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진 서재 DB

초대작가글

| 박봉진의 창작실 | 초대작가글 | 자유참여 광장 | 작가갤러리 | 공지사항 |
| 함께웃어요 | 프래쉬와 음악방 | 사진과 그림방 | 음악동영상방 |

경계

2007.02.06 11:03

박영란 조회 수:176 추천:5

                              경계
                                                                                                                                      

                                                        박영란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서 주체가 되기도 하고 객체가 되기도 한다. 가령 예식장에 가서 보면 뒷짐 지고 서서 신랑, 신부를 여유있게 구경하며 덕담해 주는 하객은 객체가 되는 쪽이고,  그 동안 팔 걷어붙이고 앞장서서 일을 주관하던 혼주는 주체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손님이 되는 마음과 주인이 되는 마음은 완전히 다르다.
글을 읽을 때와 글을 쓸 때도 그 입장은 사뭇 다르다. 똑 같이 활자를 매개로 하지만, 글을 읽을 때는 별 부담 없이 재미있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글을 쓰는 장본인이 되는 경우는 활자에 무거운 추를 달고 가는 것처럼 힘들고 고되다. 거기에는 재미보다 인내가 요구된다. 열매를 만들어 가는 쪽이 주체라면 객체는 그 열매를 바라보는 쪽이지 않을까.  
부엌에서 하는 일은 누가 뭐래도 내가 주체다. 주부의 역할은 미흡하나마 내가 확실한 주인이다. 거기에는 하등의 갈등도 망설임도 없이 강한 추진력이 있다. 그래서 간혹 맞닥뜨리는 설문조사의 직업난에도  ‘주부’라고 당당히 적는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의 이 이력 앞에 슬며시 비집고 나서는 다른 명함이 생겼다.  ‘수필가’. 수필가는 아직 주부라는 텃새에 눌려 자신의 이름을 떠벌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자신이 나설 차례가 아닌가하고 기회를 보고 있는 듯 하다. 수필가라는 이름도 이제는 주체가 되고 싶은가 보다.
언제부턴가 홀가분하게 즐기면서 책을 읽었던 그 명쾌한 기분은 사라지고 말았다. 책을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고, 책을 읽으면서도 글을 분석하고 독해하고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 내지는 열등감 같은 것이 일어난다. 주부의 일이 늘 습관으로 이어지듯, 글 자체도 이제는 하나의 의식처럼 따라 다닌다. 그러니 내 의식 안에는 수필가와 주부가 서로 주인이 되겠다고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시인은 시인으로써 소설가는 소설가로써 그 문학적 역량을 스스로 자부하거나 인정을 받는데 있어서 별 거리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문학이라는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수세와 공세를 다 아우르는 공부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수필가라는 처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지만, 간혹 내가 문학을 한다고 했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생각해 보면 당당한 자신감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문학소녀도 아니고, 아니면 문학줌마(문학아줌마) 정도 되는 것일까. 수필이 늘 문학의 변두리에서 서성이듯, 나 역시 문학의 경계에 서 있는 경계인 인가.
어느 날 재독교포 송두율씨가 우리나라에 왔다. 독일에 철학교수라는 직함이 있는 그는 한 때 유신정권과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가라고 했다. 하지만 그간의 행적은 북한 노동당에 입당하여 정치국 후보위원까지 오른 인물로 밝혀졌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입장을 남과 북의 경계에 선 ‘경계인’이라 내세웠다. 귀에 달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처럼 가장 편이한 그의 잣대에 온 나라가 시끌벅적 뒤숭숭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경계인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여행지에서 만난 가이드는 그 나라에 이민 온지 20년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도 해가 설핏 질 때나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고국이 생각나서 코끝이 징 하다는 그의 처지가 딱해 보였다. 어느 한 곳에 살면서도 그곳의 붙박이가 되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늘 떠돌고 있는 그의 정체성 역시 경계인이지 않을까.
경계는 이쪽과 저쪽을 나눔에 있어 항상 애매 모호함과 갈등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이다. 양심과 비양심, 도덕과 부도덕, 확실과 불확실...이런 경계를 정확히 금 그을 수 있는 선이 존재할 수 있을까. 非(비), 不(부), 不(불) 은 부정이 아닌 차라리 완충지대다. 생각해보면 나의 마음과 행동은 이 완충지대에 훨씬 많이 머물러 있다. 차가 다니지 않는다고 빨간 신호등에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 나를 보면서 비양심적이라며 자책하지만, 그 운운 자체가 참 양심적인 사람이라며 오히려 자위하기도 한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이런 숱한 의식의 경계에 머물면서 우린 도덕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도덕의 객체가 되기도 한다.
하오의 범어사는 침묵의 경계에 접어든다. 부처님께 예불 드리는 사람도 기도 올리는 사람도 다 빠져나간 한적한 산사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사람의 소음에서 자연의 침묵으로 빠져드는 법당은 참으로 경건하고 산사를 둘러싼 금정산의 위용은 숙연하도록 장엄하다. 하나의 나무들이 단풍으로 물들어 오색의 숲을 이루고 숲은 긴 능선으로 이어져 거대한 산을 이룬다. 이 자연을 보고 있으니 자연에는 경계가 없는 하나의 섭리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갈등도 없고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조화.
산사를 내려오면서 불어오는 찬 공기를 쐬며 이제는 가을도 겨울의 길목에 있구나 생각하였다. 그 길목을 우리는 환절기라 부른다. 계절과 계절의 경계,우리가 살아가는 길목마다 무수한 경계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9 수박이고 싶다 박영란 2009.11.18 642
18 미로 찾기 한상렬 2007.02.07 358
17 깨어 있기 한상렬 2007.02.07 305
16 정성화 2007.02.07 106
15 풍 로 초 정성화 2007.02.07 395
14 꽃 피우기 하길남河吉男 2007.02.07 216
13 대금산조 정목일 2007.02.06 204
12 가을금관 정목일 2007.02.06 199
11 능선의 미 정목일 2007.02.06 169
10 땀 좀 흘려봐 박영란 2007.02.06 278
» 경계 박영란 2007.02.06 176
8 *나는 행복합니다 김학 2007.02.05 175
7 *살 송곳과 골풀무 김학 2007.02.05 84
6 좋은 수필의 조건 정목일 2007.02.05 617
5 못 먹어도 고 강숙련 2007.02.05 482
4 참빗 강숙련 2007.02.05 373
3 나이테 file 박영란 2007.02.06 287
2 내가 만난 남자 강숙련 2007.02.05 305
1 *숟가락과 젓가락 김 학 2007.02.05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