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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기억은 없다.

2007 년인가 9년부터  인물열전을 시작했는데
도중에 출판을 진행중인 김세호 회장님이 몸이 좋치를 않아서
"코리안 메거진"을 하고 있던 현역에서 물러난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껏 그 일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2014년 11월 말경 책이 출판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총 600페이지로 1950년대 부터 2000 년까지
휴스톤 초기 이민자들의 삶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이민 역사 책 이다.

              휴스턴 한인 역사와 인물열전
                             ㅡ발 간 사 ㅡ

1950년대의 휴스턴 초기 한인사회의 대모 대부 역활을 했던 정성욱선생과 방자Smith 여사는 이미 작고했고 함께했던 원로들도 지금은 노령이다.
이들 마저 떠나서 증언할 수 없다면 참고 문헌도 별로 없어  초기 역사의 기록에 어렵게 될 시점에 코리안 저널 미디어 그룹의 본부인 Korean Community Journal, Inc.에서 실기를 면하려 이 일을 자임키로 했다

여타의  인사나 단체에서 이 일을 맡고 나설 가능성이 없는데다 휴스턴을 기반으로 30년간 발전해 온 동포 언론으로서  감당해야 할 일로 가늠했다.
1983년 창간 이후의 코리안저널 휴스턴 판을 보관하고 있었음이 큰 자산이기도 하다.다음에 누가 한인역사를  정리할 때  이 작업이 미완이긴 하지만 단절 없는 역사기록에 기여할 것임을 확신한다.

역사 편찬은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문헌을 정리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의 축적이지만 자손 대대로 보존할 귀중한 기록이므로 약 1000페이지 정도의 지면으로 충실화 하려 했다. 그러나 편찬작업에 투입할만한 인재를 찾기 어려운 가운데 발행인에게 심각한 질환이 돌발해 규모를 축소한 지각 출간이지만 다행으로 생각한다.

연대별 한인역사, 분야별 이슈별 한인역사, 인물 100인, 휴스턴 도시 편람 등 4개의 부문으로 꾸미려 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제 1부>  연대별 한인역사,
<제2부> 인물열전,  <제3부> 인물열전 영문으로 꾸미게 되었다.
사실의 해석과 평가는 포기하고 연대별로 정리함에 그치고 대신 인물열전 영문편을 신설했다.


인물열전 개개인의 후손들이 미국문화에 귀속하여 대부분이 한글 문맹이 될 것이지만 그들의 뿌리를 알고 정체성을 찾는데 도움이 되게 함이 인물열전의 영문판의 목적이다

역사 서술에서 추상적이고 거사적으로 사실들을 전달 하고  인물 서술에서
각인 각색의 인물역정을 해하여 구체적이고 미시적으로 그 시대의 삶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ㅡ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ㅡ라는 캐치프레스로 100인의 삶을 진솔하게 기록하려 했으나 아쉽지만 28인으로 마감했다.

이 책은 인물열전에 수록된 인물들의 출연금으로 출판비용을 충당했으므로
역사 동인지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 단체활동이나 정치활동으로 양명한 사람에게 무게를 두지 않고 , 근명성실하게 삶을 영위하며 가자의 분야에서 모범적인 성취를 이루고 주변의 존경과 선망을 받고 있어 귀감이 될 인물들을 선별해 수록하려 한 것이 인물열전이다.

이 책을 위해 참여한 동인들께 지각 출간에 대한 사죄와 함께 감사 드린다.

                               2014년 8월 25일


                 발행인            김 세 호  Thomas Sei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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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미국에 덜어와서 미국인 남편을 따라
외국여행도 많이 했으며
사우디 아라비아, 방콕 등지에서 살기도 했고,

열 몇개 미국주에서 주로 이사를 다니며
순전히 미국인들 속에서 미국삶을 21년 살았습니다.

