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더불어 1

2007.06.03 15:31

배희경 조회 수:50


              꽃과 더불어 1                “글마루”  1998년

   눈이 펄펄 내리는 1.4 후퇴 피난길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중에 가족과 같이 들려야 할 곳이 있었다. 그것은 여름 내내 받아두었던 꽃씨를 맡기기 위해서 피난 못 가는 친척집에 들리는 일이었다. 꽃씨 봉투를 받아들며 “오냐 오냐 봄에 심어서 꽃씨 받아놓으마.” 하시던 지경집 할아버지와의 대면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그는 폭격으로 돌아가셨다.
   으스스 추위만 들면 오랫동안 지경집 할아버지의 인자했던 모습이 기억나곤 했다. 나는 지금도 후회한다. 사람이나 잘 계시라고 당부할 것이지 무슨 얼어죽을 꽃씨는... 그 세월들이 서글펐다.

   내 꽃 사랑은 훨씬 전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외갓집이 있었다. 자주 놀러갔다. 이른 여름이면 장독대 아래 자갈 사이에 채송화가 앙증맞게 피었고,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높게 너울너울 피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깨알보다도 작은 씨에서 똑 같은 꽃이 난다고 한 어른들의 말을 되씹으며, 그 엄청난 신비의 둘레에서 해어날 수가 없었다. 많은 의문 속에서 꽃 주위를 맴돌며 놀았다.

   이 어릴 적 꽃 사랑이 연연히 이어, 이 미국에 와서 꽃 일을 시작한지도 어언 24년 남짓 되었다. 일이 고달프고 힘든 때도 많았지만 한 번도 꽃 일이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똑 같은 일을 이렇게 길게 해 오지만, 아침에 나가면 꽃을 대하는 기분은 항상 새롭다. 이것은 지경집 할아버지와 꽃씨와의 아픈 추억도 한 목 했을 것이다.

   이런 나는 또 어떤 꽃이나 다 좋아한다. 누군가가 많은 꽃 중에서 그래도 어떤 꽃을 더 좋아하는 가고 물으면 참 대답이 곤란하다. 거의가 다 아름다우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면 개성 없는 사람이라고 재미없어 할 것 같아서 그때 그때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꽃 이름으로 대신 할 때가 많다.
   나는 꽃들 중 가장 억세게 생긴 백일홍(zinnia)도 좋아한다. 빳빳한 색도화지를 오려 만든 것 같은 애교 없는 꽃이지만 이 꽃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처녀 때 일이다. 친정아버지는 우리가 항상 그리던 동네에 집을 샀다. 그러나 뜰은 넓지 못했다. 마당 한 가운데에 살구나무 한 대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쁘게 가꾸고 싶었다. 마당 한 구석을 일구고 꽃씨를 뿌렸다. 무슨 꽃인지도 모르고 뿌린 씨에서 이쁘게 피어 준 꽃은 백일홍이었다. 하늘 가득 화사한 살구꽃의 아름다움만 봐 온 눈이지만,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거기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 중 한 포기에서 꽃가지마다 다른 색의 꽃이 피는 일이었다. 후에 꽃 일 하면서 안 일이지만, 다년생 철죽꽃(azalea)같은 것은 연예가들이 접을 해서, 두 색 정도 다른 색이 피는 것은 보았어도, 이런 일년초에선 휘기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한 꽃 대에서 네 가지 다른 색의 꽃이 피었다 해 보자.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또 흥미도 없어했다. 내게는 큰 사건이었지만, 후에 나는 이 말을 꺼내지도 않게 되었다. 이런 추억이 이 표정 없는 꽃을 좋아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꽃 중의 꽃은 장미다. 이쁜 장미엔 ‘이쁨에 가시’ 라 하듯 가시가 많다. 꽂기 전에 가시를 다듬어야 한다. 잘 가꾸지 못한 장미는 대가 굽으며 자라서, 가시를 딸 때 꽃대도 함께 깎인다. 사람도 같다. 구불게 자라면 대도 깎인다. 인간의 기본자세부터 가꿔지지 못하면 살이 깎이는 아픔을 겪는다. 이번 IMF 사태를 보면서 굽은 장미같이 살이 깎이는 아픔을 겪고 있다 고 생각했다. 안타까웠다.  

