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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기
2007.02.07 05:18
깨어 있기
한상렬 hsy943@hamail.net
캄캄한 밤 폭포는 야광을 반사하며 오색찬란한 무지개로 포물선을 그으며 뛰어내리듯 쏟아진다. 어림잡아 일 킬로미터나 되는 폭과 일백 미터도 넘음직한 물기둥이 장관을 이룬다.
마릴린 몬로가 출연했던 명화 속의 한 장면이 아니다. 버팔로 비행장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들어가 초겨울 한밤중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본다.
도대체 저 많은 물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자연의 신비에 압도된다. 물은 떨어진다기보다 차라리 지축을 흔드는 진동이다. 호텔로 돌아왔으나, 물소리가 방안까지 쫓아온 것만 같은 환청에 그만 눈을 감는다. 그런데 그 거대하고 웅장한 거폭(巨瀑) 저쪽으로 꼬맹이가 달음질하다 뛰어내리는 듯한 우리네 폭포가 걸려 있다.
아침부터 잠이 쏟아진다. 지난 밤 일찌거니 잠자리에 들었지만 아침에 일어나서도 온몸이 나른하고 어질어질하다. 만상들이 밤사이 꿈속에서 깨어나듯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사물들의 미세한 움직임에까지 시선을 정박하고 그 내밀한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깨어있어야 한다.
넓은 술 장식이 달린 검은 속옷 차림에 검은 스타킹만 신은 벌거벗은 여자가 온전히 차려진 식탁 위에 벌렁 뒤로 누워 있다. 자신이 식사 메뉴인 듯 그녀는 고풍스런 도자기, 매끈한 크리스탈 포도주 잔, 삼페인 잔, 촛대 등에 둘러싸여 있다. 몸 밑으로는 호랑이 가죽의 적갈색 줄무늬 식탁보가 펼쳐져 있다. 잔 모양의 불꽃처럼 접혀 적포도주 잔속에 세워진 종이 냅킨에도 같은 무늬가 보인다. 식기 사이에 던져진 것처럼 누워 있는 여자. 그녀는 식탁의 질서에 대립하면서도 식탁의 일부 같아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어깨 옆과 머리 위쪽에 놓인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촛대 두 개가 그녀가 누운 식탁을 희생 제물처럼 보이게 한다. 아직 손님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만찬의 제의(祭儀)와도 같은 배치에 그만 압도된다.
나는 그곳에 초대된 손님일까?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고 있다. 쭉 뻗은 한쪽 다리는 바닥에 닿고, 다른 하나는 무릎을 굽혀 음란한 자세로 몸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그녀의 몸은 검은 속옷과 대조적으로 매끈하다. 상아 같은 하얀 빛깔이다. 아, 그것은 마네킹의 인공 재료로 된 여자의 나신이다. 한스 벨머의 <인형>을 본다. 깨어 있기는 이제 수필의 탄생을 예고한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성적 계몽주의, 특히 정신분석이란 앎을 향한 의지의 현대적인 표현 양식을 보았다. 괴테의 뒷날 고백은 자신의 모든 작품을 “거대한 고백의 조각”들이라고 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는 이미 설득력을 얻게 한다. 괴테가 만난 여인 사를로테 폰 슈타인. 그에게 바친 시 <어째서 너는 우리에게 깊은 눈길을 주었는가>에서는 “너는 지나가 버린 시절의 내 누이나 내 아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 줄 수 있었다.
너는 뜨거운 피에 진정제를 떨어뜨려 주었고, / 사납게 방황하는 길을 올바르게 만들었네. / 천사 같은 너의 품안에서 / 깨어진 가슴이 휴식을 얻었네.
그것은 환상이며 파괴적이다. 드러난 젊은 날의 꿈과의 결별 같은 울림이다. 그래 깨어 있기는 진행형이다.
하늘 위에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구름을 벗 삼아 27층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도대체 지상 몇 미터 높이에서 살고 있는가? 까마득한 그 높이에 현기증이 인다. 2 미터 높이의 천장을 하늘 삼아 살다 실족하여 아킬레스건을 다친 지도 거지반 20년. 그리곤 공원자락으로 이사하여 남들이 말하는 우람한 저택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이즈막 그 집이 현대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아파트의 산뜻한 실내 디자인에 익숙한 사람들의 말이겠다. 그 말도 맞다. 어쩌다 아파트에 가보면 그 편리한 생활에 나도 젖고 싶다. 그러나 쉽사리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한 뼘의 내 공간이 나를 즐겁게 한다. 일 없이 손에 흙을 묻히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몇 그루 안 되지만 그 나무들과 주고받는 대화나 풀과의 속삭임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또 주인을 반기는 흰둥이가 때론 위안이 된다. 이것이 오로지 변화를 두려워하는 내 심성의 탓만 일까?
