굵은데, 일본은 밥그릇 국그릇 반찬이 모두 자기 앞에 있으니까 젓가락이 짧을 뿐 아니라 생선이나 우동을 먹기 좋게 끝이 뾰족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젓가락은 25센티미터 안팎의 길이에 끝이 뭉툭하다. 또 젓가락의 재질로 보면 중국이나 일본은 나무나 대나무젓가락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주로 쇠 젓가락을 사용한다. 옛날엔 은이나 놋쇠로 젓가락을 만들어 썼지만 요즘에는 묵직한 스텐레스나 가벼운 알미늄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젓가락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재질은 달라도 젓가락을 즐겨 사용하는 동양문화의 근본정신은 다르지 않다. 서양식탁엔 칼이 오르지만 동양식탁엔 숟가락과 젓가락뿐 칼이 오르지는 않는다. 동양의 요리들은 젓가락으로 집어서 한 입에 먹을 수 있도록 미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요리문화로 따진다면 동양이 서양보다 한 수 위임이 분명하다.

밥이나 국 또는 국물 있는 음식은 숟가락을 사용하고 그 밖의 반찬은 젓가락으로 집어먹는 게 바른 식사예절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밥조차 젓가락으로 먹는 이들이 없지 않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나 같은 숟가락은 개점휴업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무노동 무임금이 아니어서 다행이긴 하다.

또 젓가락질을 가르치려 들지 않고 자녀들에게 포크를 주어 반찬을 찍어먹게 하는 젊은 엄마들이 없지 않아 안타깝다. 그게 식탁문화의 서세동점현상(西勢東占現狀)이라는 사실을 생각지 못한 까닭이려니 싶다. 많은 사교육비를 들여가며 아이들을 이 학원 저 학원에 보내는 것도 좋지만 젓가락질 한 가지라도 제대로 가르치는 게 현명한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나는 또 이 다음 식사 때는 어떤 손님을 만나게 될지 자못 기대가 된다. 날마다 새로운 손님을 만날 것을 꿈꾸며 세월을 보내는 나 같은 숟가락의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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