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의 언덕

2003.02.17 08:11

조정희 조회 수:802 추천:84

단편소설 3 (Short 3)
그 후의 언덕

  아내는 다시 집을 떠나야만 했다. 이번은 승구의 제안이었다.
"여보, 당신 시애틀에 가서 몸조리하고 오면 어떨까? 요즘 그곳의 날씨 참 좋을 거야. 거기서 조용히 책도 읽고 세상만사 잊어버리면, 당신 위병이 좀 나을 것 같은데. 지금은 당신의 신경이 너무나 피곤하고 지쳐있어. ... "
"또 가라고? 아무리 친정이라고 하지만, 부모님께 낯이 안 서잖아?"
  '집사람이 저렇게 된 데는 제 책임이 큽니다. 얼마간 거기서 마음을 정리하며 정신 안정을 찾으면 해서요. 여름 방학 때 애들 데리고 그 쪽으로 돌아 뱅쿠버까지 다녀올 생각인데, 그 때에 저 사람 형편 보아 함께 돌아오지요.' 승구는 대역 죄인이라도 된 듯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장모님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가 송구스러워 면목없을 때마다 하는 버릇, 뒤통수를 자꾸 쓸어가면서 말의 속도가 한껏 늦어지는 것을 알아챘는지 아내의 친정에서는 별 수 있겠나, 그렇게 하지. 마지못한 허락이 떨어졌다.

  엘에이 공항에서 아내를 시애틀 행 비행기를 태우고 돌아서서 오피스로 오는 길이다. 오후 2시면 차량이 뜸해질 시간이건만, 10번 프리웨이는 차선마다 차들이 꽉 차서 모두들 70마일 이상 속력들을 내면서 달렸다. 이놈의 길은 한가할 때가 없으니.... 캘리포니아주는 여전히 인구가 느는 모양이다. 모든 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차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따로 러시아워가 없을 지경이다. 뭘 찾아먹겠다고 이렇게들 나와 가스들을 뿜어내면서 돌아다니는지...... 갑자기 신경질이 나고 짜증이 나는 것 같아 음악이나 들을까 해서 라디오를 틀었다.
'7월 16일 예정된 슈메이커-레비 혜성과 목성의 대 충돌은 지구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FM채널로 돌리려고 했는데 언뜻 나오는 얘기가 꽤 흥미로워 그냥 놔두고 귀를 기울였다.
'그 별의 크기가 지구보다 더 크고요, 폭발력이라는 게 원자폭탄의 1억발에 해당하니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거죠.' 대담하는 사람들이 아마 우주공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양이다. 처음부터 듣지 않아 잘 모르겠으나 그들은 소행성이나 혜성이 지구에겐 아주 위험물인 불청객이라고 얘기하며 덧 붙여서 어떻게 하면 이런 천체로부터 지구를 보존시킬 거며 그 환경을 보호해야 할 지에 대해 좌담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의 위기를 논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어디든 위험하지 않은 곳이 있는가?  누가 캘리포니아의 지진을 피해 미국 중동부 지방으로 이사갔다가 태풍을 맞아 목숨을 잃었다지 않은가. 세상의 어느 곳도 안심하고 살 곳은 없다. 오염되지 않은 공기가 없고, 물도 마음놓고 퍼 마실 수 없다.
  이러다 정말 라디오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구도 다른 어떤 별과 부딪쳐서 재 가루가 되는 건 아닌지. 아니면 불덩어리로 굳어 거대한 화석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천문학자들은 지구가 소행성이나 혜성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핵미사일을 쏘아 올려 이런 별을 요격해야 한다는데...... 지구가 예기치 않은 어떤 물체와 충돌해 파멸해 버리고 말 거라는 두려움은 승구가 막상 피부로 느끼는 위기감과는 종류가 달랐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땅 덩어리의 안전도를 염려하기보다는 좀더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문제에 있다. 십여 년이 넘게 지켜온 그들 부부의 둥지가 더 버틸 힘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다.  자신의 삶이 균열을 보이며 무너져 내릴 조짐이 있는데, 어떤 천체가 지구와 맞부딪쳐 대지의 한 부분이 말살되는 그런 위험은 그만이 당하는 게 아니라 인류 전부에게 내려지는 화로서 발등의 불이 아니라 강 건너 불인 것이다.  내 가정이 있고 난 다음에 내가 처한 사회가 있고, 그 다음에야 환경의 문제와 지구의 위기를 논할 수 있는 것 아닐지.
"여보, 나, 전처럼 건강해질 수 있을까?"
"그럼. 신경성이니까, 마음을 편히 갖고 규칙적인 생활하면 곧 회복 될 거야. 화장이나 좀 할 것이지. 당신 네 식구들이 보면 더 걱정하라고 그렇게 맨 얼굴에 가는 거니?"
"아유, 다 귀찮아. 원래 병색인데 찍어 바른다고 뭐 나아 보이겠어?
  핏기 없는 아내의 얼굴은 근래에 와서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일 정도로 야위었다. 게다가 화장도 하지 않아 파리한 모습에 누렇기까지 한 피부색은 영락없이 고생에 찌든 중년 여인이다. 르느와르의 그림에서 보이는 풍만하고 윤기 흐르는 중년 여인이 아니라 말라빠진 매력이라곤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빈 쭉정이 같은 아내의 얼굴이 승구가 운전하는 앞 유리창에 커다랗게 나타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마음에서 지우고 싶었고, 아내의 잡힘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윌셔 번화가의 8층 빌딩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엔 승구 혼자뿐이다. 그는 5층 버튼을 누르고 천장을 잠시 쳐다보면서 길게 숨을 내 쉬었다. 502호란 숫자 밑에 YU, SUNGGU, C.P.A. (공인회계사)란 금박의 글자들이 순간 다른 사람의 이름처럼 생소했다. 그는 열쇠를 넣고 문의 손잡이를 비틀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줄리가 조르르 다가왔다.
