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잎차

2020.12.12 13:49

정성려 조회 수:23

[금요수필]뽕잎 차 정성려

기사 작성:  이종근
- 2020년 12월 10일 15시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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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싹 마른 뽕잎을 예쁜 그릇에 담아 팔팔 끓는 물을 붓는다. 잠시 기다리면 뽕잎이 부풀면서 연녹색으로 우러난다. 향기롭지는 않지만 풋풋한 향이 퍼진다. 이게 바로 뽕잎 차다. 이렇게 우린 따끈한 뽕잎 차를 호호 불어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은은한 뽕잎의 향이 입안 가득하다. 평소 녹차 종류는 즐겨 하지 않았다. 풋풋한 냄새가 싫어서였다. 그런데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뽕잎 차를 자주 마시다 보니 어느 순간 적응이 되었다. 당뇨에 좋은 것이라며 어머니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정성을 생각하며 신경 써서 챙겨 먹다보니 습관처럼 마시게 되었다. 뽕잎 차는 맛이 깔끔해서 마시고 나면 입안이 개운해서 좋다. 따끈한 뽕잎차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 어머니의 모정이 온몸에 전율로 느껴온다.

어머니께서는 이른 봄이면 뽕나무의 연한 애기 순을 따서 큰솥에 찐 후 응달에 말려서 뽕잎 차를 만드셨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딸을 생각하며 비탈진 산 밑 다랑이 밭둑에 서있는 뽕나무의 가지를 휘어잡고 땄을 것이다. 자신의 몸 크기만큼이나 큰 보따리를 만들어 머리에 이고 내려오는 모습이 떠오르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더해온다.

친정에 가면 못주어서 한이 된 사람처럼 여러 가지 농산물을 바리바리 싸주던 어머니이시다. 집에 와서 풀어 놓으면 너무 많아 옆집도 주고, 앞집도 주고, 뒷집도 주고, 이웃에 나누어 주기 바빴다. 친정에서 가지고 왔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친정에 가면 챙겨주는 어머니가 계신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이웃들에게 신나게 나누어 주다보면 막상 우리식구가 먹을 것은 부족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웃과 나누는 기분은 흐뭇하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렇게 좋기만 했던 행복을 마냥 허용하지 않았다. 영원히 살아계실 것만 같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몇 해가 지났다. 이제 어머니께서 이것저것 싸주시던 보따리는 추억 속에 그림일 뿐이다.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하며 아껴서 먹던 뽕잎차도 조금 밖에 남지 않았다. 차츰차츰 줄어들어 바닥이 드러나니 이제 남아있는 것은 먹기도 아까울 뿐더러 보기조차 아깝다. 뽕잎이 가득 담겨 있던 큰 유리 항아리였는데 빈공간이 커질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더 커진다.

눈물이 핑 돌아 눈을 지그시 감고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늘 보따리가 따라 다녔다. 여러 가지 채소와 특수작물을 재배하여 시장에 내다 팔아서 시동생들과 자식들을 가르치느라 늘 채소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셨다. 농사를 지어 시장에 내다 팔 적기가 된 채소는 단을 지어 높이 쌓아 보자기로 묶어 큰 보따리로 만들었다. 어린 내 눈에는 어머니의 체중보다 무거울 것 같은 큰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버스승강장으로 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는 시내버스를 큰 보따리를 시장까지 이동하는 수단으로 이용을 했었다.

어머니가 푸념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큰 보따리를 실으려면 시내버스 기사님은 짐을 싣는 버스가 아니라며 태워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창피를 당하면서도 마을을 경유하는 첫차에 보따리를 실어야만 했다. 전주시 전동에 있는 새벽시장에 나가 중간상인에게 팔고 얼른 돌아와 식구들의 아침밥을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면 어머니는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셨다.

그 후 농기계의 발달로 경운기가 나왔다. 우리 집도 서둘러 경운기를 장만하여 큰 보따리를 싣고 새벽시장을 다녔다. 이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는 꼭두새벽 조용한 정적을 깨고 통통 소리를 내며 시장을 다녀오곤 하셨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아버지는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용달차를 구입하셨다. 그 용달차가 하는 일은 농기구를 논밭으로 운반하는 일과 큰 보따리를 싣고 새벽시장을 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편하게 새벽시장을 다니던 것도 잠시였다. 용달차를 운전하던 아버지께서 야속하게도 회갑도 못되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큰 보따리들은 이때부터 차츰차츰 작아졌다. 그마저 감당하기가 힘드셨던지 새벽시장으로 가는 보따리는 더 이상 없었다.

그 뒤 큰 채소보따리는 농산물을 몇 가지씩 싼 작은 보따리로 변하여 자식들 6남매와 시동생, 시누이들에게 나누어 주기 바빴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반듯하게 펴지지 않고 굽어 있었다. 관절염은 아니라고 했다. 오랜 세월 일을 해왔기 때문에 어머니의 손은 갈퀴처럼 휜 것이다. 어머니의 갈퀴손은 억척스럽게 일을 하며 열심히 사신 흔적이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는 편히 사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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