그리고 1998년 이곳 휴스턴에와 정착하여 살면서
처음으로  한인들이 모여사는  한인사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년 12월 30일 이 후  이곳
휴스턴 슈가렌드 (Sugar land) 에 정착해서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ㅡ1950~2000 휴스톤 한인역사와 인물열전 ㅡ에 올려진

저의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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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과 사랑, 가슴으로 펼치는 시 세계


“시를 쓸 때 고향을 만나고 용서와 사랑을 배워가는”시인 박영숙영
박영숙영/본명:박영숙ParkYongSukYong


2001년 코리안저널에“해후”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2002년 현대시문학 여름호에“잃어버린 고향”으로 추천 받은 후
2003년 한맥문학 5월호에“봄의 노래”외 4편의‘시’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해 가을“한민족 재외동포문학포럼”에 초청되어,참가 하였고 2004년 한국본부 국제펜클럽 재외동포문학상에“이민 백주년에 붙이는 글”외 2편이 가작으로 당선되어 국내외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박영숙영/본명:박영숙 시인은 사랑과 그리움 , 그리고 고향과 희망을 시로 빚는 서정 시인이다.뒤늦게 그것도 나이 오십 중반을 넘어서 마음 속의 시심을 발견하고 아름다운 가을 인생의 길을 가고 있는 여류시인이다.

고국을 떠난 지 34년이 훌쩍 넘었고, 미국에서 평범하게 사는 이민자의 한 사람이지만 문단에서 그녀를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다양한 체험과 감정을 서정적인 작품으로 담아내는 그녀의 열정 때문이다.

박영숙영 시인은 진해에서 박씨 가문의 7남매 중 딸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박혁거세를 시조로,밀양 박씨는 신라 경명왕의 첫째 왕자인(박혁거세의 30세손)밀성대군 박언침에서 시작되고 난계파는 국악의 아버지라 말할 수 있는 난계 박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연은 박맹우,박중우,박계우 세 아들을 두었고 박계우가 1454년 개유정난때, 단종복위사건에 가담함으로써 사육신과 함께 참형을 당하므로, 난계파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부친 박봉우는 박맹우의 적통 자손으로 난계파 18대손이며, 부친 박봉우, 모친 문상금 가문에서 600년 가까이 보존해 오던 박맹우 선조께서 받았던 고증자료“좌승지 교지”를 박영숙영시인의 3번째 시집“어제의 사랑은 죽지를 않고”에 상재했다.

진해덕산 초등학교와 진해여자 중,고를 졸업한 그녀는 65년 고교 졸업 후 진해 해군 통제부 공무과 타자수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그리고 서울 여의도 비행장 부단장 김순경 대령과 준장 최단장실 비서로 1971녀 여의도 비행장이 문을 닫기 전 까지 근무했다.

53년 9월에 6,25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이 지났어도 대한민국은 무척이나 가난했다. 1963년 부터는 서독광부/간호사파견이 있었고, 1964년부터는 월남파병이 시작되었다. 1971년 서독간호사 보조원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문을 닫게 될 여의도 비행장을 그만두고 서울 한남동에 있는 간호보조학원을 다녔고 병원에서 실습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산 미군부대 안에 있는 경리과 환전소에서 미군월급 수표를 취급하는 경리 사원으로 일을 했다.

그녀보다 먼저 회사를 다닌 한 여직원의 소계로 1975년 5월 어느 날 평생의 반려자가 될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미시건이 고향인 그는 Ukrainian(Ukraine) 3세였고 집안은 전통적으로 천주교였다. 그래서 였을까? 그는 매우 친절하고 예의 발랐는데, 그는 USAF Academy with a bachelor’s of science in Civil Engineering 으로 졸업한 청년 장교였다.

부대 안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가끔 데이트를 즐기며 주말에는 서울 고궁이나 미술관을 둘려보고, 때로는 지방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바다와 산 , 절 구경도 다녔다.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며 만남이 깊어지던 어느 날 2년이 가까워 올 무렵 그 남자는 Wright-Patterson AFB Ohio에서 Master’s Management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인생에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는 누구나 망설여지듯이 이들도 그랬나 보다.ㅡ자신이 외로워서 나를 사랑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가슴밑바닥 진실을 다해 나를 사랑했는지 모르겠다ㅡ고 하며, 떠날 당시 그 남자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냥 미국으로 홀로 떠났다.

