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떨림, 혹은 눈부신 외로움

                                  
  최하림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으며 나는 마치 영화에서 정지된 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혹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장면을 환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감독이 흑백 필름으로, 그것도 슬로우 모션으로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흘러가게 하는 편집기법을 사용한, 예를 들면 빅터 플레밍이나 왕가위의 영화 한 장면을 떠올린다. 7년만에 시인은 병들어 아프고, '누에가 시를 뽑듯' 천천히 그러면서 끈질기게 뽑아낸 시들이 오롯이 모여, 그 아픈 육신을 넘어서 빛나는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쓴 단정한 시편들, 7년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그 언어의 질감이 서로 어긋나지 않게 균일한 것을 보면 역시 장인기질로 다듬어 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시인은 주변에 흩어진 사물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처음 시인의 눈에 의해 포착된 대상들은 그의 언어가 스치는 순간 잠에서 깨어난 듯, 서서히 떠올라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옆의 다른 사물들에게 소근소근 말은 건넨다. 그래서 한 작은 세계가 충분히 그려지고 의미를 갖으면 이제 시인은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예 시인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이 사라진다. 사라진다기보다는 시로 그린 풍경을 전경으로 남기고 시인은 배면으로 흡수되어 흔적을 지운다. 최하림의 작품이
주는 신선함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스스로를 감추고 물활론적 상상력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힘, 그 눈부신 현란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그의 시를 읽으며 행복감에 젖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시 밑바탕을 흐르는 정서는 가벼움이나 빛남이 아니다. 그 맞은편 저쪽, 어둡고 쓸쓸한 저녁 외로움에 지친 한 사람이 어둠을 바라보며 자신의 외로움과 나누는 소리 없는 대화가 시의 골격을 이룬다. 시인은 시의 뒷면으로 숨었지만 그의 목소리만은 낮게 낮게 파동을 이루어 퍼져가다가 드디어는 울음소리로 확대된다. 물론 껍데기만 핥아먹는 독자들에겐 그 울음이 들리지 않으리라. 그저 언어의 물결을 손끝에 대보는 것만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밝은 언어, 굽이치는 흐름, 살아 움직이는 미세한 사물들, 그 아래쪽에서 한 사내가 흐느껴 우는 소리를 환청처럼 듣는다. 겨울바람 소리처럼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고 그러다 다시 끊어졌다 이어지는 소리의 울음, 나는 이것이 환청이 아니라 시인의 외로움이 삶과 공명하는 소리라고 확신한다.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애매한 파동이
  아침 내내 일어 새들이 무리로 물어내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집 안은 잡목숲을 따라오는
  파동 때문에 금세라도 지붕이 무너져내리 듯
  했습니다 그 집의 역사가 유지되는 것은
  순전히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박동새라든가
  딱따구리 새앙쥐의 역할인 듯했습니다
  (중략)
  ......해질 무렵 예의 그 남자가 잠시
  나타나 뒷걸음치듯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잡목숲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

