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북녘땅을 밟고서
2008.01.31 15:33
처음으로 북녘 땅을 밟고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요반 조규열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노래요, 꿈을 꾸는 듯한 기대가 팔딱인다.
2001년 8월 4일 새벽 4시, 금강산을 찾는 연수단의 일원이 되어 처음 북녘 땅을 밟아보며 반세기동안 단절된 북한의 산야와 동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무척이나 나를 설레게 했었다. 그것은 오래전에 남북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수십 년간이나 헤어져 살던 혈육들이 만나 부둥켜안고 울던 장면을 보며 눈물이 찡했던 드라마의 현장이기 때문일까? 1999년 여름에 처음으로 중국여행을 하면서 백두산 천지를 보았을 때의 감격과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이 더 인상적이고 감동적일까? 출발 하루 전엔 날씨는 괜찮을지 바람은 거세지 않을지 조마조마하여 마치 아이들이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잠을 설치던 기분 같았다.
2박 3일 일정으로 전주를 출발하여 강원도 동해항으로 가는 5대의 관광버스에 몸을 실은 우리 연수단의 마음은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전라북도교육청에서 각급학교 유공교원을 추천받아 통일교육과 학생지도에 도움을 주려고 방학을 이용해서 떠나는 방북여행이었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라 산골짜기마다 물 따라 그늘 따라 옹기종기 모여 발을 담그고 물장구치는 모습이 시원해 보였다. 들에는 농부들의 땀으로 무성하게 자란 벼와 밭곡식들이 일렁이는 여름햇볕을 보듬고 낮잠을 자는 듯 평화로웠다. 북쪽으로 갈수록 산수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더했고, 동해안 해수욕장에는 많은 피서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차랑 행렬로 길이 막혀 주차장인지 도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조바심이 나고 초조해서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며 투덜댔다.
“이게 주차장이야, 도로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좋다는 곳만 찾아다니며 사서 고생하는 거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형형색색의 수영복을 입고 갖가지 모습으로 즐기는 피서객들과 비치파라솔로 수를 놓고 살아 꿈틀대는 해변의 모습들, 넘실대는 바닷물과 파도를 가르는 모터보트의 질주, 짙은 녹음으로 우거진 산야의 아름다움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그 풍경 속에 내가 빠져든 것 같은 기분에 젖을 수 있었다. 분명 이번 여행은 저 많은 피서객들의 낭만이나 즐거움에서 얻을 수 없는 진한 감동과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출렁였다.
예정보다 늦은 오후 1시 반쯤에 동해항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마치고 달러로 돈을 바꾼 뒤 정박해 있던 설봉호에 몸을 실었다. 깊고 푸른 동해가 이글거리는 한낮의 무더위도 삼켜 버린 채 들뜬 승객들의 부푼 마음을 두둥실 싣고 파도를 가르면서 달리는 기분이란 육지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상쾌함과 짜릿함의 극치였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 망망대해에 이르자 연수단원들이 묵을 방을 4인1실 기준으로 배정해 주었다. 끝없이 너른 동해와 잔잔하지만 출렁이는 파도, 멀리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섬들과 어선들이 이국인 양 멀게만 느껴졌다. 남해를 떠나 제주도에 갔던 뱃길보다 훨씬 넓고 깊은 바다라는 느낌과 더 멀리 가면 중국이나 일본과도 닿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실은 2층으로 양쪽 침대여서 4명이 지내게 되는데, 망망대해를 조망할 수 있으며, 자거나 쉴 수 있고 누우면 그대로 호텔이었다. 내 생전에 유람선 선실을 숙소로 삼아 지내는 것도 처음이지만 떠다니는 호텔이란 시설 이용도 첫 경험이어서 호감이 갔다. 나는 다행히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세 분 교장들과 함께여서 마음이 놓였고, 기분 좋게 얘기를 나눌 수 있어 뜻 깊은 여행이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선실 지하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마치고 갑판 위에 올라 너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니 멀리 보일 듯 말 듯 북녘 땅을 바라보는 감회가 남달랐다. 일행은 대회의실에 모여 구명동의 착용요령과 북한지역에 들어가 관광할 때에 주의할 점을 들을 때에는 역시 낯선 곳이어서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현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후 5시경 장전항에 도착하여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북측 출입국검사소에서 명패를 확인하며 통관수속을 밟았다. 분단 48년 만에 북한 땅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건데 같은 조국이요 한 핏줄인 동포가 사는 내 나라이면서도 외국인처럼 검색을 받아야 하는 냉혹한 현실을 실감했다. 더디게 통관 절차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금강산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달리는 차안에서 보이는 북녘 땅이 낯설게 느껴져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좌우를 번갈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지만 초라해 보이는 북녘 초소병의 마네킹 같은 모습과 여기저기 들녘에서 붉은 깃발을 꽂아 놓고 집단으로 일하는 맨손 일꾼들의 몸놀림이 아픔으로 다가왔다. 농사나 공사가 모두 기계화된 우리와는 딴판으로, 땅을 파고 고르는 일이며 길을 넓히는 작업에도 삽이나 곡괭이, 리어카가 이용되고 있었다.