"전화 온 것 없었나?"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동생 분한테서 왔었어요. 들어오시면 꼭 전화를 해달라던데요. 그리고 조금 전에 버몬트 쎄븐 일레븐의 신용태 사장이 걸었어요. 오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답니다. 다시 전화 걸어서 예약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손님은 몇 시에 있지?"
"3시 30분에 C.S. TRADING CO.의 김 사장이 오기로 돼 있습니다. 그 후로도 5시까지 세분이나 만나셔야 합니다. 여기 파일들이 있습니다."
  승구는 책상 위에 파일들을 놓으려고 내미는 줄리의 하얀 손목을 잡아끌었다. 보드랍고 작은 손이 귀여운 새가 잡히듯 승구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별로 싫은 내색 않고 그의 책상 옆으로 돌아와 승구에게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그는 줄리의 두 팔을 잡아끌어 자기의 어깨 위에 그녀의 손을 얹어놨다. 그녀는 약간의 힘을 가해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지금 3시 5분인데요. 곧 김 사장이 들어올 겁니다."
"아직 30분은 남았잖아? 어 시원하다. 그래 그렇게 힘껏 주무르라고. 요사인 왜 이렇게 어깨가 뻐근한지 모르겠어."
"사모님은 잘 떠나셨어요?"
"음, 거기서 조금 밑에, 거기 좀 세게 주물러 봐. 이제야 풀리는 것 같군."
  전화벨이 울었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머리와 옷매무새를 쓰다듬고 프런트의 자기 책상으로 향했다. 사람이 들어왔다는 신호로 프런트의 벨이 울릴 때에도 똑같이 지어 보이는 그녀의 습성이다.
"여기서 받지 않고...."
"유승구 씨피에이 오피스의 줄립니다. 아, 지금 막 들어오셨습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승구는 1번 버튼을 누르고 수화기를 들었다.
"오빠, 승희에요. 전화 좀 해 달라고 했는데..... 여전히 바쁜가 보죠."
"응, 지금 막 들어왔어. 네 언니가 오늘 시애틀로 떠나서 공항에 나갔다왔어."
"그래요? 언니는 팔자도 좋네. 친정 나들이가 잦으니...."
"알면서 그러냐? 몸이 좋지 않아  가서 좀 쉬다 오라고 했어. 넌, 무슨 일로 전화했니?"
"엄마가 아버지한테 가겠다고 해서 로즈힐에 모셔다 드렸어요."
"어느새 가실 때가 됐나?"
"오빤, 엄마한테 신경 좀 쓰세요. 그러니까 맨 날 노여움을 타시죠."
"그 노여움이야 어제오늘 생긴 거니? 나도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너도 알잖니? 지금이 회계사들 혹사당하는 기간 아니니? "
"오빠, 시간 없는 줄 알지만, 엄마 집에 오실 때에는 오빠가 데려오실 수 있나 해서요. 손님이 있어서 그만 끊어야겠어요. 하실 수 있죠?"
  이곳 사정은 들어보지도 않고 전화 속의 음성은 황급히 사라졌다. 급하긴 자기만 급한가, 승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놨다.
  3월 중순에서 4월15일까지 소득세보고 기간이다. 해마다 이때면 잠잘 틈도 없이 바빠서  정신이 없었지만 일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선 소득세보고 기간이 골치만 아프고 피곤했다.
  근간의 미국 경제사정은 계속 하락하는 상태다. 그래도 신문이나 방송에선 캘리포니아주의 경기는 점차적으로 좋아지고 있다지만 실제적으로 주민들의 주머니 사정은 빡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조그마한 가게들을 운영하는 동포들은 거의 다 힘겨워했다. 게다가 4.29 폭동의 여파도 가시기 전에 금년 정월에 있었던 지진은 누구나 여기서 과연 계속 살아야 할지 마음들을 못 잡는 터라 한인들만 상대로 하는 비지네스인 경우엔 그 타격이 말로 할 수 없이 컸다.
  집 페이먼트를 하기가 어려운데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상점 건물에 세든 사람이 장사가 안돼 방세를 못 내고 있으니 이 빌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등의 안타까운 사정들을 듣고 있노라면 승구는 답답하다 못해 뒷골이 다 뻣뻣해온다.
"이렇게 밑지면서까지 장사를 해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러다 챕터 11(파산선고) 부르는 거 아닌가 싶어요."
"아직은 그 정돈 아니에요. 줄일 수 있는 한 경비를 줄여봐요. 고용인도 줄이고 식구들이 들어 붙어 하면 어떨까요?"
"그게 그리 쉽지 않군요. 자식들은 아직 학교에 나가고 있고 집사람은 워낙 일을 하지 않던 사람이라 잡일을 앞에 놓고는 두려움부터 앞세우니....."