  이 짧은 시 속에서 시인의 상상세계가 거의 다 드러난다. '나무가 자라는 집'은 시인이 살고 있는 집, 혹은 그가 사는 주변의 구체적인 어떤 집일 수 있다. 그러나 '작고 애매한 파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유령처럼 흘러 다니는 이 집은 시인의 상상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집, 혹은 사유의 공간이 된다.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 집이 아니라 계속 작은 떨림으로 흔들리며,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집을 살아 있게 만드는, 그 '파동'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우선 두가지 가정을 해본다. 하나는, 시인의 눈에만 보이는 이 파동은 사실 밖에서 밀려온 것이 아니라, 시인으로부터 촉발된 에너지라는 것이다. 그의 육체가, 그의 시선이 흔들림을 만들어 내고 그 흔들림이 퍼져나가 사물들을 건드리는 수법은 여러 편의 다른 작품을 통해서도 눈치챌 수 있다. 시에 나오는 '늙수그레한 남자'가 사실은 시인 자신일 수도 있다. 그가 그 집 주변을 서성이면서 파동을 만들어내고, 그 떨림으로 새와 숲, 그리고 허물어져가는 집을 자신의 허물어져가는 육체에 비추어보는 것일지 모른다. 이럴 때 이 떨림은 소멸의 에너지이며 동시에 사물의 끈을 연결시키는 소생의 에너지가 된다.
  두 번째의 가정은, 파동이 사실은 파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에서의 떨림은 사실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사물들의 구체적인 움직임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집을 이루는 것들, '지붕/유리창/마루/거실/대문'이 파동에 의해 떨리고 있고, 또 집 주변의 것들, '새/잡목숲/동박새/새앙쥐/남자'가 집에 접근하여 어떤 형태로든 집을 흔들고 있다. 그런데 이 집과 주변의 사물들이 긴장도 방임도 아닌 '애매한' 연결고리 속에 놓여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지운다. 집이 주체도 아니고 남자가 주체도 아니다. 이 둘은 서로 타자이며 동시에 주체의 자리에 놓인다. 이것은 시인의 고도의 전략이다. '파동'이라는 중간자를 전략으로 삼아 진정한 주체를 타자로 밀어냄으로써 '나'의 의지를 감추고 '세계'를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시 마지막에 '남자는 잡목숲으로 사라지고, 시간이/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다'고 한 대목에 이르러 이 시의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아침에서 시작된 밝은 이미지들이 오후에 이르러 허물어지다가, 저녁이 되면 사라지고 닫히고 적막에 빠진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삶의 요약일지 모른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살아오면서, 희망을 품고 시작하지만 삶의 마지막은 언제나 적막한 것이라는 요약, 그러나 단순히 비관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아름다움과 빛남을 함께 머금은 우리 삶을 그린 것일지 모른다. 최하림의 시가 아름다우면서 슬픈 것은 여기에서 뿐만이 아니다. '새/아침/아이'로 상징되는 희망의 끝에는 언제나 '어둠/겨울'의 상징이 따라오고, 그 사이에 '시간'의 변화가 놓인다. 얼른 눈치채기 어렵겠지만, 그의 시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날이 흐리고 가랑비 내리자 북쪽으로 가려던 새들이 날기를 멈추고 서 있다 오리나무숲 새로 저녁은 죽음보다 조금 더 길게 내리고 산 밑으로는 사람들이 두엇 두런두런 얘기하며 가고 있다 어떤 충격이 없이도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바람도 그들의 머리칼을 날리며 그들식으로 말을 건넨다 바람의 친화력은 놀랍다 나는 바람의 말을 들으려고 귀를 모으지만 소리들은 예까지 오지 않고 중도
에서 사라져버린다 나는 그것으로 됐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마른 나무들이 일어서고 반향하며 골짜기를 이루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다 나는 모두를 알 수 없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새들이 다시 날기를 멈추고 시간들이 어디로인지 달려가고 그림자들이 길 위에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 이제 유리창  밖에는 새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 밖에는 유령처럼 내가 떠오르고 있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풍경에서 물러서 '모두를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풍경의 중심에 있다. 창 밖을 바라보는 것처럼 설정되어 있지만 그를 둘러싼 겨울/어둠의 이미지들이 무겁다. 가랑비가 내려 새들이 날아가던 것을 '멈추고' 사람들이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두런두런 얘기하고, 마른 나무들이 골짜기에서 무리져 흔들린다.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면서도 그는 그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바람의 말을 들으려고 귀를 모으지만' 소리는 전달되지 않고, 그는 '너무 멀리 있다'고 느낀다. 제목을 포함해서 '나는 너무 멀리 있다'가 세 번씩이나 나와 그와 창 밖의 세상 사이가 나락과 같다는 단절을 강조한다.
  스산한 밖의 풍경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욕망은 그러나 어둠이 깊어지면서 창에 그림들이 지워지고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으로 단절되고 만다. 그가 밖을 바라보는 것은 사실은 그것을 '향해' 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과 단절된 외로움을 즐기며, 밖의 스산함이 화자에게 이미 침투되어 스며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가 멀리 있다고 해서, 새와 나무와 숲을 떠나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일상의 다반사에 정신 빼앗기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멀리 있다고 느끼는 그 느낌 자체가 창을 사이에 둔 대상과 자아 사이의 교감같은 것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풍경이 비춰지던 유리창에 자신의 '유령같은' 모습이 겹쳐지지 않는가. 그는 지금 외롭고 쓸쓸하다. 아프고 고통스럽다. 다만 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털어놓지 않고, 말 아닌 말로 전달하려고 할 뿐이다.
  이 과정이 바로 '시간'과 관련이 있다. 좀더 정확히 시간의 '흐름/변화'와 묶여 있다. 이 시에서는 '시간이 어디로인지 달려가고 그림자들이 길 위에서 사라진다'고 말한 부분에서, 스쳐지나가듯 묘사한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표면적 의미로 단순히 이 시에서의 시간은 점점 어두워지며 사물의 모습이 지워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새/나무/바람'이 지워져 보이지 않고, 방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시인의 얼굴이 대신 유리에 비치는, 이러한 전환의 틈이 바로 시간에 의해 주어진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최하림 시인에게 시간은 그것 이상이다. 시집에 있
는 [시간은 영원히 고통스럽다]에서의 시간은 어두워지는 한 순간의 시간이 아니라, 삶을 소진해가는 마지막 삶에서의 귀중한 공간이 된다. [도시의 아이들]에서의 시간은 아버지에서 자신으로 이어지는 한 세대의 변화를 뜻한다. 한 순간이면서 동시에, 변화란 영원한 지속일 터라는 인식은 아닐까.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바와 같이, 시간은 삶의 살아 있는 공간을 갉아먹으면서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변화/움직임의 실체이다. 그는 그 시간의 야속함 앞에서 절망을 감추고 사물을, 그리고 '무명의 시간 속에' 비친 자신의 모
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희망과 절망으로 나누는 자는 이원론자의 오류에 빠졌다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희망의 바로 아래 쪽에 절망이 있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희망의 입김은 늘 곁에 있다. 최 시인이 '나무/숲/새/아침' 등의 이미지를 통해 밝고 활기찬 모습을 그릴 때에도 사실 그 언어는 눈물겹게 아프다. 또 반대로 적막한 풍경을 그릴 때에는, 그는 '멀리' 떨어져 자신을 감춘 채 외롭고 괴로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쓴다.