그러나 떠난 지 한달 만에 사랑의 고백이 담긴 편지와 결혼 초청장을 보내왔다.“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동화책에 나오는 기사처럼 정중하게 대했다”라고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는 박영숙영 시인은 이렇게 고심해서 결정한 사랑의 고백이라면 남은 평생을 의지해도 후회 없을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라 확신하고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행 비행기를 탔다.

일가친척 하나 없이 홀로 머나먼 미국으로 건너온 그녀는 5살 연하의 남편과 결혼하여 1남 1녀의 다복한 가정을 일구고 살고 있다. 타국의 문화와 정서를 배우며 살아야 하기 때문일까
그녀의 남편은 때론 선생님이었고, 고향에 두고 온 부모임이 되었으며,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녀 역시 남편 하나보고 이 미지의 세계에 왔기에 그를 존경하며, 고향 병이 도질 때마다 더 깊이 남편을 위하고 자식을 위하며,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미국생활을 익혀왔다.


30년이 넘도록 한결 같이 매력적인 남편


미국사람들의 자상함은 그들의 생활에 함께 젖어봐야 알 수 있다. 미국에 사는 우리들도 그들과 직접 부대끼며 생활하지 않으면 단지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고 정이 없다. 라는 식의 피상적인 모습만 떠 올린다. 그러나 실지 생활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계산적이거나 이기적인 것보다는 모든 면에서 너무 정확하다 보니 이런 편견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남편을 통해 박영숙영 시인이 경험한 미국사람들에 대한 면모는 타인을 베려 하는 마음과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마음, 타인에게 베푸는 몸에 벤 친절은 그 사람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있다.

타지를 이사를 가게 되면 이사를 가기도 전에, 그 집의 도면과 창문의 크기 그리고 그곳의 안내서를 보내주고, 이사를 가면 이삿짐을 풀기도 전에 옆집 부인이 찾아와 인사를 하며, 이삿짐 푸는데 방해가 되니까 아이들을 돌보아 주겠다며, 자기들 집으로 데려가거나 혹은 아이들을 위해서 쿠키를 구워 오기도 한다고 했다.

짐을 풀고 일주일 후 쯤이면 남편 직속 상관의 대령부인이 중위부인을 찾아온다. Welcome Wagon 이라고 해서 작은 화분 하나와 어린아이에게 필요한 상비약 등을 들고 와서, 그곳 생활에 필요한 정보와 부인회에서 어떤 일을 하는 지를 자세하게 설명하며,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권한다.

처음 미국생활을 시작했을 때 모임에 나가면 옆에 앉은 부인의 말을 아무리 귀 기울여 듣는다고 해도, 상황도 낯 설은 데다 영어조차 쉽지 않으니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순간이 많았다.
그럴 때 그녀가 잘 알아듣지 못하고 앉아 있으면 다시금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단어로 설명을 하며, 그들의 대화 속을 그녀를 끌어들였다. 친구 같고, 언니 같은 친절하고 따듯한 마음으로 그녀를 안아준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교부인회 모임, 볼링회원이 되어 취미클럽에도 나가며, 이렇게 여러 부인들과 어려움 없이 재미있고 즐겁게 우정을 나누었다. 부인회에서 운영하는 헌 옷 가게에서 봉사활동, 부대 안에 정기적으로 헌혈차가 오면, 쿠키와 주스로 헌혈한 병사들에게 당분을 제공하는 일 등. 크리스마스때는 클럽을 장식하고, 부인들이 여러 가지 예쁜 쿠키를 구워 온 것을, 집에 못간 사병들에게 쿠키를 선물하고, 때론 쿠키버스 Drive라고 갑자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떠나는 군인들에게 샌드위치를 제공하는 등, 다른 미국 부인들과 함께 몸으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은 모두 다 하며 점차 미국생활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미국에서는 뒷돈이나 눈먼 돈이 생기는 일이 없기에,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쓰지 않는 것이 최선의 절약이다. 내가 만났던 모든 군 부인들은 유명 명품을 모르는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하며, 구두로 한 약속도 문서 역할을 하듯이 약속을 잘 지켰다.

