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어머니와 자전거
2006.04.11 23:16
칠순 어머니와 자전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황점숙
일흔을 넘기신 어머니께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농사일을 하신다. 젊은 시절 가슴에 짠한 아픔을 갖게 했던 자전거의 페달을 밟을 때면 우리를 키우던 시절이 생각난다고
하신다. 우리 어머니의 자전거 사랑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그렇게 귀했던 자전거였는데……."
친정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베란다에서 먼지를 듬뿍 둘러쓰고 서있는 중형자전거를 보시더니 혼잣말을 하셨다. 아이들의 손때가 묻은 자전거라 얼른 치워버리지 못하고 좁은 베란다를 더 답답하게 만드는 나를 책망하시는 것 같이 들렸다. 나는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우리 집으로 가져갈 수만 있으면 내가 탔으면 좋겠다."
딸네 집에 오실 때 이것저것 담아 오신 빈 통이나 빈 가방처럼 둘둘 말아 보따리에 싸서 가져갈 수 있으면 금방이라도 당신 손으로 옮겨가고 싶으신 것 같았다.
그 날 저녁 내 말을 듣고 있던 남편은 자전거를 옮겨 드리자고 했다. 며칠 뒤 자전거를 친정으로 실어다 드렸다. 자전거를 타보신 경험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남원 시내에서
보조바퀴를 달아 네발자전거를 만들어 타기 시작하셨다. 평생을 걸어서 논밭으로 다니셨던 어머니는 새로운 경험이 신기한 듯 흐뭇해하시며 우리가 어렸을 때 자전거에 책가방을 실어 보내고 애태웠던 추억을 더듬으셨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오빠는 이십 리 떨어진 읍내 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산간 오지라 버스도 드물어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자전거였다.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시절 농촌살림인지라, 등록금에 교복 값까지 근심이 컸던 부모님께 큰집에서 오빠 중학교 입학선물로 중고자전거를 사주셨다. 덕분에 한시름 덜게 된 부모님께서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그 고마움을 떠올리곤 하신다.
중학생이 된 오빠는 매일 아침 자전거에 책가방을 싣고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 장거리를 달려온 오빠는 아무리 피곤해도 기름걸레로 자전거바퀴의 테두리와 살대까지 새것처럼 반짝 반짝 윤이 나게 닦아야 했다. 잘 닦은 자전거는 창고에 넣어 열쇠까지 잠가서 보관해야만 아버지의 불호령을 피할 수 있었다.
날마다 새벽이면 일어나서 밥을 지어 오빠 도시락을 쌌던 어머니께서 어느 날 동창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늦잠을 주무시고 말았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서둘러 오빠를 깨워 도시락도 없이 학교를 보내야 했다. 그 날 저녁 학교를 다녀온 오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다, 다른 날보다 늦었던 오빠는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아 학교 앞 모퉁이를 휙 도는데 속도를 이기지 못한 채 넘어지고 말았다. 등교하는 여학생 무리를 의식하고, 창피해서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도망치듯 달렸다. 잠시 뒤 교문을 통과하려던 차에 허전함이 느껴졌고, 그 순간 손목시계가 없어진 걸 알았다.
아버지께서 애지중지하시던 우리 집 유일의 시계였다. 매일 아침 시간을 물으면 대답해야 하는 귀중한 시계를 포기할 수 없어서 되돌아와 열심히 찾았지만 시계는 보이지 않았단다. 서랍 속에 넣어 두고 아끼던 시계를 오빠 손목에 채워 주자고 주장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다. 이 사실을 아신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 밤잠을 설치셨다. 이튿날 빈틈없으셨던 아버지의 시간을 묻는 의식은 진행되었고 금방 시계를 잃어버린 것이 탄로 나고 말았다. 오빠의 실수를 그냥 넘기지 않고 아들을 털팩이라며 심하게 꾸짖으셨다.
2년 뒤 나는 중학생이 되어 읍내에서 친구들과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 동안에 친구들이 자전거를 배우는 붐이 일었다. 겨울방학이 끝나면 어설픈 자취방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통학을 하자며 너도나도 자전거를 배우게 되었다.
그 해 오빠의 중고자전거를 새것으로 바꿔 창고에 넣어 뒀는데, 아버지 몰래 꺼내다 자전거 타는 연습을 했다. 가까스로 자전거 타기에 익숙해질 때쯤 방학이 끝났고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한 채 익숙하지 않은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시도했다. 우리 마을에서 읍내를 가려면 피할 수 없는 '수덕지고개'를 통과해야 했다. 60도쯤 되는 경사진 고갯길을 내려가다가 브레이크 조작이 미숙하여 속도를 이기지 못한 자전거는 그때 하필 패어있던 웅덩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난 자갈과 모래투성인 신작로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얼굴은 화끈거렸고 개울물로 가서 피투성인 얼굴을 씻었는데 앞니가 부러져 버렸다.
그 날의 자전거 사고는, 타고 가는 걸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잘못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불호령을 참아 내느라 속이 상하신 어머니께서는 손아래 여동생들은 자전거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엄명을 내리셨다. 오늘날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는 여동생들이 그때엔 자전거조차 배우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는 아픈 추억을 담고 있는 자전거를 어머니는 고희를 넘기고서 타시게 되었다. 이제는 보조바퀴마저 떼어 내고 두발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농로를 오가신다. 평생을 새로운 문화에 남보다 먼저 편승하지 못하는 어머니께서는 요즘 두발 자전거의 고마움에 듬뿍 젖어 사신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인 셈이다.(2006. 4. 10.)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황점숙
일흔을 넘기신 어머니께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농사일을 하신다. 젊은 시절 가슴에 짠한 아픔을 갖게 했던 자전거의 페달을 밟을 때면 우리를 키우던 시절이 생각난다고
하신다. 우리 어머니의 자전거 사랑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그렇게 귀했던 자전거였는데……."