  한번의 저녁도 순간으로 타오르지 못하고
  스러지는 시간 속을, 혹시 뉘 있어 줍고 있는지
  뒤돌아보지만 길들은 멀리까지 비어 있고
  길들은 저들끼리 입다물고 있다

  길 위로 새 한 마리 공기의 힘을 빌려
  하늘 위로 올라가 콕, 콕, 콕, 허공을 쪼아댄다

  나는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노을이 산 밑으로 흐르는 것을
  무슨 상처처럼 보고 있다
                -[저녁 무렵] 전문

  이 시에서도 배경은 저녁이다. '새'의 이미지는 주로 '아침', 혹은 '봄'과 어울려 하늘로 솟아오르는 이미지로 사용이 되는데, 여기에서는 비록 하늘로 '올라가 허공을 쪼아대'기는 하지만 노을이 어둠에 잠기면서 길이 지워지고, 결국은 새까지 '상처'의 한 부분이 되고 만다. 희망과 절망이 하나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그 틈새로 흘러가는 시간의 궤적에 시인이 놓여 있다. 아름답고도 슬프다.
  사람 산다는 것이 가만 생각해보면 사실 별 것 아니다. 수많은 엮임과 풀림 속에 시간이 흐르고 조건이 바뀌면서 내가 세웠던 자리를 지우는 행위가 삶이다. 그러나 그 흐름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온갖 갈등과 욕망이 타래로 얽혀 잘 풀리지 않는 곳이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최하림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새삼 내 자신을 돌이켜본다. 밤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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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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