"박 선생님 가게는 그래도 좀 나은 편입니다. 요즘은 렌트 비도 안 빠져서 사업 처를 그냥 놓고 나오는 사람들도 많아요. 워낙 경제 사정이 나쁘니까. 제가 대하는 고객이 모두들 이렇게 어려워하고 있어서 저도 요즘처럼 이 직업을 택한 것을 후회해 본 적도 없습니다. 허구한날 깨알같은 숫자와 씨름하는 것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거든요. 나 딴에는 꽤 정성 드려 손익 계산을 맞춰 늘 일 수 있는 만큼 경비 항목을 지출시켜 내야 할 세금을 줄여 줬건만 좀 더 줄여 달라는 겁니다. 결국은 나보고 거짓말하라는 건데, 전 그런 면에 별로 융통성이 없거든요. 정말 힘들어 못해 먹겠어요."
"허-허 듣고 보니 미스터 유의 고충도 알 만 하군요. 더 만나야 할 손님이 있습니까? 제가 마지막이면 마음도 스산한데 어디 가서 한잔 걸치며 저녁이나 함께 합시다."
"오늘은 안되겠는데요. 아직 한 분을 더 만나야 하기도 하고.... 일이 끝나는 대로 어머니를 모시러 가야 합니다. 아마 어머니와 같이 저녁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다음 기회에 합시다."
"미스터 유는 근래에 보기 드문 효자 시군요. 그렇게 하십시오."
  여느 때 같았으면 마침 잘 됐다 하고 따라 나섰을 텐데.... '효자라' 좀 전에 박씨가 흘리고
간 효자란 말이 귀에서 뱅뱅 돌았다. 아내에게서 많이 듣던 말이다. 당신은 왜 결혼을 했어요? 평생 총각으로 지내며 어머님만 따르고 살았다면 나 같은 여자 하나 만들지도 않았을 걸. 정말 내가 아내를 저 모양으로 만들은 건가? 아내 말처럼 결혼해서까지 내가 지나치게 어머니 편에 서서 생각하고 모든 일을 결정한 것인가? 허긴 아내가 건강할 때는 이런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승구였다.
  직장에서 업무에 지치고, 사람들 관계에서 시달림을 받는 것은 그런 대로 마치고 나면   맛 볼 수 있는 뿌듯한 성취감과 상쇄시킬 수 있었다. 몇 시간 후면 머리를 깨끗이 비우고 몸을 편히 내 맡길 수 있는 가정이란 보금자리가 있어서다. 애들에게 일어났던 얘기를 들을 수 있고, 아내의 자질구레한 푸념들을 귓전으로 흘려들을 수 있는 적당히 안락한 분위기의 홈은 낮 동안에 겪어야했던 두통거리의 일들을 잊기에 충분했다. 육신을 포근한 잠자리에 뉘인 채 비디오나 한두 편 보다가 잠이 들 수 있는 그런 공간과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남자로 하여금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승구의 가정은 그에게 이런 따스함이나 편안함을 주지 않았다. 비오는 날, 비 새는 방안에 앉아 있는 듯한 스산스런 느낌과 가슴속까지 시리게 하는 냉기가 감도는 그런 집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곧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위화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세상 떠난 그 해부터인 것으로 여겨진다.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자 승구는 아내와 의논도 하지 않고 부모님을 집으로 모셨다. 자신이 맏아들이기도 하고 형제 중 제일 큰집을 쓰고있는 형편이 그렇게 결정하도록 만들었다. 살고있는 집이 이층집인데다 아래층에 목욕실을 겸한 방이 따로 뚝 떨어져 있는 환경이라서 부모님이 조용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내가 별로 관심을 쓰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어느 집이 고부간의 사이가 좋겠냐만, 어머니와 아내는 결혼 초부터 부딪치며 살았다. 이상스레 어머니는 아내를 마음에 안 들어했다. 자신을 곱게 봐주지 않으니 며느리는 자연 어머니를 멀리하고 곰살갑게 굴기는커녕 꼭 해야 할 말마저 피하면서 지냈다.
  그런 상황에서 환자인 아버지와 함께 시어머니를 한 집에서 모시고 살게끔 만든 일이 아내와 어머니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킨 승구의 실수였다. 그러나 풍 맞은 아버지를 생활 형편이 살만한 아들이 버젓이 있으면서 그냥 노인 아파트에 살게 하기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여하튼 처음부터 좋지 않았던 고부간의 사이는 한 집에서 살면서 날로 더 나빠져 승구 부부간마저도 뜨악해하며 멀어 질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
  아버님은 7년간을 병석에 있었다. 그 동안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옹다옹 하면서도 면전 충돌이 없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에겐 아버지 병 수발을 들어야하는 큰 과제가 있었고, 아내에겐 바삐 돌봐줘야 하는 애들이 있으니까 서로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님이 세상 뜨신 후로는 아내와 어머니는 드러내놓고 말다툼을 했다. 할 일이 없어진 어머니는 전보다 더 며느리의 흠과 못된 점을 찾았다.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드는 시어머니는 아내에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가시 같은 존재였다. 전에는 애들이 있는 앞에서는 두 사람 다 얼굴 붉히고 언성 높이길 삼가는 것 같더니 이제는 애들이 있거나 말거나 소리소리 지르며 야단을 치는가 하면 아내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불고 화가 나서 뛰쳐나가 밤이
맞도록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승구는 집에 들어오기가 무서웠다. 어머니는 그가 들어서자마자 당신의 방으로 끌어들여
이러쿵저러쿵 아내의 흉을 보면서 가장으로서 처 앞에서 위신을 보이라고 요구했다. 얼굴에 기미까지 쓸어가며 속을 썩이는 아내가 처음에는 딱하고 애처로운 생각도 들더니 요즘엔 밤마다 들어야하는 그녀의 넋두리와 불평에 귀가 짓무를 것 같았다. 현대 교육을 받은 신세대 사람이 노인네 하나 구슬리는 꽤가 없나 싶어 모습이 보기 싫기까지 했다. 원래 치장을 하지 않는 편인 아내는 벌써 젊음을 상실한지 오랜 듯한 힘없는 피부에 잡티까지 생겨나 자기 나이 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인다.