단정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피하고, 기쁘고 희망적인 말로서 상대방을 격려했다. 그리고, 신용과 믿음으로 인간 관계를 쌓으며,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미국의 정서 생활을 , 미국 부인들 속에서 진정한 미국생활을 배워나갔다.

남편 친구들 집에 초대되어 가면, 대부분의 가정마다 그들 부인이 직접 만든 소품으로 가득 장식되어 있어서, 그 집의 안주인의 개성을 말 안 해도 알 수 있다.
또 한 바느질을 할 줄 아는 부인들은 남편과 아들, 그리고 딸과 엄마가 같은 색의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여 가족 사랑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녀 역시 남편의 옷도 아이들의 옷도 손수 만들어 입히기도 하고,
쉬운 옷 패턴을 사와서 자신의 외출복도 직접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이사를 가면 가는 집집마다 창문의 크기가 달라 천을 사와서 커튼을 손수 만들기도 하고, 갖고 있던 커튼을 수선해서 새로 고쳐 달기도 했다.
미국부인들은 한국사람을 피상적으로 알뿐, 한국사람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녀가 하는 말 한마디, 마음씀씀이 하나 하나가 한국사람을 재는 잣대가 될까 두려워, 모든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으며, Think you, Excuse me,를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녀가 만났던 좋은 사람들 속에서, 좋은 것만 보고 배우며 살다 보니, 그녀도 친절을 베풀며 살아야겠다는 삶의 철학이 생겼다고 한다. 돈 한푼 안들이고 마음을 나누는 웃음, 따듯하게 건네는 덕담 한 마디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고, 희망적인 삶을 살수 있는 행복을 만드는 씨앗이라 생각하는 박영숙영 시인은 그만큼 순수하고 여린 마음을 가진 서정시인이다.

이민 와서 한곳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다른 이민자들과는 달리 박영숙영 시인의 남편은 군인이라 자주 이사를 다녔는데, 1987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의 2년은 인상 깊고 특별했다.

사우디 여자들은“바야”라는 검은 천으로 눈만 내놓고 온몸을 가렸으며, 심지어 가족 식당에 와서도 검은 천을 내렸다 올려다 하며 식사를 했다. 사우디에서는 결혼해서 같이 살다가 남편이 부인보고 나가라고 하면 , 여자는 입은 옷만 걸치고 나와야 하기 때문에 검은 천 보자기를 둘러쓴 ,보자기 밑에 금장식품을 하고 있다고 했으며, 여자는 운전도, 장사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남자가 했다.

골드 쑥이란 금 시장에 가면, 금장식품들이 들어있는 진열장을 열어 놓고 손님이 마음대로 이것, 저것 만지며 물건을 고르게 한다. 주인은 손님이 물건을 훔쳐 가는 것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왜냐면 물건을 훔치다 들키면 손목이 짤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건을 훔칠 생각을 못한다고 했다.

사우디에서 군인 가족이라고는 11명이 전부였는데 일주일에 3~4번은 같이 모여다. 아이들의 생일 파티, 샐러드 파티, 샌드위치, 혹은 디저트, 맥주파티 등을 열며, 한 가족처럼 지냈다고 한다. 길 건너 살고 있는 군 동료를 향해“오늘은 우리 집에서 맥주 파티”라고 외치면 저녁을 먹고 모두들 맥주 한 깡통씩 손에 들고 모였다.군복을 벗으면 모두들 다정한 친구고 형제같이 편안히 애기할 수 있었다.

남편의 직업상 항상 부대 안에서 살아야 했는데, 남편은 잠을 자다가도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기 전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상대방을 배려하며 친절하게 받을 정도로 자상함이 배여 있었다.