   여기 미국사람들은 꽃과 더불어 산다. 무슨 일이든 꽃으로 인사한다. 물론 여유 있는 생활에서 비롯된 관습이긴 하겠지만 우리의 사고와는 차이가 많다. 그들은 저녁에 만날 마누라에게 따리 붙이고 싶을 때면, 오늘 저녁식사는 뭐지 하고 낮에 꽃을 보낸다. 네가 내 인생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었는지 아는가 하는 말로 시작되는 결혼기념일 같은 날은 장미 한 다즌으론 부족하다. 가끔은 열 다즌으로 넣어달라는 주문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장미 한 송이를 주문 받는 값 다 주고 보내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천층만층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떠한가. 무조건 남의 눈에 뜨이는 큰 것을 원한다. 결혼 축하꽃이나 개업꽃, 또 환감잔치 꽃을 미국에서의 장례꽃 같이 큰 화환 (세 나무다리 위에 평면으로 높이 꽂은 꽃)으로 해 달라고 할 때는 멀미가 난다. 미국에 살면 미국의 풍속에 따라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다.
   여기 사람들은 남에게 장미 백 다즌을 보내도 손바닥만한 카드 한 장으로 그친다. 보내는 자기 성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크게 해 주세요.”  “네 네 알았습니다.”  “이름을 적어주시고요.”  “물론이지요.”  이름을 크게 넣는 것에 의기양양하다. 그래서 이름을 금박으로 박아 너덜너덜 꽃 위에 드리운다. 꼴불견 중의 꼴불견이다. 그러나 이 뿌리 깊은 자기 과시의 습성을 어떻게 꽃 가게 장사꾼만으로 고칠 수 있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에 다 꿀 먹은 벙어리다. 이럴 때 만은 꽃 일을 내동뎅이 치고 싶다. 꽃이 싫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싫어서다,

   이십 여 년 전 일이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로스앤젤레스, Vermont 거리에 수퍼마켙을 개장했다. 꽃을 주문 받아서 갖고 갔다. 건물 벽 밖에 화환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장례 때만 쓰는 나무다리의 화환이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누가 죽었는가고 묻고 있었다. 나는 어찌나 당황했던지 뛰어 들어가서 주인에게 알렸다. 주인은 내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서슴없이 꽃을 안에 들이라고 지시했다. 고마웠다. 이렇게 들어주는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십중팔구는 우리나라에서 하는 대로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 적응, 자숙, 순종이라는 말은 쓸모가 없게 된 말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이른 봄이면 거의 거르지 않고 가는 곳이 있다. Death Valley다. 그 이름과 같이 죽음의 계곡으로서, 미국의 서부 개척자들이 더위와 갈증으로 많은 목숨을 잃어가며 통과했다는 기 긴 계곡이다. 그러나 이 죽음의 계곡이 당혹스럽게도 이월과  삼월에는 낙원으로 바뀐다. 아찔하도록 아름답다. 그 연연한 경치와 함께 이월에 피는 사막 꽃은 일품 중의 일품이다. 사막같이 메마른 곳이라 하는 말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사막 꽃이 얼마나 더 섬세하며 아름다운가는 몇 주 안에 피고 지는 그 행운의 기회를 잡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황홀경이다. 이래서 나는 사막 꽃도 온실 꽃도 다 좋아하는 천방지축의 꽃 광이다.

   아들 집 창문 앞에 드리운 따먹고 싶도록 탐스런 등꽃을 바라본다. 생소한 나라에 와서 고생하면서도 꽃과 더불어 살아온 내 인생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구나, 자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