  듣기 지겨운 어머니의 잔소리와 더 이상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아내가 부어터진 얼굴로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만을 잔뜩 안고서 남편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집이 승구는 싫었다. 그는 귀가 공포증에 걸렸다. 퇴근 후에도 집 잃은 개처럼 밖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즈음에도 지금처럼 인컴택스 보고하는 시기였다. 저마다 마지막까지 미뤄오다 임박해서 세금보고들을 하려들기 때문에 3월 중순부터 한 달간은 정신없이 바쁘다. 이 때는 밤 10시전에는 집에 들어갈 수도 없다. 도리어 일을 핑계로 집에 일찍 들어갈 수 없음이 승구는 다행스러웠다. 미움과 몰이해로 가득 찬 집안 공기가 싫었고, 그런 찬바람 도는 가정 분위기 속에서 일에 지친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얼큰히 취해서 몽롱한 상태로 직접 잠자리로 들어가고 싶었다.
  매일 으르렁대는 집안 식구들이 싫어서건 직장에 일이 많아서든 귀가 시간이 늦었던 탓에 아버님이 마지막 떠나시는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맏자식으로 아버님의 눈을 못 감겨 드렸다는 점은 늘 승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묻힌 로즈힐 묘지를 장례 치른 후에 두 달간을 거의 매 주말 찾아 간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죄책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함인지 몰랐다. 혼자 가느니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것이 조금이라도 그녀의 슬픔을 덜어드리는 길이라 생각했다.
  공동묘지가 아니라 한가로운 공원이나 푸른 들판의 풀 내가 향긋한 골프장의 모습에 더 가까운 곳, 비록 육신 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닐지라도, 남편이 누워있는 곳을 아들을 앞세우고 주말마다 찾아갈 수 있으니 어머니의 뿌듯한 기쁨이 하늘에 닿았으리라 짐작이 간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승구의 마음에, 자리 잡았던 아버지를 향한 죄스러움이 점점 옅어가고, 또 주말에 해야 할 일들이 자꾸 생겨서 매 주일 가던 게 격 주일로 가게 되고 어떤 대는 한 달에 한 번도 가기가 어렵게 됐다. 승구의 사정이 그런데 비해 어머니는 계속 가고 싶어했다. 묘소를 찾는 일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라고 말하며 아들이 못 가면 며느리에게 빌붙어서 운전을 해 달라고 졸랐다.
  그곳에 갔다오면 하루의 스케줄이 엉망으로 흐트러지지만 어머니가 며칠 동안은 기분이 좋아서 지내기 때문에 처음 얼마간은 아내도 꾹 참고 운전을 해드리는 것 같았다. 승구가 어머니와 함께 다닐 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라고 남편에게 빈정거리며 트집을 잡던 아내였다. 헌데 막상 자신에게 그 일이 넘어오자 차라리 마음 편하고 남 보기에도 며느리의
입장이 떳떳해 보여 선지 서너 달 동안은 별 탈없이 잘 해냈다. 그토록 며느리 앞에서 고자세를 취하던 어머니가 차편이 필요하면 비굴할 정도로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마지못해 끌려 다니던 아내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얘기할 수도 없는 지하 속의 남편은 그렇게 자주 찾아가는 시어머니 심사를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살아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  하는 일이라 여겼다. 이해는 고사하고 로즈힐 행차가 있을 때마다 노골적으로 자기 심사를 드러냈으며 짜증을 나타냈다.
"어머니, 지난 주말에 다녀오셨으니, 오늘은 그만 두세요.  이렇게 바람 불고 비가 뿌릴 때엔 안 가시는 게 좋아요. 저도 운전하기 힘들고요"
"아니, 난 꼭 가야겠어. 묘지에 물이 잘 안 빠지는 곳이 있거든."
"거기 물이 안 빠지는 곳이 어디 있어요? 언덕이 져서 너무나 물이 잘 흘러내리는데..... 또 물이 안 빠지면 어머니가 어쩌시겠다고..."
"어른이 가자면 갈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도무지 요즘 것들은 위아래도 없이 말 대답질 이란 말이야."
  그렇게 하고도 그 날 로즈릴 묘지에 갔다 온 것을 보면 막무가내로 나오는 어머니의 위력엔 아내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저녁에 낮에 있었던 일을 남편이라고 통사정을 해대는
아내에게 승구는 어머니 편에 서서 두둔했다.
"바람불고 비오는 날까지 묘지에 갈건 뭔지? 그 넓은 공동묘지에 사람이라곤 당신 어머니와 나 뿐이더라 구요. 아무리 생각해도 병적인 것 같아요. 어머닌."
"아버님이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바람 불던 날 운명하셔서 그래. 당신이 이해하고 좀 참아."
"비오는 날 운전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당신도 알죠? 오늘도 언덕길에서 차가 막 미끄러지던데. 어머니도 여기서 그만큼 사셨으면 사정을 알 만한데.... 며느리 입장은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는 분이에요."
"운전을 해보지 않았으니 어떻게 당신의 고충을 알겠소? 우리 늙을 때 생각해서 자-알 해드립시다."