군 부대 안에 살면서, 집세, 물세, 전기세를 개인이 내지 않는 데도 남편은“더우면 선풍기도 함께 틀고”ㅡ 겨울에는“추우면 옷을 더 입어라”하면서 “누군가가 돈을 내고 있으니, 내가 직접 돈 안 낸다고 마음대로 쓰지 마라”… 등등 삶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성실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허튼 데 돈을 쓰지 않지만, 자식과 아내에게 많은 관대하기 그지없다. 아들과 딸을, 여름방학 때에는 외국으로 보내 공부를 시키는 등 헌신적이며,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학자금으로 저축했던 보험금을 아이들의 돈이라며 모두 명의이전 해 주었다.

박영숙영 시인이 문학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남편의 뒷바라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군대생활 하는 동안 자기를 따라 다니며, 뒷바라지 해 주었으니, 이제는 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하는“34년 넘게 함께 살아왔는데도,
아직도 눈물겹도록 감동을 안겨주는 매력적인 남편”이라며 그녀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과 칭찬의 말을 하며 부끄러워 한다.



다재 다능한 1남 1녀


박영숙영 시인은 아들과 딸을 두었다. 공부 잘하고 재능이 많은 아들은 Little Rock Arkansas 주 영재학교인 ASMS 과학고에 다녔고, 예능에 소질 있어 비올라 연주도 잘 했으며, 그림도 잘 그렸고 태권도도 블랙벨트 2단이다. 고교시절 네셔널 메릿스칼라십에 선정 되었으며 수학이나 과학경연대회에 나가면, 단체상이나 개인상을 빼놓지 안고 타 왔다.

1995년에는 Science Exposition 으로 2weeks St.Petersburg,Russia 까지 다녀왔다. 고교졸업생 중 한 주에 남학생 한 명, 여학생 한 명에게 주어지는 대통령 장학생에 산발되어, Arkansas 주에서는 아들이 선택되어 워싱턴에서 President Bill Clinton 과 Vice President 앨 고어도 만났다.

아들 Martin 은 명문대학중의 하나인 미조리주 워싱턴대학(Washington University in St.Louis MO)에서 4년 내 장학금 (Four Years Full Scholarship)을 받고 공부했으며 우등으로 졸업했는데,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때는 영국에 가서 섹스피어에 관한 드라마도 공부하고 오기도 했다.

* Graduated: Washington University St Louis MO 1996-2000
* Bachelor of Science In Business Administration -Major: Marketing,- Magna Cum Laude
* Bachelor of Arts-Major: Drama, Minor- Writing,- Summa Cum Laude
아들은 현재 시애틀 Alexis Hotel 에서 꿈을 가지고 근무하고 있다.

딸은 초등학교 시절에 한 학년을 월반하고 Little Rock Arkansas에서 Gifted & Talent School 를 다녔으며, 그림과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어 오케스트라반에서도 활동하고, 태권도를 배워 블랙밸트 1단이며 매사에 사교적이고 활동적이다.

고등학교는 North Taxes 과학고를 졸업하고 오빠와 같이 워싱턴 대학을 졸업했다.
* Graduate Taxes Academy of Mathematics and Sciences 2000~2002
* Graduate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with Bachelor’s Degrees in Mathematics and Biology 2006)
* Major: Bachelor of Arts in Biology and Minor in French
대학시절에는 Summer study in Amboise Paris 2003 ㅡSummer study (Per-Med) in Nice, France 2004
* And One Semester(4개월) study King’s College in London 2005

봉사심이 남다른 Melissa는 대학 졸업 후 텍사스 Rio Grande Valley의 중학교에서 8학년 과학교사로 2년 동안 봉사 활동을 했고,

2008년 4월에는 어린이 백혈병 환자를 위해 모금 운동을 하며 Nashville 에서 있은 해프 마라톤을 완주하기도 했다. 대학시절 (아들 역시 그랬지만)에는 정기적으로 헌혈운동에 동참했으며, 지금도 머리카락이 길면, 암 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진 환자를 위해, 머리카락 기증을 하고 있다.
지금 현제 Melissa는 Attending the UT Health Science Center San Antonio School of Medicine 에 재학 중이며 졸업은 2013년 봄이다.