세상엔 입이 떡 벌어지는 일들도 많다. 평당 5천만 원을 웃돈다는 아파트 가격이 한동안 입에 오르내리고, 요소마다 집을 헐어 공원 자락은 이제 바야흐로 빌라촌이 되어 갔다. 요즘 강남의 아파트는 한달 에 일 억원을 뛰었다나. 바야흐로 미친 세상이다. 은행 빚을 지고 남의 집에 살더라도 번쩍거리는 외제차나 고급승용차를 몰아야하는 시대 추세를 따라야하는지 골목길은 화려한 주차장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나는 터벅거리며 만원버스를 타고 출근을 한다. 참으로 나는 별종이지 싶다. 허긴 남들 다 갖고 있는 운전면허증도 없으니 이 어찌 불쌍치 않으랴. 그렇기에 깨어 있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환호의 도가니다. 폭발 직전의 용암이 분출하듯 일시에 쏟아져 내리는 마그마. 육 천 관객이 기립박수를 보낸다. 금세기 최고의 테너 가수에게 보내는 존경과 흠모의 갈채. 박수를 기다렸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띤 파바로티는 천천히 명지휘자 쥬빈 메타의 손을 잡고 눈인사를 나눈다. 옆에 서 있는 호세 카레라스와 플라시도 도밍고의 어깨를 잡고 만족한 듯 미소를 지어 환호하는 객석을 향해 답례한다. 다시 이어지는 박수갈채. 음악가와 관객이 하나다.
천부의 재능을 지닌 탁월한 예술인에게 보내는 경의와 찬탄은 가슴 벅차게 아름답다. 예술적 감수성이 없어도 좋다. 그 분위기에 젖기만 해도 좋다. 선율의 밤은 아리아와 칸초네로 이어진다.
나는 순간 연전 63빌딩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보았던 ‘화산은 살아있다’를 떠올렸다. 각혈하듯 붉은 마그마를 흘러내리게 하는 용암의 분출. 안으로 안으로만 응축하던 열정이 어느 날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폭발하여 쏟아지던 날.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였다. 그렇다. 불새, 불새였다.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마그마를 부르는 생명의 울림에 흡사했다. 누리 만 년을 안으로 삭이며 꿈틀거리던 산의 울림이 화산이라면, 차라리 그의 목소리는 수억 년을 다듬은 다음 분출해내는 살아있는 화산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인간이 창조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다. 깨어 있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수필은 나의 고백이요, 참회록이다. 원고지 15매. 내 인생의 축도다. 그러므로 내게 소망이 있다면 잘 빚어낸 토기와 같은 수필 한 편 쓰는 일이다. 백자처럼 우아하여 보면 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기교 없이 그냥 손으로 막 빚어 만든 문명의 얼굴을 쓰지 않은 토기면 좋겠다. 달빛을 보듯 부드럽고 고요한 빛깔. 청자나 백자면 더욱 좋으리라. 그러나 나는 나의 수필이 그저 덤덤하고 수수한 토기였으면 한다. 이런 항아리에는 수천 년 전의 물맛과 우리들 소박한 마음이 담겨 있어 좋다. 빗살무늬 하나에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 짐승들의 뒤를 쫓던 숨소리, 들판에서 듣던 풀벌레 소리가 그 속에 담겨 있어 더욱 좋다. 그렇기에 나는 그냥 소박하게 주물러서 빚은 토기 같은 한 편의 수필을 쓰고 싶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의 수필, 나의 삶이여. 그것은 무명의 한 작은 별이며, 풀숲에 피어 아무의 눈길도 주지 않고 이름 한 번 불러주지 않는 풀꽃이다. 그 풀꽃은 다름 아닌 나의 삶이다. 이쯤에서, 나의 깨어 있기는 한 편의 수필이 된다. 그렇다. 깨어 있기의 완료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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