  이런 식으로 승구는 아내를 달래며 어머니를 이해해주길 바라왔다. 아내 편에서만 잘 해준다면 시어머니 쪽에서 며느리에게 고개 숙이고 들어갈 일이 있는 게 지금껏 앙숙인 고부간의 관계를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아내는 철저한 결심이라고 한 모양 비오는 날 로즈힐에  갔다 온 후로는 어머니가 아무리 졸라도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기일과 생일, 추석, 이렇게 일년에 세 번만 해드리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네 년이 안 해주면 누가 못 갈까 봐 때를 정해주냐? 건방진 년."
  어머니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막내 승철을 부르고 먹고살기 바쁜 승희도 불러대며 때론 승구를 설득해서 적어도 한 달에 한번은 가곤 했다. 묘지에 가기 전 날은 며느리 보란 듯이 김밥과 과일을 싸고 준비하는 등의 온갖 부산을 다 떨었다. 어머니와 아내의 사이는 그로 인해 삼팔선처럼 허물기 힘든 선이 굵게 그어지고 또 그어졌다.
  아내는 두 아이들 학교와 과외활동으로 음악 레슨에 운동 게임까지 데리고 다니자면 그 운전 양만 따져도 굉장했다. 어떤 날은 집에 이르는 언덕길을 여덟 번이나  오르내린 적이 있으니 그녀가 운전하는 일에 지칠 만도 했다. 잘 모르는 길을 지도를 보고 찾아간 날이면 저녁 준비하는 게 힘겨울 지경이었다. 몸이 지치고 사정없이 밀려오는 수마에 못 견뎌 잠깐이라도 낮잠으로 눈을 부치다 저녁때를 놓치면 그 일이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다.
"다른 집 며느리들은 돈까지 벌어오면서 남편 수발 들고 애들도 잘 키우건만, 젊디젊은 게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집에서 살림만 하는데 뭐가 그리 피곤한지 참 알 수가 없어."
  빨리 일어나 저녁 지으라는 뜻으로 어머닌 계속 투덜투덜 듣는 사람도 없는 말들을 뱉어내고, 손으로 온갖 소리나는 물건들을 쾅쾅 소리내면 내려놓고 던지는 바람에 아내는 맘놓고 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내가 냉큼 일어나 쌀을 씻고 찬거리를 준비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어머니의 얘기는 들은 척도 않고 뜨거운 물 받아 목욕을 하고 어느 정도 몸 콘디숀 조절한 후에야 밥을 지으니 저녁이 아니라 밤참으로 먹으면 딱 맞을 시간에 식탁을 마련한다. 두 사람이 맞서는 것은 너무나 팽팽했다. 저울에 놓고 달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영원히 수평을 유지할 것처럼 보였다.
걸핏하면 거들어대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여자'란 시어머니의  이 말은 아내의 내면에 깊숙이 숨어있던 어떤 욕구를 불렀다. 나는 뭘까? 남편과 자식들에게 예속되어있는 종속물, 그러면서 매일 시어머니에게 헐뜯기는 피해자, 주영혜 자신은 이름조차도 잃어버린 지 오래 다는 생각. 미세스 유로만 통하지 처녀 때의 성은 어디에 서류 작성 할 때나 겨우 떠올릴 지경이니....
"여보, 하루에 한 두 시간만이라도 나 자신을 위해 써야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어느 날 아내는 이런 말을 하면서 시립 대학에 나가겠다고 했다. 승구는 말리지 않았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뭔가 배우는 것은 바람직하기도 했고, 자아확인에 좋은 기회가 될 뿐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줄이면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오히려 잘 한 결정이라고 부추겼다.
  아내는 월, 수, 금 두 시간씩 학교에 나가 배우고 싶었던 도자기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
그녀는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고단했으나 집안 살림도 피할 수 없는 그녀의 몫이었다.
'설거지는 제 때에 해야지. 놔두면 냄새나고 찌꺼기가 말라붙어 잘 닦아지지도 않아. 넌, 먹는 것보다 어째 버리는 게 더 많으냐? 식량 아까운 줄을 왜 모르니?' 시간이 모자라 쩔쩔매는 아내에게 어머니는 도움은커녕 화만 나게 하는 말들만 골라 비아냥거렸다. 어머니 당신의 일은 힘들어 못하겠다고 젖혀놓으면서 자기 일은 입술이 부르트면서까지 싸돌아다니는 며느리에게 신경질과 심통만 부리고 싶었을 것이다. '쓸데없이 그 나이에 공부가 다 뭐야. 괜히 시어미 보기 싫어하는 수작이지.' 어머니는 전보다 더 트집을 잡았다.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어머니와 정면 충돌을 피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아내의 공부가 더 많은 불화를 몰고 왔다.
"음식의 간이 왜 이 모양이냐? 도무지 싱겁고 시금털털하기만 하니...."
"어머니, 일찍 돌아가시고 싶으세요? 짜게 잡수면 그렇게 된단 말이에요."
"속옷 빨래는 기계보다 손빨래가 나으니 손으로 해."
"어머니가 안 하실 바에는 상관 마세요."
