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오염되었을 때
2007.05.25 12:16
글이 오염되었을 때 “문학세계” 2002
언제부터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에서는 나는 항상 문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 보 다 문학이라고 하는 학문에 젖고 싶었다. 그것은 책 속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다. 나는 그 무한한 환상의 세계에서 자유로이 살고 싶었다. 내 작은 세계는 너무나 숨이 막혔다. 숙제다 시험이다 하고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학교에 가야한다. 갔다 오면 아버지의 눈이 번쩍이고 있다. 공부하라는 강요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강요로 공부해 본 적이 없다. 하는 척 했을 뿐이다. 그런 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것이 문학이라는 세계였다. 그 때의 나의 문학이란 어떤 책이라도 좋았다. 책을 읽고, 한참을 그 속에서 사는 세상, 소설책이 바뀔 때마다 내 세계도 바뀌어 가는 그런 것이 내게는 문학이었다고 기억된다.
큰오빠의 책장에서 살짝 훔쳐서 보던 책, 두터운 철학 서적이 아니라 얇은 문고 집을 손바닥에 굴리면서 보던 단맛은 구름 위에서 노는 기쁨이었다. 책이 귀해서 돌아가면서 보아야 했던 기다림과 또 남의 책 밑에 끼어들어 친구와 같이 읽던 그런 옹색한 즐거움이 아니다. 나만 차지한 풍성했던 기쁨을 나는 지금도 있지 못한다.
문학은 지금까지 내게 삶의 의의를 제시해 주었다. 내가 인생 방황의 길에 접어들었을 때 글을 쓰는 것으로 기로의 돌출구를 찾았다. 사방 벽이 나를 둘러싸고 나를 질식하게 만들었을 때, 나는 그 숨막힘과 아픔과 격정을 글로 토로했다. 그것이 위기로 부터의 탈출이었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이렇게 글 쓰는 단계까지 왔지만 이제 나는 내 감성에 태만과 과장을 본다. 내가 사라져 없어지는 기로에서 분발해 시작된 글이 이제 내 글은 말의 사치와 생각의 사치로 치닫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을 갖게 한다. 처음에는 말에 대해 고심하지 않았다. 다만 내 마음의 밑바닥을 토로하고 싶은 본능만이 작용했다. 그 본능은 부끄럼도 없이 내 삶의 광야를 회오리 같이 쓸고 다녔다.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면 다 쓰고 싶은 때었다.
시작은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어릴 적 나는 내 마음의 조각 조각을 엮은 글들을 이쁜 생과자 통 속에 넣어 차곡히 간직했었다. 그랬던 어느 날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그것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내 속살을 내 보이는 것 같은 부끄러움에 한사코 거절했으나 드디어는 그녀의 청에 못 이겨 내주고 말았다. 그녀는 그것을 영 돌려주지 않았다. 물론 멀리 떨어져 살아서 만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혼자 그녀 집에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 글을 찾고 싶은 일념에서였다. 서울에서 인천이면 코앞의 거리긴 했지만, 기차로 혼자 길을 떠난다는 것은 큰 모험이고 사치였다.
친구는 이리저리 긁힌 마루를 걸레질하고 있었다. 우리는 탯속에서 부터 안 양, 아득히 아득한 옛날로 돌아가 잊었던 일들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런 후 나는 내 원고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남편과 싸웠을 때 자기 물건을 다 태워버렸다고 말이다. 내 글은 자기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나는 지금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맸던 양목같이 그 없어진 글이, 물론 글 나부랭이에 불과했겠지만 퍽 궁금하다. 어떤 글들을 적어 두었을까. 아주 서툰 글에 틀림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내 정서에는 한자의 사치도 없었으리라 생각되었다. 그 솔직한 정서가 그립다. 나는 지금 내가 써 가는 글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하고 있다. 왜 글을 쓰는가. 쓰고 싶어서 쓴다고 하나 그 쓰고 싶은 충동보다 이루고 싶은 욕망이 앞섰을 때, 글이 환경의 오염을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런 기우는 어느 하루 내게 우연히 다가왔다. 내 머리 속에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그 회오리가 내 목숨을 말아 하늘 심연에 올릴 것 같은 기세였다. 정신을 차려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회오리로 놀아나는 머리 속을 휘잡고 있었다. 이 회오리에 져서는 안 돼. 안 되지 하면서다. 한참 만에 기세는 누그러졌다.
이렇게 요새 나는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있다. 다급해서 응급치료실로 갔다. 의사는 아직까지 어지럼증의 원인도 모르며 치료약도 없다고 했다. 바로 그 때다. 머리를 들 수도 없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조바심하고 있었다. 이번 글마루 숙제는 뭐였지? 빨리 쓰기 시작해야 되겠는데 하며 마음에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또 글을 쓰고 싶지도 않으면서 조바심을 가진다는 것은 뭣인가 잘못 돼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까지는 글을 쓰고 싶어서 써 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고 무엇엔가 쫓기고 있다. 이런 내 자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글을 중단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글을 쓰는 기쁨보다 욕심이 훨씬 더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안 때문이다.
이제까지 내게 있어서의 문학은 쓰고 싶다는 기쁨에서 시작해서, 가식이 없는 나만의 세계에서, 후회 없는 끝맺음을 모색하는 그런 것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나는 방대한 문학이란 광장에 서서 나를 뒤돌아본다. 그 큰 광장이 나를 덮치고 있다. 나는 거기서 벗어나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항상 문학을 하고 싶었다는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되겠는가 보다. 그것으로 내 문학의 세계가 끝나도 나는 지금 후회하지 않겠다고 말을 맺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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