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地空)

2007.12.06 04:54

김동찬 조회 수:1

선생님 뵈면 눈물납니다.

성도 이름도 쌀도 풀도 나무도
모조리 빼앗겨버린 땅에서 태어나셨죠.

이념의 깃발을 들고 미쳐 날뛰는
전쟁터에서 부모님을 잃고
울면서 울면서 유년기를 보내셨다구요.

보릿고개 위에서
혁명에 휩쓸려가는 학문을
그저 내려다보던
지학(志學)

껍질만 남은 꿈을 추스르며
배고픔을 대물림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세운
이립(而立)

소주와 뽕짝을 섞어 마시고
블혹(不惑)의 거리를 흔들흔들
흔들리지 않고 걸어 오셨습니다

선생님의 피와 땀. 칼슘, 위장, 폐
때로는 양심까지도 바쳐야만 했던 날들이
종이에 손을 벤 것처럼 아립니다.

하지만 처자식 해외여행 다니는 걸 보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던 말도
목숨을 이어주신 하늘의 뜻도
이제는 알아들을 것 같다던
지천명(知天命)

길 아닌 길을 굽이굽이 넘으며
절벽에서 형이 동생을 밀어뜨리던 것도 보았고
왼 뺨을 맞으며 오른 뺨을 내밀었던 적도 많았다구요.
그러다보니
웬만한 일에는 화내지 않고
적당히 에누리해서 알아듣는 이순(耳順)을 얻으셨습니다.

드디어, 만 65 세
땅 위에서 빈 마음을 가진 자,
지공(地空)에 이르셨습니다.

지하철 공짜로 타셔도 되겠습니다.

-- <문학나무> 2007년 겨울호.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419 빈 방 있습니까? 지희선 2007.12.10 0
4418 개구리 소리 듣고 싶어 배희경 2007.12.09 4
4417 달리는 인생 임영록 2007.12.09 13
4416 아! 이 가벼움이여!-"혼불" 중에서 권태성 2007.12.09 3
4415 꽃피는 고목 강민경 2007.12.08 2
4414 원죄 서용덕 2007.12.31 5
4413 빨간냄비 서용덕 2007.12.07 2
4412 라이팅(Lighting) 성백군 2007.12.06 1
4411 웃는 얼굴 서용덕 2007.12.06 3
4410 죄송합니다 서용덕 2007.12.06 1
4409 날개 서용덕 2007.12.06 2
4408 무서운 사람 서용덕 2007.12.06 1
4407 시간 서용덕 2007.12.06 1
4406 바다의 사랑 서용덕 2007.12.06 1
4405 백화점에서 서용덕 2007.12.06 1
4404 적막(寂寞) 안경라 2007.12.06 2
4403 수선화의 질투 서용덕 2007.12.06 1
4402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 시인이 있네 안경라 2007.12.06 21
» 지공(地空) 김동찬 2007.12.06 1
4400 몰래 카메라 김동찬 2007.12.0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