  아내는 어머니의 면전에서 대답질 을 꼬박꼬박 했다. 분노와 증오가 가득한 얼굴 표정을 하고서 마구 대들었다. 아내의 심사를 틀어놓을 목적으로 잡아뜯는 소리만 골라서 의도적으로 뱉어내는 어머니는 가해자의 입장이라서 그런지 별로 밖으로 나타나는 증세나 후유증 같은 것은 없었다. 허나 아내는 달랐다. 아무리 속이 상해도 집을 나간다거나 죽고 싶다거나 하는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근래엔 승구 앞에서 내가 남편을 잘못 만나 이런 졸경을 치른다면서 화풀이를 했다. 때론 자기가 죽어 없어져야 이 집에서 자신의 소중함을 알게 될거다 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혹시 죽을까, 가출을 할까봐  등의 걱정은 하지 않았다. 본래 정말 자살한다거나 집을 나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없이 시행한다는 것을 승구는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잠자리에서 승구를 거부하는 증세만은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여자의 나이 40대 초면 한창 성욕이 치솟을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도, 열흘도, 때론 한 달만에 요구하더라도 마지못해 끌려오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고조에 올라있는 상대방까지 맥이 탁 풀어지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주 초장부터 거부하고 들었다. 전엔 그 면에서 아내는 그렇게 미지근한 여자가 아니었다. 상당히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달궈져있는 쌍방의 열정을 끝까지 태우기 위해 온갖 체위와 노력을 다하던 여자였다.
  우연일지 모르나 아내의 그런 변화와 승구가 안색이 나빠지는 시기가 같았다. 사정해야 만 하는 정액의 축적 탓인지, 아니면 매일 늦게 들어와 잠이나 잘 뿐 심정적인 괴로움의 찌꺼기를 다 씻어내지 못한 까닭인지 승구는 시들시들 얼굴에 노란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과 아내의 성 불감증과 의학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얼굴에 화기만 없을 뿐 신체적으로 이상한 자각 증상도 느끼지 못했고 피곤하다거나 식욕이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승구의 누렇게 뜬 얼굴이 아내가 처음 가출을 시도하게끔 만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남자들이 밖에서 딴 청하는 것 절대적으로 안에 있는 여자한테 책임 있다. 남편 공대 잘 하라고. 공연히 밤에 애태워 얼굴에 황달 들게 만들지 말아!"
"어머니가 의사예요?  그이가 얼굴 색 안 좋은 게 어째서 제 탓이란 말입니까?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괜히 사람을 병신 만들어..... 아유 무식한 사람은 ....."
  돌아서면서 중얼거린 아내의 무식하다는 말이 어머니의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렸다. 어머니는 배우지 못한 점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콤플랙스를 갖고 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그녀는 노인들이 왕년에 자기들 나온 학벌들을 자랑할 때 제일 못 견뎌했다. 원래 외양이 단아하고 교양 있어 보여 누구나 옛날 여학교 정돈 나왔으려니  생각해주는 게 더 그녀를 괴롭혔다. 그래서 전부터 자식들이 다른 문제는 흠 잡아도 어머니 교육에 대해선 일체 언급을 피해왔다. 그런걸 가뜩이나 보기 싫은 며느리가 건들었으니.
"그래, 난 무식하다. 많이 배워 유식한 넌 나보다 나은 게 뭐가 있니?"
  어머니는 뒤돌아서는 아내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그리곤 옆에 있는 의자 위로 밀쳤다. 그래도 젊은 아내는 넘어가지 않고 버티고 서있는 다리만 후들후들 떨었다. 뜨거운 눈물이 볼 위를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슬퍼서 우는 건지 억울해서 우는 건지 그녀 자신도 몰랐다. 어쨌든 아내는 그 일로 집을 나가 친정이 있는 시애틀로 갔다.
  얼마 후에 그녀가 보낸 편지로 승구가 어머니에게 자기들 부부끼리의 잠자리 상황까지 고해 받치는 남편으로 오해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나 그녀가 간절히 어머니와 헤어져 살고 싶은 가도 적고 있었다. 그렇지만 승구로선 아버지까지 여윈 어머니를 따로 살라고 할 수도 없었고, 맏아들인 자신 형편에 다른 자식이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는데 돌아가면서 어머니를 모시자는 말은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아내가 기뻐할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못한 채 그녀는 친정에서 한 달을 보냈다.
  아내가 없는 동안 어머니는 신이 나서 집안 일을 돌봤다. 네가 없으면 내가 이쯤의 가사일 못할 것 같으냐는 식으로 곳곳마다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았고, 애들 돌봄도 철저히 했다. 엄마를 못 떨어져하는 어린 나이의 애들도 아니라 식사 문제나 잘 보살피면 집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오리려 아내가 있을 때 보다 겉으로 보기엔 더 평화로웠다.
  승구와 사무실에 있는 줄 리가 각별한 사이로 발전한 기회가 생긴 때도 아내가 친정에 가 있는 동안이었다. 그의 사무실엔 직원이래야 세 명뿐이었다. 줄리가 리셉숀 겸 비서직을
담당했고, 옆방에 65세가 넘은 일본인 할아버지가 승구를 도와 자질구레한 업무를 거들었다. 그는 자국에서 회계사였던 경력이 있지만 이곳에서 면허가 없으므로 최저임금보다 약간 더 받고 승구와 5년째 함께 일해오던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뇌졸증을 일으키는 바람에
승구와 줄리만이 사무실에 남게됐다.
  근래엔 컴퓨터가 몇 사람이 감당할 양의 일을 다 해내기 때문에 실상 그 영감의 자리를 채울 사람을 구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다. 승구가 조금 더 귀찮은 일까지 하면 되니까. 곤란한 게 있다면 1500 스퀘어 피트의 넓은 사무실 안에 딱 둘 이만 있게 된 점이다. 그것도 여자와 남자가.