열정의 에너지를 지닌 서정시인


박영숙 영 시인은 휴스턴에서 시를 쓰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여느 군인 가족과 마찬가지로 이사를 자주 다녔으며, 미국의 13주는 물론 사우디 아라비아 와 방콕에서도 3년을 체류했다 해외에 있을 때는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홍콩 등 여러 나라에 여행을 다녔다.
그녀의 이러한 폭넓은 세상 시야가 그녀의 마음을 넓고 깊게 만들어주었으며, 다른 삶의 모습을 보고 느낀 것이 작품의 소재가 되지 않았을까?

어느 날 여자로서의“장기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은 이후,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서는 무엇을 하며 살아왔을까”하며 자조했다는 그녀 박영숙영 시인은, 자신의 이름을 찾고 싶어,‘심히’흔들어진 샴페인 병에서 터져 나오듯 한, 그 감정을 억제 할 수 없어, 글을 써 본 것을 신문에 발표 함으로 해서, 작품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2003년 문단에 데뷔한 이후, 소속된 문학단체에서 해마다 나오는 사화 집 이외 동인 집을 4권이나 내었으며, 그리고 여러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지금까지 3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신달자 시인 명지대 교수는 박영숙영 시인의 첫 시집:“영혼의 입맞춤”‘시’평설에서 ㅡ“생명적 존재를 향한 초월적 의지를 보인 사랑의 성직자”라고 말하며,“그리움과 사랑을 초월적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완성시키는 열정의 에너지를 지닌 시인이다.”라고 극찬했다.

두 번째 시집:“사막에 뜨는 달”‘시’평설 에서 허영자시인(성신여대 명예교수)은”박영숙영 시인의 시는 극진한 정성과 열의를 모아 쓴 시”라며“해석이전에 울림이 있고, 설명과 분석 이전에 감동이 있는 가슴으로 쓰여진 서정시”이며,
구약성서의 감동적인‘아가서’사랑의 노래와 같이“박영숙영 시인의‘시’는, 애로스적인 사랑이,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높이 승화되는, 사랑의 변신을 접하게 된다”고 말하며,
“시인의 작품에 나타난 사랑은 곧 시인의 영혼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이, 삶이며 생명이 되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했다..

세번째 시집:“어제의 사랑은 죽지를 않고”에서, 박영호 문학비평가, 협성대 교수는 ㅡ“박영숙영 시인의 시는 사랑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완성하는 동력으로 완전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의지와 영원한 행복을 성취 하고자 하는 의지로 집약된다”고 말했다.

서문을 써주신 성결대학교 부총장 신규호박사님은 ㅡ 박영숙영 시인의‘시’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적나한 생명의 소리, 사랑의 노래가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시 <바람구멍> <별빛이슬> <한 알의 진주><산 속에 밤이 우는 소리>등은 시인의 언어 조탁 능력까지 입증해주고 있어, 그의 천부적인 자질과 함께 앞날이 더욱 기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ㅡ 라고 했다.


박영숙영 시인은 말한다.“내가 시를 쓰는 건, 내 마음을 비워가기 위해서이며, 내가 시를 쓰는 건 용서를 배워가기 위해서 이며,또한 사랑을 배워가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사랑 속에서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고, 살아 있는 오늘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행복하기 위해서 이다”라고 말하며
“나의 삶의 목표이고 희망이며, 행복의 전부인 아들과 딸, 그리고 아버지 같고 형제 같고 고향 같은 남편, 그리고 가슴 다해 키워주신 이제는 천상에 계신 부모님께 시집을 받친다”고 하며 그녀의 진실한 마음을 시집에 담았다.

박영숙영 시인은 50중반을 넘어서 시를 쓰기 시작했고, 2007년 7월 나이 61살을 넘기고 Washington Bellevue에서 처음으로 해프마라톤을 완주 했으며, 2012년 4월 현제 장거리 마라톤을 2번 완주 1/2마라톤은 18번을 완주했다.

2007년 10월에는 달리는 도중 간이화장실에 덜어 갔다. 그리고 나오려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기절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스스로 깨어나서 낙오되지 않고 해프마라톤을 완주하기도 했다.

