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려면 미리 내 허락을 받으세요
2006.04.06 21:58
아프려면 미리 내 허락을 받으세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중) 배윤숙
촛불이 춤을 춘다. 초가 녹아 고인 곳에 불꽃이 닿았는지 타다닥거리는 소리가 늦은 밤 고요를 깨뜨린다. 고여있던 촛물이 기둥을 타고 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린다. 십자가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며 지그시 감은 내 두 눈에서도 주르륵 눈물이 흘러 뺨을 적시고 마음을 적신다. 검게 타버린 심지가 무게를 못 이기고 허리를 푹 숙이는가 했더니 그을음이 불꽃과 함께 하늘로 향한다. 십자 성호를 긋고 기도가 하늘에 닿기를 바라며 가만히 입김으로 불꽃을 잠재운다.
남편이 꼭 한 달 동안 감기로 고생을 했다. 서른 해가 넘는 교직생활이지만 해마다 신학기가 되면 남편 때문에 나도 덩달아 긴장하고 겁이 난다. 긴 겨울방학 생활의 여유에서 벗어난 긴장 탓인지 아니면 유별나게 봄을 타는 탓인지 해마다 남편은 곤욕을 치른다. 어느 해는 산모의 진통만큼이나 아프다는 요도결석으로 인한 통증으로 온 방안을 기어 다녔고, 어느 해는 잘 넘어가는가 싶다가도 슬그머니 감기를 끌어안기도 했다.
"올해는 그냥 넘어갑시다!" 오죽하면 내가 미리 못을 박을까. 그런데 올해는 다른 해와는 달리 감기와 진한 연애라도 하는 듯이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고 한 달을 넘긴 것이다. 동네 주치의 L선생님이 진료하는 병원에서 혈액검사니 X레이 검사니 하면서 공무원 건강검진처럼 별별 검사 다 받았으나 아무 이상이 없었다. 시름시름 앓던 남편은 온몸의 기력이 떨어지고 급기야 서울서 내려오는 딸들이 못 알아볼 만큼 마르는 것이 아닌가.
펄펄 끓는 듯한 방안에서도 오한에 떠는 남편은 온탕에서 냉탕으로 다시 온탕에서 냉탕으로 번갈아 오가며 목욕을 한 듯했고, 온 몸에서 흘린 식은 땀 때문에 탈수증세까지 나타나기에 조르고 졸라서 링거를 맞게 했다. 약을 먹던, 또 먹지 않던 시간이 지나야 낫는 감기라지만 피로에 지치고 약에 취해 힘들어하는 남편을 바라보기 가슴아파 나는 옆으로 누워 베갯잇을 적셨다.
평소 당뇨수치가 정상보다 조금 웃도는 만큼, 남편은 원래 과식이나 과음을 하지 않고 음식을 조심하는 편이다. 해서 건강관리다 뭐다 필요를 별로 못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나 역시 까다롭지 않은 남편의 식성을 나 편한 대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컸다. 기력을 회복시키고자 장어를 푹 고아 마시게 하려고 한약 건재상에 다녀왔다. 꽉 끌어안은 감기가 숨이 막혀 완전히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며 커다란 찜통을 미리 꺼내놓았다. 만반의 준비를 한 셈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 이튿날인 지난 일요일,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곳을 또 가보고 싶다는 남편의 얘기를 듣고 무작정 차를 몰았다. 운전하는 내 옆에서 힘없이 차창 밖에 시선을 꽂고는 봄을 얘기하는 남편을 보노라니 또 눈물이 핑 돌았다. 몇 년 전, 내 몸 속에 작은 근종이 생겨 수술하였을 때 수척해진 나를 남편이 애틋하게 여겼던 것을 생각하니 이래서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 중에서 ‘눈물이 날만큼’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아직 이른 탓인지 길가의 매화나무에는 한두 송이씩 매달린 듯 피어 있었고 저만치 보이는 야트막한 산에는 꽃이 만발하려면 한 주일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돌아오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쑥이랑 냉이를 찾았다. 꽃이 피어버린 냉이를 캐어 흙이 묻은 뿌리를 코에 대고 흠흠 거리며 냄새를 맡는 사이에 쑥이 담긴 봉지를 바람이 휙- 낚아채 옆의 논으로 떨어뜨렸다.
