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곡

2007.05.30 14:09

배희경 조회 수:45 추천:2

      
      눈물과 곡(哭)                 “미주문학”  2005년 여름호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에 벌써 마음속에서 울고 있었다. 연말이면 모이는 이 모임에 그녀는 오늘, 동반자 없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오십 사년을  함께 한 남편을 잃고 두문불출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모임에 나온다 해서    우리 제자들은 기뻤다. 사년 전 일이다.
    그녀는 팔십을 바라보는 일본 여인이며 꽃꽂이 선생님이다. 이십 여 년 전, 이 선생의 꽃꽂이 시범을 보러갔다가 그분의 예술성에 반해 학생이 되었다. 그녀가 꽂은 그날의 꽃꽂이를 나는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것은 아름다움 이상의 신비의 창조였다.
    얕은 장사각형 수반(水盤) 두개가 앞과 뒤에 엇비슷이 놓였다. 그녀는 두개의 좁은 공간에 가깝고 먼 대자연을 재현하고 있었다. 쌍동쌍동 자른 동백 꽃 가지를 촘촘히 수반에 꽂아, 높고 낮은 산림을 만들었고, 그 나무 밑 둥, 얕으막하게 국화꽃으로 땅을 연상시켰다. 내 눈은 깊은 산림 골짜기를 배회하며, 대자연을 재생한 창작의 극치를 음미하고 있었다.
   오랜 후, 그녀에게 그 날의 역작을 다시 한 번 재현하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그 작품을 기억하지 못했다. 수도 없이 잡은 창조의 순간들을 다 기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림이라면 남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꽃꽂이란 순간의 예술이다. 꽃과 부재료와 용기에 따라, 또 그때 그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이 꽃꽂이만이 갖는 오묘한 묘미가 아닐까.

     모임장소인 회원의 집에 닿는 순간까지 내 머리 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차 있었다. 그녀는 어떤 심경으로 나타나실까. 오늘의 빈자리를 어떤 대화로 채울까, 어떻게 위로를 해 드릴까. 등등 나의 우려는 끝이 없었다.
    각기 만들어온 음식은 벌써 식탁에 놓여 있었고, 나도 장만해 간 음식을 서둘러 내려놓고 선생님을 찾았다. 그녀는 응접실에 몇 회원과 같이 서 계셨다. 조그마한 그녀의 몸은 더욱 조그마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눈을 들어다 보며 벌써 내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놀랐다. 이 분은 어떻게 그 엄청난 눈물을 참을 수 있단 말인가.  눈물이란 참을수록 요동치는 청승인데 그 눈물을 다스리다니 놀라왔다.
     그날 저녁의 그녀는 내가 그녀를 알아온 중 가장 슬기로워 보였던 저녁이었다. 동백나무 가지로 산림을 창조한 만큼이나 신기하고 돋보였다. 자기의 감정을 저렇게 당당히 누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식탁에 앉아서 담담히 남편 얘기를 꺼냈다. 두 부부의 오랜 사랑을 한마디 한마디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자기의 남편은 지금도 자기 곁에 같이 있으며, 외롭지도 허무하지도 않다. 자기도 곧 갈 길이고, 언제 죽어도 될 평안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있어서 더 감사하고 ... . 연연히 이승과 저승을 왔다 갔다하는 그녀의 신비스런 철학에 이것은 또  무슨 종교일까 하고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울지 않는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눈물이란 슬퍼서, 기뻐서, 감격해서 난다. 또 너무 반갑고, 너무 통탄스런 남어지 운다. 이렇게 눈물이 나는 이유는 셀 수도 없지만 이 크고 작은 감정의 조절이 민족에 따라서 많이 다른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선생님의 경우도 같지만 일본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슬프다고 분하다고 우리같이 땅을 치며 통곡하며 하는 일은 더욱 없다. 우리는 본래 감정이 격한 민족이 아닌가.
   사람이 죽으면 중국이나 우리는 소리 내어 곡(哭)을 했다.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은 죽은 자를 애도하며 또 예우하는 옛적부터의 관습이다. 지금은 우리들도 손수건을 눈에 대는 것으로 곡을 대신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울음의 역사를 보면 장장하다.
   그러나 아무리 잘 우는 민족이라 해도 우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 만은 아니었다. 내 할아버지는 해방되는 해 이월에 돌아가셨다. 막판 세계대전의 회오리 속에서도 장안에서 효자라 소문 난 아버지는 오일 장례를 치르며 당신 아버지를 기렸다. 오일 동안 조문객이 드나들 때마다 집안 상주는 울어야 했다. 남자들은 아이고 아이고 소리만 내고, 아낙네들은 목청을 돋구어 곡을 했다.
   그런데 그 때의 울음을 누가 다 울었겠는가. 우리의 고모였다. 고모는 목청도 좋게 잘도 울었다. 조문객이 대문에 들어서면 우리는 고모를 부렀다. 그러면 고모는 시신을 모신 방에 들어가서 울기 시작한다. 조문객이 여자일 때는 그 조객도 같이 곡을 한다. 남의 할아버지가 갔는데 슬픈 마음은 전연 없겠지만 예의상 운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곡소리를 녹음 테이프로 대신한다고 들었다. 중국에서 사람을 사서 울렸을 때 보다 많이 발전했다. 어디까지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인지 선을 그어 봤으면 좋겠다.
    내 고모는 장장 오일동안 자는 시간만 빼고는 울었다. 어머니도 옆에서 곁다리로 울었지만 고모의 정정한 울음소리 앞에선 모기 소리만도 못했다. 그러나 고모도 오일 째 되는 날은 목이 쉬어서 뱃속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름소리같이 들렸다.  
   주위에서는 고모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렇게들 말했다. 울음을 잘 울면 불행이 따라온다는데-. 고모는 네 딸 뒤에 낳은 아들 하나를 일곱 살에 잃었다. 그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숨어 울다가 당신 아버지 장례에서 마음 놓고 울어 제꼈을 것이다. 닷새를 울고 나니 슬픔의 근이 다 빠졌는지 그 후에는 예전 같이 우는 모습을 보지 못 했다.
   울음은 마음의 청량제다. 청량제가 말라버렸을 때 마음속에 단단한 응어리가 생긴다. 우울증에 걸린 환자가 왕 왕 우는 것을 보았는가. 못 운다. 배우 이은주도 눈물이 걷힌 후, 드디어는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같이 찔찔 잘 우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릴 염려는 없어 안심이다.

    내 꽃 선생님의 예는 이와 다르다. 겉에 감정을 나타내기를 저어하는 그들의 민족성도 있겠지만, 그녀는 확실한 철학이 있어서 함부로 울지 않았다. 그녀는 울음에 있어서도 나의 선생님이다. 나도 이런 철학 속에서 나의 헤픈 울음을 동여매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굳이 울음에 인색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아니 어떤 철학이든 그렇게 하는 일이 내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눈물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