오후 6시경 온정각에 도착하여 밟아보는 북녘 땅! 그것은 우리 땅 우리 흙과 다름이 없었고, 주변에 보이는 산과 짙푸른 녹음 또한 우리와 같아 보였다. 그러나 큰 바위에 붉은 글씨로 새겨 놓은 구호는 역시 이질감과 이념의 장벽을 실감케 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조금 전에 지나쳐 온 곳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현대화된 시설들이어서 새롭게 느껴지는데 귀에 익은‘반갑습니다’란 가락이 울려 퍼질 때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온정각 주변에는 우리 현대아산에서 건립한 식당과 휴게실, 관광상품 전시장과 원형극장 모습의 금강산 문화회관 건물들이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어울려 북녘 땅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시설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북녘 동포들이 이곳에 와보면 얼마나 놀라고 부러워할까. 과연 몇 사람이나 다녀갔고, 그들 중 얼마나 남쪽 사람들을 부러워했을까? 문득 남북이산가족상봉단들이 만나 얼싸안고 울음바다를 이뤘던 장면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 일행은 온정리 부근을 산책하며 바라보니 싱싱한 숲과 깨끗한 계곡의 맑은 물이 내 마음마저 정화시켜 주는 느낌이 들었다. 저마다 맑고 깨끗한 공기와 상쾌한 바람에 오래 묵은 삶의 피로와 공해로 찌든 얼룩들을 씻어내려는 듯 발걸음들이 가벼워 보였다.
석양빛이 물들자 아쉬움을 간직한 채 뒤돌아 나와 8시 반쯤에 버스에 올라 다시 장전항으로 돌아와 또 입국절차를 마친 뒤 숙소인 설봉호로 돌아왔다.
내 나라 내 땅이고 같은 단군할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같은 겨레인데 꼭 외국인 대하듯 따지는 게 영 안타까울 뿐이었다.
내 조국 내 핏줄끼리이니만큼 모든 빗장과 마음속에 엉킨 한과 아픔을 풀고 한 덩어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렵게 대화의 문을 열고 협력의 물코를 텄으니 남북이 더 부강해지고 신뢰의 탑을 높이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게야 저녁을 먹고 꿈같은 긴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내일의 만물상 관광을 기대하며 뒤척이다가 늦게야 잠을 청했다.
(2008.1.26.)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요반 조규열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노래요, 꿈을 꾸는 듯한 기대가 팔딱인다.
2001년 8월 4일 새벽 4시, 금강산을 찾는 연수단의 일원이 되어 처음 북녘 땅을 밟아보며 반세기동안 단절된 북한의 산야와 동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무척이나 나를 설레게 했었다. 그것은 오래전에 남북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수십 년간이나 헤어져 살던 혈육들이 만나 부둥켜안고 울던 장면을 보며 눈물이 찡했던 드라마의 현장이기 때문일까? 1999년 여름에 처음으로 중국여행을 하면서 백두산 천지를 보았을 때의 감격과 비교해 보면 어느 쪽이 더 인상적이고 감동적일까? 출발 하루 전엔 날씨는 괜찮을지 바람은 거세지 않을지 조마조마하여 마치 아이들이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잠을 설치던 기분 같았다.
2박 3일 일정으로 전주를 출발하여 강원도 동해항으로 가는 5대의 관광버스에 몸을 실은 우리 연수단의 마음은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전라북도교육청에서 각급학교 유공교원을 추천받아 통일교육과 학생지도에 도움을 주려고 방학을 이용해서 떠나는 방북여행이었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라 산골짜기마다 물 따라 그늘 따라 옹기종기 모여 발을 담그고 물장구치는 모습이 시원해 보였다. 들에는 농부들의 땀으로 무성하게 자란 벼와 밭곡식들이 일렁이는 여름햇볕을 보듬고 낮잠을 자는 듯 평화로웠다. 북쪽으로 갈수록 산수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더했고, 동해안 해수욕장에는 많은 피서객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차랑 행렬로 길이 막혀 주차장인지 도로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조바심이 나고 초조해서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며 투덜댔다.
“이게 주차장이야, 도로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좋다는 곳만 찾아다니며 사서 고생하는 거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형형색색의 수영복을 입고 갖가지 모습으로 즐기는 피서객들과 비치파라솔로 수를 놓고 살아 꿈틀대는 해변의 모습들, 넘실대는 바닷물과 파도를 가르는 모터보트의 질주, 짙은 녹음으로 우거진 산야의 아름다움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그 풍경 속에 내가 빠져든 것 같은 기분에 젖을 수 있었다. 분명 이번 여행은 저 많은 피서객들의 낭만이나 즐거움에서 얻을 수 없는 진한 감동과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출렁였다.