"바람이 차가우니까 차에 들어가 계세요." 그렇지만 남편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냉이를 찾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오늘 저녁은 냉이 국을 끓일까요?" 내가 보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의 수척한 모습을 보자 또 내 가슴이 아렸다.
원래 마르고 작은 체구의 남편이지만 학교에서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보다 더 많이 뛰곤 했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만큼 건강관리도 잘 하는 편이었는데 감기를 지독하게 앓게 되면서 건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아기들은 크느라고 아프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아프고 나면 젖살이 빠지면서 재롱이 늘고 예쁜 짓을 하지만 나이가 들어 아프면 더 늙을 일밖에 없단다. 병원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지만 감기가 낫는 것과 동시에 작심삼일이 되곤 하지 않던가.
매년 몇 차례씩 열애하듯 하던 감기를 영영 결별한 내가 함께 운동(태극권)을 하자고 하면 당신이나 하라며 싫단다. 젊어서는 모르겠더니 나이가 들면서 남편의 고집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학교에서 동료교사들과 함께 점심식사 후에 열심히 탁구를 치는 것과 가끔 나와 함께 건지산에 오르던 것이 남편이 하는 유일한 운동이었다. 이제 다시 함께 운동을 하자고하면 또 무어라고 할까.
신학기 새 기분으로 새 양복을 장만했지만 포대(布袋)를 둘러쓴 것처럼 모습이 엉성했다. 옷 속에 파묻힌 듯하던 남편이 조금씩 회복되자 새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남편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혈색도 발그레해졌으니 감사한 일이다.
"다시 아프면 안 되는 것 알지요? 이젠 아프려면 나한테 허락 받고 아파야 돼요."
"응. 당신한테 꼭 허락을 받을게."
귤을 한 조각 건네고 살짝 눈을 흘기며 말하니 남편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2006. 4. 7.)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중) 배윤숙
촛불이 춤을 춘다. 초가 녹아 고인 곳에 불꽃이 닿았는지 타다닥거리는 소리가 늦은 밤 고요를 깨뜨린다. 고여있던 촛물이 기둥을 타고 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린다. 십자가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며 지그시 감은 내 두 눈에서도 주르륵 눈물이 흘러 뺨을 적시고 마음을 적신다. 검게 타버린 심지가 무게를 못 이기고 허리를 푹 숙이는가 했더니 그을음이 불꽃과 함께 하늘로 향한다. 십자 성호를 긋고 기도가 하늘에 닿기를 바라며 가만히 입김으로 불꽃을 잠재운다.
남편이 꼭 한 달 동안 감기로 고생을 했다. 서른 해가 넘는 교직생활이지만 해마다 신학기가 되면 남편 때문에 나도 덩달아 긴장하고 겁이 난다. 긴 겨울방학 생활의 여유에서 벗어난 긴장 탓인지 아니면 유별나게 봄을 타는 탓인지 해마다 남편은 곤욕을 치른다. 어느 해는 산모의 진통만큼이나 아프다는 요도결석으로 인한 통증으로 온 방안을 기어 다녔고, 어느 해는 잘 넘어가는가 싶다가도 슬그머니 감기를 끌어안기도 했다.
"올해는 그냥 넘어갑시다!" 오죽하면 내가 미리 못을 박을까. 그런데 올해는 다른 해와는 달리 감기와 진한 연애라도 하는 듯이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고 한 달을 넘긴 것이다. 동네 주치의 L선생님이 진료하는 병원에서 혈액검사니 X레이 검사니 하면서 공무원 건강검진처럼 별별 검사 다 받았으나 아무 이상이 없었다. 시름시름 앓던 남편은 온몸의 기력이 떨어지고 급기야 서울서 내려오는 딸들이 못 알아볼 만큼 마르는 것이 아닌가.