  줄리도 결혼한 여자다. 남편은 화가라는데 그림만 열심히 그렸지, 자기 작품을 상품화하는 기술이라든가 처세에 능하질 못해 벌이가 신통치 않은 편이었다. 그들에겐 두 살 난 딸 하나가 있다. 가끔 그 애 때문에 줄 리가 결근하는, 그녀의 말에 의하면 깨물고 싶도록 예쁘다는 딸이다.
  아내가 집을 나간 지 열흘쯤 지나서였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승구가 느끼는 허전함은 날로 더 심해갔다. 갈 곳이 없는 사람에게 해질녘, 땅거미 지는 어스름은 얼마나 커다란 공허감을 몰고 오는지 모른다. 오늘 저녁 시간은 누구와 함께 메울 것인가 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 날은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오후였다.
  줄리는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대기실의 탁자 위에 잡지와 신문들을 한 곳으로 몰았다. 핸드백에서 콤팩을 꺼내 얼굴 손질을 하려는 찰나였다. 의식적으로 보려고 쳐다본 게 아닌데, 승구도 우연히 파일을 서류함에 넣다가 물끄러미 본 것이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가 줄리의 눈을 보았을 때 거기엔 분명 당황해 하는 빛이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서로 끌려서 만난 부딪침이었다. 왜 그 때 그녀의 눈이 뭔가 강렬하게 열망하고 있다고 느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줄리를 사무실 직원으로만 봤지, 한 번도 매혹적으로 아니 여성으로 느껴 본 적도 없었다. 그 순간은 전혀 조절할 수 없을 만큼 불같은 욕정이 치솟았다. 몇 달간이나 여자 곁을 가보지 못한 남자로서의 정염이 활활 타오를 뿐이었다. '보스가 여직원을 겁탈했다. 유부녀를 탐했다.'는 등의 질타를 받을 걱정은 차후 문제였다.
  이럴 수가. 줄리는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가 만난 듯이 그의 애무를 받아드리고 즐겼다. 그녀는 겉보기와는 달랐다. 옷을 입었을 때는 마른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붙어야 할 곳에 적당히 살이 붙은 부드러운 촉감의 여자였다. 통통하고 아름다운 젖가슴을 지녔다. 둔부의 선도 황홀할 정도였고 역시 젊은 여자다운 탄력을 지닌 그야말로 성적인 매력을 다 갖춘 여자였다.
  그 때부터 두 사람은 상사와 여직원이면서 동시에 섹스 파트너로 되었다. 승구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이를 낳은 후 정관 절제 수술을 했으므로 여자를 임신시킬 우려도 없었다. 그들의 정사는 주로 점심 시간에 이뤄졌기에 비밀이 샐까 염려도 하지 않았다. 승구는 지금껏 맛보지 못한 행복감과 쾌감을 그녀와 나눴다. 그녀도 승구 못지 않게 즐기는 눈치여서 며칠이 지나도록 그가 아무런 싸인을 주지 않으면 오히려 그 쪽에서 원했다.
  결국 아내의 처음 가출은 그녀 스스로가 백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친정 부모가 타일러 들어오게끔 했지만 그녀나 어머니는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내가 집에 돌아온 날부터 손 딱 걷어붙이고 도와주지 않았으며 틈만 나면 잔소리를 해댔다. 며느리를 그토록 보기 싫어하면서도 딸네 집엘 간다거나 노인 아파트로 이사 나갈 생각은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건강한 편이라 용기만 내면 얼마든지 따로 날 수 있을 텐데 어머니는 꼭 자신이 있을 자리에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집에 돌아오긴 했으나 그녀의 건강상태는 더 나빠졌다. 전부터 앓아오던 위궤양 증세는 여전해서 잘 먹지도 못할 뿐 아니라 소화도 못 시켰다. 몸이 자꾸 마르고 얼굴엔 기미까지 낀 아내가 참 딱했다. 승구는 줄리와의 관계로 도둑이 제 발 저린 다고 저녁에는 전과 달리 일찍이 집에 들어왔다.
"당신 퇴근시간이 일러졌어요. 커스터머가 없는 것 아니에요?"
"그런 건 아니고 당신 몸이 안 좋으니 내가 걱정이 돼서....."
  어쩐지 찔리는 구석이 있어 아내를 떳떳하게 쳐다보고 얘기는 못 했으나 전혀 맘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내가 닥터로부터 위궤양 중증에 우울증까지 겹쳤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승구도 어떻게 하든 어머니를 따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생각뿐 그는 직접 어머니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승희를 시켜 노인 아파트로 나가실 의향이 없는지 운을 떼보라고 일렀다.
"내가 미쳤냐? 의젓한 맏아들 네 놔두고 창피하게 노인 아파트엔 왜 들어가? 난 못해."
  어머니의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내와 승구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감한 심정이 됐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떠 밀려서 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온 식구가 주말에 저녁 식사하러 약 2시간 가량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그 짧은 동안에 도둑이 들었다. 아래층에서 오디오 시스템을 비롯해 이층 침실에 있는 아내의 보석들을 모조리 갖고 달아났다. 심지어 그녀의 결혼 반지와 시계도 잃어버린 물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내도 애들도 쑥밭처럼 변해버린 집안에서 넋을 놓고 아연실색해 있는데 어머니는 어디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하고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혹시 노인네가 놀라서 어느 구석에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앞뜰 뒤뜰 다 돌아보고 차고에까지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방에 가 보았더니 옷장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게 아닌가.
"어머니, 거기서 뭐 하세요?"
