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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남자

2007.02.05 13:17

강숙련 조회 수:305 추천:7

                    내 가 만난 남자

                                                   강숙련

  지금도 그 남자는 해운대에 가면 바닷물이 싱겁다고 우긴다. 맛 봐, 맛을 보라고. 손가락에 장을 찍듯 검지 하나를 세워 들고 싱거운 장난을 건다.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하도 자기 아재 자랑을 하기에, 그럼 한번 보자 했더니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사람이다. 칼칼하게 날이 선 모시적삼을 입은 그는 서른한  살 노총각이었다. 총각이 웬 모시적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기에 그다지 싫지 않았다. 좋은 시절을 책과 씨름하다 다 놓쳐 버린 낙방거사였지만 눈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눈빛이 살아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대체로 그런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다해 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싱겁다고 우기는 그를 몇 번 더 만났다. 안개에 가려 보였다 말았다 하는 오륙 도를 가리키며 “저 섬을 팔아 버린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고 너스레를 떤다. 갈매기 똥 때문에 관리하기 어렵다나? 대동강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이야기는 들었지만 오륙도 팔아먹은 선달을 만날 줄이야.

  매번 모시적삼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 신기해서 재차 만났다. “양복 없어요?” 하는 물음에 “넥타이 맬 줄을 몰라요.” 하는 대답이 우스웠다. 하지만 어쩌란 말이냐. 왠지 모르게 자꾸만 관심이 가는 걸. 그 날 밤에는 해운대의 잔물결도 낄낄거리며 수군거렸다. 수평선 저편의 깜박이는 불빛이 더 가깝게 보였다.

  얼마 후, 파도치는 바다에 결혼이라는 일엽편주를 띄우고 돛을 달았다. 그 동안 사 모은 넥타이로 두 사람을 수 십 번 옭아매고도 남으련만 서로를 온전히 묶어 둘 수는 없었다. 잡느냐 잡히느냐,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 뱅뱅 맴을 돌곤 했다. 그러다 서로의 발목에 끈을 매었다. 끝없이 상대에게 나를 맞추는 관계가 된 것이다. 중년의 우리를 묶어주는 그것을 나는 우정, 혹은 의리라고 부른다.

  그 동안 아들 둘이 합류했다. 지지고 볶는 재미가 좀 더 있다. 풍랑을 만났을 때도 그들의 무게 덕분에 중심을 잡아 나가기가 훨씬 수월하다. 어느 날, 작은 녀석이 실실 웃으며 수작을 건다.
  “형님 친구가요, 나보고 주워 왔느냐고 하던데요. 형보다 잘 생겼다고요.”  
  “그래, 아빠 다리 밑에서 주워 왔지.”
  “에이, 난 엄마 다리 밑이야.”

  부전자전이라더니,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아들을 데리고 그 남자는 싱거운 농담 판을 벌인다.
  “형아! 거시기에 털 날 때 따끔거리나? 근지럽나?”
  “자슥아, 니는 머리카락 날 때 근지럽더나? 따끔거리더나?”
  농담의 수위가 자칫 넘칠 듯 위태롭다. 그들은 곧잘 한데 어울려 온갖 말장난을 한다. 코밑이 거뭇거뭇해 지는 녀석들과 함께 끊임없이 나를 아우성치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항해가 늘 이렇게 유쾌하고 즐거운 것은 아니다. 달콤한 사랑 놀음에 해가 뜨고 기우는 줄도 모른 채 망망대해를 건너기도 하지만 폭풍우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난파직전의 위기도 이겨내야 했다. 그 무렵에는 가족이나 집안의 대소사가 마치 등허리에 달라붙는 멍에인 듯 버거웠다. 성깔처럼 똑똑 부러지게 살고 싶은데 인생살이가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내 무게에 내가 짓눌려 기진맥진하며 나자빠졌을 때가 있었다. 전신마취주사를 맞고 수술대에 눕게 되었다. 수술실은 마치 푸줏간 같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겁에 질려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던 나는 한 마리 동물처럼 예리한 감각만 남아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사뭇 기계적이고 냉담했다. 텔레비전의 메디컬 드라마에 나오는 정경이 아니었다. 곧 나에게 일어 날 일이 드라마가 아니듯.

  잠시 동안,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의식 저편의 일을 엿보았다. 잠깐이나마 죽음을 맛보게 된다는 생각 속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을 때, 의사는 내 허리의 한 곳을 열었을 게다. 마치 점령군처럼 칼을 들고 내 몸 속의 처녀지로 들어왔을 게다. 곡예사가 줄을 타듯, 신들린 무당이 작두를 타듯 척추의 신경 줄을 따라 기예를 부렸을 것이다.

  잠에서 깨듯 마취가 풀렸다. 주위가 어수선했다. 고장 난 텔레비전의 화면처럼 몇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말았다 소란스러웠다. 잠시 낯익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연체동물처럼 늘어진 나를 회복실로 옮기는 중이었나 보다. 그 와중에 의사와 간호사를 향해 연신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거 좀 살살하시오! 부딪히지 않게. 이쪽을 들어요. 저런, 조심하라니까.”
  그는 해운대 바닷물이 싱겁다고 우기던 사람, 오륙도를 팔아먹었다는 사람, 바로 그 남자였다. 한동안 졸였던 긴장을 그렇게 풀고 있었다. 애꿎은 간호사들만 놀라서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진이 빠져 버린 듯 하다.

  허풍이든 사기든, 먹혀드는 상대가 있어야 신이 난다. 싸움도 상대가 만만찮게 버텨줄 때 흥미로운 것이다. 고장 난 배를 타고 정박한 선장처럼, 전의를 잃은 장수처럼 기진맥진한 그 남자를 위해 나는 기꺼이 다음 항해를 자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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