펄펄 끓는 듯한 방안에서도 오한에 떠는 남편은 온탕에서 냉탕으로 다시 온탕에서 냉탕으로 번갈아 오가며 목욕을 한 듯했고, 온 몸에서 흘린 식은 땀 때문에 탈수증세까지 나타나기에 조르고 졸라서 링거를 맞게 했다. 약을 먹던, 또 먹지 않던 시간이 지나야 낫는 감기라지만 피로에 지치고 약에 취해 힘들어하는 남편을 바라보기 가슴아파 나는 옆으로 누워 베갯잇을 적셨다.
평소 당뇨수치가 정상보다 조금 웃도는 만큼, 남편은 원래 과식이나 과음을 하지 않고 음식을 조심하는 편이다. 해서 건강관리다 뭐다 필요를 별로 못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나 역시 까다롭지 않은 남편의 식성을 나 편한 대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컸다. 기력을 회복시키고자 장어를 푹 고아 마시게 하려고 한약 건재상에 다녀왔다. 꽉 끌어안은 감기가 숨이 막혀 완전히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며 커다란 찜통을 미리 꺼내놓았다. 만반의 준비를 한 셈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 이튿날인 지난 일요일,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곳을 또 가보고 싶다는 남편의 얘기를 듣고 무작정 차를 몰았다. 운전하는 내 옆에서 힘없이 차창 밖에 시선을 꽂고는 봄을 얘기하는 남편을 보노라니 또 눈물이 핑 돌았다. 몇 년 전, 내 몸 속에 작은 근종이 생겨 수술하였을 때 수척해진 나를 남편이 애틋하게 여겼던 것을 생각하니 이래서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 중에서 ‘눈물이 날만큼’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아직 이른 탓인지 길가의 매화나무에는 한두 송이씩 매달린 듯 피어 있었고 저만치 보이는 야트막한 산에는 꽃이 만발하려면 한 주일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돌아오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쑥이랑 냉이를 찾았다. 꽃이 피어버린 냉이를 캐어 흙이 묻은 뿌리를 코에 대고 흠흠 거리며 냄새를 맡는 사이에 쑥이 담긴 봉지를 바람이 휙- 낚아채 옆의 논으로 떨어뜨렸다.
"바람이 차가우니까 차에 들어가 계세요." 그렇지만 남편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냉이를 찾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오늘 저녁은 냉이 국을 끓일까요?" 내가 보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의 수척한 모습을 보자 또 내 가슴이 아렸다.
원래 마르고 작은 체구의 남편이지만 학교에서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보다 더 많이 뛰곤 했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만큼 건강관리도 잘 하는 편이었는데 감기를 지독하게 앓게 되면서 건강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아기들은 크느라고 아프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아프고 나면 젖살이 빠지면서 재롱이 늘고 예쁜 짓을 하지만 나이가 들어 아프면 더 늙을 일밖에 없단다. 병원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지만 감기가 낫는 것과 동시에 작심삼일이 되곤 하지 않던가.
매년 몇 차례씩 열애하듯 하던 감기를 영영 결별한 내가 함께 운동(태극권)을 하자고 하면 당신이나 하라며 싫단다. 젊어서는 모르겠더니 나이가 들면서 남편의 고집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학교에서 동료교사들과 함께 점심식사 후에 열심히 탁구를 치는 것과 가끔 나와 함께 건지산에 오르던 것이 남편이 하는 유일한 운동이었다. 이제 다시 함께 운동을 하자고하면 또 무어라고 할까.
신학기 새 기분으로 새 양복을 장만했지만 포대(布袋)를 둘러쓴 것처럼 모습이 엉성했다. 옷 속에 파묻힌 듯하던 남편이 조금씩 회복되자 새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 남편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혈색도 발그레해졌으니 감사한 일이다.
"다시 아프면 안 되는 것 알지요? 이젠 아프려면 나한테 허락 받고 아파야 돼요."
"응. 당신한테 꼭 허락을 받을게."
귤을 한 조각 건네고 살짝 눈을 흘기며 말하니 남편은 빙그레 웃으면서 내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2006.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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