비틀거리며 걷는 그녀를 보고 순경이 구급차를 부를까 하고 물었지만, 그녀는 거절 하고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만일 힘들다고 지금 구급차에 실리게 된다면, 과연 자신이 엄마로서 자식에게“최선을 다하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그녀의 삶의 철학은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는 것이며,
그러한 것들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자식에게 삶의 모델이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랑,그리움, 조국애와 고향 그리고행복과 희망


어느 날 향수병에 마음 아파 그리운 부모님의 부모님 사진을 보다가ㅡ‘어제의 사랑은 죽지를 않고’ㅡ의 시상이 떠올라 시를 쓰게 되었다. 부부가 팔짱 끼는 것이 부끄러운 듯, 그러면서도 행복한 듯
두 분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쓴‘시’ㅡ

해일이 몰려와도 / 바라보는 수평선은 흔들리지 않듯이 / 광풍이 몰아쳐도 / 육지를 뚫고 솟아난 산 능선 그대로 있듯이 ////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 보고 싶은 마음이 / 벌집을 쑤신 듯 하지만 ////

정작으로 당신 앞에 서게 되면 / 눈부신 태양을 맞이한 / 아침 꽃처럼 수줍기만 합니다 ////

저 넓은 창공 속에 / 달이 뜨고, 별이 뜨고 / 태양이 솟아 나서 / 육지를 끓어 안고 돌고 돌듯이 ////

신비한 사랑의 샘물을 파 놓은 듯이 / 내가 가진 모든 것 / 내가 가질 모든 것이 당신의 가슴속에 있어서 ////

어제의 사랑은 죽지를 않고 / 그 사랑 줄기에 /오늘은 또 다른 삶의 향기 꽃 피우며 / 내일을 여는 미래의 문 앞에서 / 행복한 듯, 수줍은 듯 / 당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습니다
(비평가 박영호교수는 이 시를 극찬했다)

떠나왔어도 두고 오지 않는 고향을 노래한‘시’중에는 ㅡ조국이여 영원하라 /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와서 / 나 지금 여기서 살고 있어도 / 눈 감으면 떠 오르는 / 그리운 사람들 잊을 수 없네 ///

봄, 여름, 가을, 겨울 / 푸른 꿈이 나와 함께 자라나던 그곳 / 제비가 추녀 끝에 사랑둥지 집을 짓고 / 갈매기 파도 따라 바다 위에 춤을 추던 / 무궁화꽃, 진달래꽃, 벗꽃 피던 내 고향 /
고향아~ 잘 있느냐, 친구들아~ 잘 있느냐 ///

어이하여 나는 왜 조국을 떠나 왔을까 /검었던 내 머리는 / 흰 눈 같은 백발낙엽 쌓이는데 / 백골이 되셨어도 부모님 계신 곳 / 내 안 태 묻혀있는 고향산천 내 조국 잊을 수 없네 ///

봄, 여름, 가을, 겨울 / 타국 살이 힘들어도 서럽지 않은 것은 / 피가 끓는 조국애 불멸의 넋을 가진 / 나는 / 나는 자랑스런 코리안 아메리칸 / 조국이여 영원 하라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조국이여 / 조국이여 영원 하라

생활 속에 시상이 함께하는 그녀는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어머니로 숭고한 가족사랑을 시편에 담기도 했다. 결혼 25년과 결혼 30년의 축시로 생의 고락과 행복을 같이 해온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으며,

또한 자녀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시로서, 가슴까지 다 내어주는 모성애를 노래했다.한 송이의 꽃을 보아도 조국과 고향과 부모님을 생각하는 박영숙영 시인은,

봄이 되면 휴스턴에 지천으로 피어나는‘진달래’를 의인화 하여,역사를 지켜본 위대한 조국의 꽃으로 노래했고,“계절을 두고 온 목련꽃 나무”ㅡ뒤뜰에 살고 있는 /목련꽃 나무는/더위를 마시고 헐떡이며 누워서/두고 온 계절을 그리워한다 ㅡ 에서는 조국을 떠나왔지만 결코 두고 오지 않은 뜨거운 조국애와, 이민자의 마음을 담아냈다.