"얘, 나는 살았다. 여기 숨겨놓은 현찰 5천불은 손도 안 댔구나. 하느님이 도우셨지. 맘을 곱게 써야지. 이런 운도 따르는 법이야."
"참 다행입니다. 하지만 현금을 이렇게 집에 놔두면 위험해요. 앞으로는 은행에 예금하도록 하세요. 애들 엄마의 물건은 많이 없어졌어요. 결혼 패물까지 말입니다."
  승구의 뒤에서 얼굴이 파리해 덜덜 떨고 있는 아내에게 어머니는 약을 올리듯 음성을 가시 돋쳐 말했다.
" 결혼반지 시계는 차고 다녀야지. 귀히 여기지 않는 물건 잃어버려 싸지 싸."
"어머니, 그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승구가 신경질 섞인 투로 말을 하고 방밖으로 나오려는 순간에 아내는 마른 잎사귀 떨어지듯이 앞으로 푹 쓰러졌다. 그녀를 들어올리자 그 자리에 한 움큼의 검붉은 자국이 보였다. 피를 토한 것이다. 도둑 맞은 날 구급차를 부르고 주치의로부터 아내는 절대 안정을 필요로 하는 심정적인 위안이 요구된다고 처방을 받았다.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고부간의 갈등을 제거하지 않으면 정신 장해까지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다급히 선고를 했다. 승구가 해결하지 못한다면 의사로서 어머니를 설득시킬 용의가 있다는 말까지 한 것이다.
  어머니는 결국 시에서 운영하는 노인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승구는 새 티브이를 비롯해 가구 일절 장만해 그녀를 이사시켰지만, 며느리가 피까지 토하면서 당신과 살 수 없다는 뜻을 표했다면 '독한 것, 지독한 인간.'이란 말을 되씹었다.
  아내가 애타게 부르짖던 '우리끼리 사는 날'이 주어졌건만, 그녀는 좀처럼 전의 건강을 되찾지 못했다. 식사 후에 소화를 못 시키는 것은 여전했고, 밤에 잠까지 이루지 못해 괴로워했다. 한 달에 한, 두 번은 심하게 우울증 증세도 나타났으며 애들한테 이유 없는 신경질이나 화풀이를 해놓고는 금새 후회가 되어 어린애처럼 징징 울기도 했다.
  남편이 들어올 시간에 땅을 파고 꽃을 심는다는 엉뚱한 짓으로 저녁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애들을 데리러 갈 시간을 까맣게 잊고 있어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애들도 엄마를 이상하게 여기다 못해 이제는 아주 신용조차 않는 것이다. 가정의 기능 면에서 볼 때 완전히 마비 상태였다.

"다섯 신데 퇴근 안 하세요?"   승구의 방을 향해 줄리는 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와 봐요. 줄리."
"빨리 어머니 모시러 가야 하잖아요?" 모습은 보이지 않고 계속 목소리만 보낸다.
"글세 오라니까." 그는 약간 어조를 높였다.
   가까이 다가온 줄리에게 그는 자기의 무릎을 치며 어린애한테 손짓하듯 앉을 것을 권했다. 목직한 무게가 그의 하반신을 눌렀다. 양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내일이 우리 만나는 날이지?"
"..................." 줄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곤 몸을 빼려는 듯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어서 가 보세요. 너무 늦어지기 전에."
"가만있어. 이대로 조금만 더 있게 해줘."

  이름대로 로즈힐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장미가 평원을 이룬다. 장미꽃 향이 차 속까지 들어와 승구의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봉분들이 없는 이곳 묘지들은 평화로운 녹색의 완만한 언덕이다. 4월의 잔디, 야들야들 한 연두색 풀들이 풋풋한 풀 내를 산들거리는 바람에 실어 나무들과 꽃들이 한층 더 싱싱했다. 뭉게뭉게 구름 조각이 투명한 하늘에서 노닐다 저물어 가는 석양 놀에 붉게 물들었다. 이곳 하늘에선 보기 드문 구름들이다.
  아버지가 묻힌 썬벨리 길로 차를 돌리자 차도에서 얼마 머지 않은 곳에 흰 원피스를 입은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묘비 위를 열심히 닦고 있다. 그러다가 기도를 하는지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아들은 어머니의 그런 기분을 깨고싶지 않아 그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차를 세우고 잠시 기다렸다.
"어머니, 이제 그만 가시죠." 그제야 머리를 들어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구, 니가 왔냐? 승희가 안 오고?"
"제게 전화해서 부탁했어요. 좀 바쁘다나요."
"그래? 너도 시간 없을 텐데... 요즘 바쁜 철 아니냐?"
"아무리 바빠도 집엔 가야죠. 자, 가십시다."
"그러자꾸나. 너희 아버진 좋겠다. 이런 저런 꼴 안보고 저렇게 편히 땅속에 누웠으니..."
  어머니는 말끝을 흐리면서 다시 한 번 시선을 묘비 위에 떨구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머니나 저나 먼저 가고 좀 뒤에 갈 뿐 언제고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닙니까? 참 애들 엄마 오늘 친정에 갔습니다."
"또 갔어? 그럼, 내가 집안 일 좀 거들어주랴?"
"괜찮습니다."
  아들은 좁다란 어머니의 어깨 위로 다정히 손을 얹었다.
  어스름 녘 로즈 힐을 내려오는 차 속에서 어머니는 차가운 며느리의 눈빛을 떠올렸고, 승구는 줄리와의 달콤한 입맞춤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넘어야 할 그 후의 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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