예정보다 늦은 오후 1시 반쯤에 동해항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마치고 달러로 돈을 바꾼 뒤 정박해 있던 설봉호에 몸을 실었다. 깊고 푸른 동해가 이글거리는 한낮의 무더위도 삼켜 버린 채 들뜬 승객들의 부푼 마음을 두둥실 싣고 파도를 가르면서 달리는 기분이란 육지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상쾌함과 짜릿함의 극치였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 망망대해에 이르자 연수단원들이 묵을 방을 4인1실 기준으로 배정해 주었다. 끝없이 너른 동해와 잔잔하지만 출렁이는 파도, 멀리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섬들과 어선들이 이국인 양 멀게만 느껴졌다. 남해를 떠나 제주도에 갔던 뱃길보다 훨씬 넓고 깊은 바다라는 느낌과 더 멀리 가면 중국이나 일본과도 닿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실은 2층으로 양쪽 침대여서 4명이 지내게 되는데, 망망대해를 조망할 수 있으며, 자거나 쉴 수 있고 누우면 그대로 호텔이었다. 내 생전에 유람선 선실을 숙소로 삼아 지내는 것도 처음이지만 떠다니는 호텔이란 시설 이용도 첫 경험이어서 호감이 갔다. 나는 다행히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세 분 교장들과 함께여서 마음이 놓였고, 기분 좋게 얘기를 나눌 수 있어 뜻 깊은 여행이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선실 지하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마치고 갑판 위에 올라 너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니 멀리 보일 듯 말 듯 북녘 땅을 바라보는 감회가 남달랐다. 일행은 대회의실에 모여 구명동의 착용요령과 북한지역에 들어가 관광할 때에 주의할 점을 들을 때에는 역시 낯선 곳이어서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현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후 5시경 장전항에 도착하여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북측 출입국검사소에서 명패를 확인하며 통관수속을 밟았다. 분단 48년 만에 북한 땅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건데 같은 조국이요 한 핏줄인 동포가 사는 내 나라이면서도 외국인처럼 검색을 받아야 하는 냉혹한 현실을 실감했다. 더디게 통관 절차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금강산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달리는 차안에서 보이는 북녘 땅이 낯설게 느껴져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좌우를 번갈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지만 초라해 보이는 북녘 초소병의 마네킹 같은 모습과 여기저기 들녘에서 붉은 깃발을 꽂아 놓고 집단으로 일하는 맨손 일꾼들의 몸놀림이 아픔으로 다가왔다. 농사나 공사가 모두 기계화된 우리와는 딴판으로, 땅을 파고 고르는 일이며 길을 넓히는 작업에도 삽이나 곡괭이, 리어카가 이용되고 있었다.
오후 6시경 온정각에 도착하여 밟아보는 북녘 땅! 그것은 우리 땅 우리 흙과 다름이 없었고, 주변에 보이는 산과 짙푸른 녹음 또한 우리와 같아 보였다. 그러나 큰 바위에 붉은 글씨로 새겨 놓은 구호는 역시 이질감과 이념의 장벽을 실감케 하였다. 그러나 이곳은 조금 전에 지나쳐 온 곳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현대화된 시설들이어서 새롭게 느껴지는데 귀에 익은‘반갑습니다’란 가락이 울려 퍼질 때에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온정각 주변에는 우리 현대아산에서 건립한 식당과 휴게실, 관광상품 전시장과 원형극장 모습의 금강산 문화회관 건물들이 주위의 빼어난 경관과 어울려 북녘 땅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시설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북녘 동포들이 이곳에 와보면 얼마나 놀라고 부러워할까. 과연 몇 사람이나 다녀갔고, 그들 중 얼마나 남쪽 사람들을 부러워했을까? 문득 남북이산가족상봉단들이 만나 얼싸안고 울음바다를 이뤘던 장면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 일행은 온정리 부근을 산책하며 바라보니 싱싱한 숲과 깨끗한 계곡의 맑은 물이 내 마음마저 정화시켜 주는 느낌이 들었다. 저마다 맑고 깨끗한 공기와 상쾌한 바람에 오래 묵은 삶의 피로와 공해로 찌든 얼룩들을 씻어내려는 듯 발걸음들이 가벼워 보였다.
석양빛이 물들자 아쉬움을 간직한 채 뒤돌아 나와 8시 반쯤에 버스에 올라 다시 장전항으로 돌아와 또 입국절차를 마친 뒤 숙소인 설봉호로 돌아왔다.
내 나라 내 땅이고 같은 단군할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같은 겨레인데 꼭 외국인 대하듯 따지는 게 영 안타까울 뿐이었다.
내 조국 내 핏줄끼리이니만큼 모든 빗장과 마음속에 엉킨 한과 아픔을 풀고 한 덩어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렵게 대화의 문을 열고 협력의 물코를 텄으니 남북이 더 부강해지고 신뢰의 탑을 높이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게야 저녁을 먹고 꿈같은 긴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내일의 만물상 관광을 기대하며 뒤척이다가 늦게야 잠을 청했다.
(2008.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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