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연극하는 남자

2006.04.09 08:00

박정순 조회 수:65 추천:19

날마다 연극하는 남자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과정 (중) 박정순


"사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는 모두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요일 수업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교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동석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나온 말이었는지 그 기억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것이 연극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이유는 나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나도 인생이 연극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배역에 대하여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곤 했었다.


사전을 찾아보면 연극이란 배우가 무대에서 대본에 따라 동작과 대사를 통하여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되어 있다. 사실 사람들도 인생이란 무대에서 현실이라는 대본에 따라 동작과 대사를 표현하며 생활한다. 자신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인생무대에서 상황이라는 배역과 현실이라는 대본이 주어진다. 주어진 배역과 대본에 따라 연기에만 충실해야 되는 게 우리들이다. 연기하는 배우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날이라 해도 웃는 배역이 주어지면 무대 위에서 웃어야 한다. 웃어도 어설프게 웃는 시늉만 해서는 안 된다. 연기일수록 사실처럼 연기하지 않으면 현실감과 사실성이 떨어져 관객들이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 할지라도 대본에 따라 울어야 하는 것이 배우이기도 하다. 연기는 배우 자신보다 극중 주인공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대에 오르는 순간 맡겨진 배역에 충실해야 된다.

나도 오늘 하루를 연기로 시작하고 지금까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기를 하면서 살아 왔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나에게 주어진 많은 배역이 있었다. 어떤 배역은 개봉하고 하루도 안 되어 간판을 내린 영화속 주인공 같은 배역도 있었고, 어떤 배역은 처음에 주어진 배역대로 오늘까지 계속 이어진 배역도 있다. 그런가 하면 관객 천만 명 이상을 동원하여 성공한 영화의 주인공처럼 화려한 배역을 맡은 시절도 있었다. 오늘도 나는 생방송에서 연기를 한다. 영화나 녹화방송이면 잘못된 부분을 편집 할 수 있지만 내가 하는 연기 대부분은 연극 무대 위의 배우처럼 관객과 마주하고 연기를 한다. 그러다 보니 작은 실수가 방송사고로 이어져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나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런데도 별다른 긴장이나 조심성 없이 무디어진 감각으로 하루하루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하나의 연극작품으로 장기공연을 하는 어느 배우가 인터뷰를 하면서 공연횟수가 거듭될수록 연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긴장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말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장기연극공연  시 처음 몇 회 공연에서 는 배우의 실수가 있어도 관객들이 이해하고 기다린다. 그러나 회를 거듭하고 시간이 흘렀는데도 배우가 실수를 하면 연습이 부족하거나 자질이 부족, 아니면 실력이 없다고 비난할 것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연습을 해야 하는 연극배우에 비하면 나는 인생 연기자로서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배역이든 주어지면 연습 없이 바로 연기를 시작해야 하는 현실과 달리 안일한 자세로 무대에 오른다. 날마다 비슷한 배역이 주어지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아무런 준비나 연습도 없이 인생무대에 오른다. 어제와 비슷한 수준의 관객들이 나의 연극을 보러 왔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연극을 시작한다. 관객이 어제와 다른 수준의 사람들인데도 열과 성을 다하여 배역을 소화하려고 생각하기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주어진 시간을 채운다.


가끔 연기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필요를 느끼지만 다음날이면 어제와 똑같은 모습과 생각으로 인생무대에 오르고 만다. 그렇게 안일한 자세로 인생 무대에서 연기를 하다가 싸늘한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고 당황한 때도 있다. 하지만 깨닫고 반성하기보다는 변명과 책임전가에 급급했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그 배역의 적임자인 자신을 몰라보는 관객들의 수준이 함량미달이라고 억지를 부린 적도 있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연륜이 쌓이고 경험이 많을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집과 욕심만 키운다. 어떤 배역을 오래 연기하다 보면 이미지가 고정되고 마음이나 생각까지도 배역을 닮게 된다. 자신이 극중 인물인 것 같은 착각으로 주변의 비평이나 충고를 무시한다. 자신이 그 배역에는 가장 적임자이고 그 배역을 제일 잘 소화할 사람이라는 자만심으로 주변의 변화를 깨닫지 못한다. 주변의 충고도 무시하고 변화도 깨닫지 못하다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뒤에야 현실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실패가 확인된 뒤에도 겸허한 자세로 현실을 받아드리기 보다는 운이 없었다거나 환경을 탓하며 실패의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주어진 배역이 있다. 가정에서 맡겨진 배역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속한 조직 또는 나이에 따라 주어진 배역이 있다. 그렇게 주어진 배역에는 연기해야할 대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대본만 주어진다. 현실이라는 대본은 즉흥연기(Ad Lib)를 해야 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즉흥연기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연기에 대해서 기본적인 바탕이나 철학이 없으면 즉흥 연기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인생 무대에서 주어진 배역에 따라 현실이라는 대본대로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누구나 자신의 배역에 100%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받는 출연료가 너무 적다는 불평과, 경쟁자보다 비중이 약한 배역을 맡은 것을 불평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배우 개인의 불평은 객석의 관객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로지 인생무대에서 현실이라는 대본에 따라 연기에 몰입하며 최선을 다하는 배우만을 관객들은 좋아한다. 배우들도 그렇게 최선을 다하여 연기하다 보면 연극을 마무리해야 될 시점에 이른다. 자신의 연기에 대하여 만족하지는 못한다 해도 인생 무대의 막이 내려질 때 후회와 아쉬움만 남는 어리석은 연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때늦은 후회를 피하려면 현실이라는 대본에 따라 연기를 할 때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인생무대의 막이 내리고 관객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할 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고 최고의 찬사라는 기립박수까지 받으며 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