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의 겨울

2004.02.04 04:01

조정희 조회 수:1316 추천:167

30년만의 겨울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겨울이다.
  길옆에 모아둔 며칠 전에 내린 눈 더미와 지붕 위에 남아있는 잔설,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과 창가에 낀 성에를 볼 수 있는 겨울을 언제 경험했던가. 1974년 오하이오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사온 후로 이런 겨울은 지내지 못했으니 실로 30년 만이다. 스키 타러 가서 구경하던 눈 덮인 산정 말고, 도심 속에서 눈 내린 길을 부스를 신고 걸으며, 두툼한 코트에 털목도리를 두르고 겨울을 맛보기는 30년도 더 전인 미스 때이지 싶다.
  오하이오에서 겪던 겨울은 펄펄 내리는 눈이 꿈과 낭만을 실어오는 게 아니었다. 언제쯤 제설차는 올 건가? 빙판 길을 어떻게 운전하지? 등을 염려하는 어린애 셋을 낳은 멋없는 아줌마 시절이었으니까.
  아들이 성장해서 하바드 대학에서 열리는 세미나 참석을 직장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단다.
나흘간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세미나 참석을 해야하기 때문에 함께 가는 며느리가 혼자서 심심할 것 같다며 나에게 보스턴 여행 동행을 청했다. 아들이 아니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인 나에게? 처음엔 얘가 내 마음을 떠보려는 가 싶어 언뜻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친정 엄마도 아닌 나를 택한 이유는 뭘까? 며칠간 먹고 자며 가까이 시간을 보내자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흉이 드러날 수도 있는데...이런 저런 부정적인 면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보스턴 시의 건축 양식을 보고싶고 뉴잉글랜드식 피시차우더도 먹고싶었다. 아름답게 지은 교회와 필그림 마을의 역사 유적과 문화를 접하고 싶은 욕망이 불같이 일어 쾌히 승낙을 하고 따라나섰다.
  고부간의 거북함 따윈 공연한 걱정임을 알았다. 교직이 직업인 며느리는 낯선 고장을 함께 여행하기에는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지하철과 버스 노선을 미리 지도를 보고 잘 알아놓은 결과 거동이 편했다. 꼭 들러야 할 뮤지움 같은 곳들의 정보를 자세히 입수해서 척척 알아서 안내를 하는 것이나, 어머니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고 제일 먼저 주홍글씨의 작가 나타니엘 호손의 생가를 찾자는 그녀의 의중에 나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여기 대학가의 학생들이 드나드는 'The Coop'이란 서점이 있다. 어머니는 책을 좋아하니까, 라며 데리고 간 곳이다. 고전적이고 학구적인 분위기를 간직한 장소의 아늑함과 넓게 높이 꽂힌 서책에 압도되어 한참을 꼼짝 않고 책에 파묻힐 수 있는 곳.
  책을 읽다가 창문을 통해 밖의 경치를 바라본다.  햇볕은 따사로우나 하얗게 눈이 쌓인 마을 캠브리지의 하바드 스퀘어. 매서운 바람이 휙 불며 눈가루가 유리파편처럼 반짝이며 부서진다. 차가운 보스턴의 겨울 안에서 고국의 겨울 하늘과 나무들 산야를 본다.
  시간이 흐를 수록 며느리가 고맙고 내 가정의 보배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읽던 책
'Beginning to Read' 을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나는 빨리 지갑을 열어 책값을 지불한다.
  내가 사 줄게. 이번 겨울 여행에 초청해준 답례야. 아니, 제가 고맙죠. 저 혼자라면 낮 시간이 무료했을걸, 어머니와 함께 와서 저도 즐거운데요.
  2004년의 겨울은 영원할거야. 너와 내 맘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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