친정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베란다에서 먼지를 듬뿍 둘러쓰고 서있는 중형자전거를 보시더니 혼잣말을 하셨다. 아이들의 손때가 묻은 자전거라 얼른 치워버리지 못하고 좁은 베란다를 더 답답하게 만드는 나를 책망하시는 것 같이 들렸다. 나는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우리 집으로 가져갈 수만 있으면 내가 탔으면 좋겠다."
딸네 집에 오실 때 이것저것 담아 오신 빈 통이나 빈 가방처럼 둘둘 말아 보따리에 싸서 가져갈 수 있으면 금방이라도 당신 손으로 옮겨가고 싶으신 것 같았다.
그 날 저녁 내 말을 듣고 있던 남편은 자전거를 옮겨 드리자고 했다. 며칠 뒤 자전거를 친정으로 실어다 드렸다. 자전거를 타보신 경험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남원 시내에서
보조바퀴를 달아 네발자전거를 만들어 타기 시작하셨다. 평생을 걸어서 논밭으로 다니셨던 어머니는 새로운 경험이 신기한 듯 흐뭇해하시며 우리가 어렸을 때 자전거에 책가방을 실어 보내고 애태웠던 추억을 더듬으셨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오빠는 이십 리 떨어진 읍내 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산간 오지라 버스도 드물어 제일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자전거였다.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시절 농촌살림인지라, 등록금에 교복 값까지 근심이 컸던 부모님께 큰집에서 오빠 중학교 입학선물로 중고자전거를 사주셨다. 덕분에 한시름 덜게 된 부모님께서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그 고마움을 떠올리곤 하신다.
중학생이 된 오빠는 매일 아침 자전거에 책가방을 싣고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학교를 마치고 장거리를 달려온 오빠는 아무리 피곤해도 기름걸레로 자전거바퀴의 테두리와 살대까지 새것처럼 반짝 반짝 윤이 나게 닦아야 했다. 잘 닦은 자전거는 창고에 넣어 열쇠까지 잠가서 보관해야만 아버지의 불호령을 피할 수 있었다.
날마다 새벽이면 일어나서 밥을 지어 오빠 도시락을 쌌던 어머니께서 어느 날 동창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늦잠을 주무시고 말았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서둘러 오빠를 깨워 도시락도 없이 학교를 보내야 했다. 그 날 저녁 학교를 다녀온 오빠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다, 다른 날보다 늦었던 오빠는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페달을 밟아 학교 앞 모퉁이를 휙 도는데 속도를 이기지 못한 채 넘어지고 말았다. 등교하는 여학생 무리를 의식하고, 창피해서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도망치듯 달렸다. 잠시 뒤 교문을 통과하려던 차에 허전함이 느껴졌고, 그 순간 손목시계가 없어진 걸 알았다.
아버지께서 애지중지하시던 우리 집 유일의 시계였다. 매일 아침 시간을 물으면 대답해야 하는 귀중한 시계를 포기할 수 없어서 되돌아와 열심히 찾았지만 시계는 보이지 않았단다. 서랍 속에 넣어 두고 아끼던 시계를 오빠 손목에 채워 주자고 주장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다. 이 사실을 아신 어머니는 걱정이 되어 밤잠을 설치셨다. 이튿날 빈틈없으셨던 아버지의 시간을 묻는 의식은 진행되었고 금방 시계를 잃어버린 것이 탄로 나고 말았다. 오빠의 실수를 그냥 넘기지 않고 아들을 털팩이라며 심하게 꾸짖으셨다.
2년 뒤 나는 중학생이 되어 읍내에서 친구들과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 동안에 친구들이 자전거를 배우는 붐이 일었다. 겨울방학이 끝나면 어설픈 자취방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통학을 하자며 너도나도 자전거를 배우게 되었다.
그 해 오빠의 중고자전거를 새것으로 바꿔 창고에 넣어 뒀는데, 아버지 몰래 꺼내다 자전거 타는 연습을 했다. 가까스로 자전거 타기에 익숙해질 때쯤 방학이 끝났고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한 채 익숙하지 않은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시도했다. 우리 마을에서 읍내를 가려면 피할 수 없는 '수덕지고개'를 통과해야 했다. 60도쯤 되는 경사진 고갯길을 내려가다가 브레이크 조작이 미숙하여 속도를 이기지 못한 자전거는 그때 하필 패어있던 웅덩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난 자갈과 모래투성인 신작로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얼굴은 화끈거렸고 개울물로 가서 피투성인 얼굴을 씻었는데 앞니가 부러져 버렸다.
그 날의 자전거 사고는, 타고 가는 걸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잘못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의 불호령을 참아 내느라 속이 상하신 어머니께서는 손아래 여동생들은 자전거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엄명을 내리셨다. 오늘날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는 여동생들이 그때엔 자전거조차 배우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는 아픈 추억을 담고 있는 자전거를 어머니는 고희를 넘기고서 타시게 되었다. 이제는 보조바퀴마저 떼어 내고 두발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농로를 오가신다. 평생을 새로운 문화에 남보다 먼저 편승하지 못하는 어머니께서는 요즘 두발 자전거의 고마움에 듬뿍 젖어 사신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인 셈이다.(2006.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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