또한 시인은, 한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는데, 고향에 가서 보니 살던 곳이 없어지고, 너무나 변한 모습에‘잃어버린 고향’에서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모국어도 국력이다”“오~어머니의 젖줄, 모국어여!”등에서는 시인의 가슴에 타고 있는 조국사랑과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안는 한국인으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희망을 노래했다.

사랑‘시’시를 쓰는 시인의 사랑론ㅡ 아담과 이브가 사랑을 한 이후부터 / 사랑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 인간이면 누구나 마음과 마음을 나누며 사랑하길 원해서 / 열병을 앓으며 젊음이 이 길을 지나가고 있기에 / 세상 종말이 오는 그날까지 사랑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사랑은 생명이고 삶이며 / 사랑은 삶의 꽃이며 평화의 상징이고 / 사랑은 삶의 힘이고 영혼의 의사이며 / 사랑은 행복의 샘이고 미래를 여는 희망의 문이다 ///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올 수 없어 / 사랑이란 씨앗을 / 인간의 가슴에 심어 주셨기에 / 사랑이란 말 보다 위대하고 / 사랑이란 말 보다 강력하고 / 사랑이란 말 보다 부드러운 말은 없으며 / 사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비의 힘을 가져 / 악한 사람도 선하게 만드는 좋은 명약이다 ///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으로부터 태어났고 / 죽을 때는 자식들의 사랑 속에 전송을 받으며 / 이세상 모든 것 두고 떠나도 / 우리들의 가슴속에 사랑만을 간직하고 눈을 감는다 ///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이 사랑이란 바탕 위에 행해지고 있으며 / 사랑이란 이름으로 세계는 하나되어가고 있다. ㅡ 고 말하는 박영숙영 시인은 앞으로도, 따듯한 가슴으로 사랑‘시’를 노래할 것이라고 한다.

그녀의‘시’를 읽노라면 ㅡ 다정한 친구가 가만히 어깨를 보듬는듯하고, 엄마의 가슴에 안긴 듯이 푸근함을 느껴서, 상처 받은 마음이 위로 받고, 외로움과 그리움에 젖어서 쓸쓸했던 마음에 무언가 희망적인 평화를 느끼게 된다.

미국에 와서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이중 문화권에서 살아가고 있다.그리고 우리는 대대로 한인과 한인의 핏줄끼리 결혼하고 살아간다는 보장은 없다.

흙인 오바마 대통령처럼, 언젠가는 코리안 아메리칸이 미국 대통령이 되는 날이 오도록, 우리는 함께 힘을 뭉져 코리안 메리칸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ㅡ고 말 하는 박영숙영 시인은, 자기의 내면세계를 시로 표현하는데 열정을 다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는 디아스포라 미주이민사회 작가 중 대표 여류시인이다.

▶ 1946 경남 진해출생
▶ 1965 진해여자 고등학교 졸업
▶ 1965 진해 해군통제부 공무과 근무
▶ 1967 여의도 비행단장실 비서근무
▶ 1971 간호보조학원/병원근무
▶ 1975 오산비행장/경리사원 근무
▶ 1977 미국이주
▶ 2001 휴스턴코저널‘시’발표 작품활동
▶ 2002 현대시문학 1회 추천
▶ 2003 [한맥문학] 신인상 수상
▶ 2003 9월 한민족재외동포 문학포럼
초청참가
▶ 2004 [펜-코리아 본부]
‘재외동포문학상’수상
저서
▶ 2010 시집: 어제의 사랑은 죽지를 않고
▶ 2008 시집: 사막에 뜨는 달
▶ 2006 시집: 영혼의 입맞춤
▶ 2004 날아간 꿈자리
(펜-코리아 수상자 작품모음집)
▶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
▶ 한미문학진흥재단 이사
▶ 미주 한국문인협회 회원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 홈페이지: http://myhome.mijumunhak.com/parkyongsuk/
▶ E메일: parkyongsukyong@gmail.com


■(글/김용만)



이 글을 읽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박영숙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