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수필은 선한 사람입니다. 또 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필을 쓸 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생을 직시하며 마음이 가는 대로 정직한 사람을 그려내기만 하면 됩니다. 가장 순도 높은 수필은 그렇게 씌어진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습니다. 이 정설을 증명하듯 씌어진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의 수필을 인용하는 것으로 ‘수필은 사람이다’의 정의를 여러분 마음 속에 심고자 합니다.

주정뱅이 왕자, 모딜리아니의 순결  

--르 클레지오


주술적인 예술의 원천

  아메디오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비밀이며, 내재성이고, 억제된 힘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모딜리아니가 그린 얼굴을 볼 때, 무엇인가 표시되지 않았고, 마무리가 되지 않은 것이 있어 놀라게 된다. 옷이라든가 색상에 무엇인가가 부족하다. 그것이 마치 한 줄기 빛처럼, 섬광과 같은 눈동자 처럼, 혹은 하나의 미소처럼 흔들리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나타난다. 그것은 멈추거나 붙잡을 수가 없다. 이것이 모딜리아니의 신비, 즉 그의 힘이다. 그는 우리 세상에서 삶이 그리고 활동이 존재함을 믿게 하는 드문 마술사 중의 하나이다.
  이 힘이 무엇인가를 진짜 이야기하려면, 내 생각으로는 그의 그림은 물론, 선사시대의 동물들, 글리프(장식으로 파는 흠), 크레파나 켈트시대의 작은 상, 혹은 그리스인들의 약간은 허망한 우아함을 통해 동방세계의 격렬한 힘을 국경을 초월하여 탄생시키는 에트루리아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그의 그림의 기원을 이루는 모든 것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고갱, 반 고호와 함께 주술적이고 의식적인 예술의 원천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예술을 진짜로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를 가지고 화가로서 산 10여년 동안 그는 똑 같은 끈기로 마치 병마를 몰아내거나 미래를 예언하는 제식(祭式)에서 마귀를 내쫓는 모습들을 지칠 줄 모르게 반복하는 것처럼, 한 가지 얼굴과 한 가지 몸뚱이를 꼭같은 모습으로 그린다.
  이것이 바로 모딜리아니의 작품에서 매혹적이기도 하면서 겁을 주기도 하는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예술의 흐름 밖에 있다. 아니 옆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예술을 하나의 금전적 가치로 만드는 타협에 대한 멸시나 자만에 의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천재라고 부르는 번개 같은 일종의 직감에 의해 빠르게 이해하고, 그 하나의 얼굴과 몸뚱이에 이끌려 그것을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불가능한 완성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보여주고 창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는 장애물과 비밀

  매력적이면서도 음울한 이 유태계 이탈리아인의 내부에는 주술사의 영혼이 있다. 취기, 매혹, 움직이지 않는 시선, 모딜리아니는 자기 자신의 몸을 소모하면서, 그림의 유일한 빛을 드러내며, 자신 밖에서 산다.
  그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삶의 보충적인 행동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단연코 삶의 동작이다. 예술이 없다면 이 미치광이는 술꾼이며 병자에 불과하다. 우리가 보기에 모딜리아니의 생애와 그의 그림 사이에는 혹독한 대조가 있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벨 에포크(20세기 초반) 말기의 더러운 파리에서의 더 암울하고 더 비극적인 삶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 이상으로 찬란하고, 아름다움과 빛과 삶이 충만한 그림 또한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모딜리아니의 삶이 악몽과 비참, 고민 그리고 알콜 중독으로 뒤덮여 더욱 비참해지면 비참해질수록 그의 작품은 더욱 더 맑고 밝고 가벼워지며 모딜리아니가 더는 볼 수 없는 물과 구름과 나무의 색깔을 띠게 된다. 이러한 작품은 사실 꿈에 가깝다. 하나의 다른 삶에 대한 꿈, 완전한 얼굴, 순결하고 경이로운 몸, 환희와 행복에 가득한 확 트인 눈동자에 대한 꿈, 어쩌면 모든 것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내세의 삶으로 향하는 길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노래하고 스스로의 소망에 취해버리는 물신종교의 사제의 꿈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고 흔들어 놓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얼굴들을 바라볼 때 마치 즉시 알아볼 수는 없지만 언젠가 예전에 본 미소를 대했을 때처럼, 낯설은 전율과 동시에 아주 가깝다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림과 생각들, 그리고 새로움, 이러한 것들은 무엇인가.
  영원을 향해 눈을 뜬 하나의 얼굴, 단 하나의 인물 풍경, 명확하게 드러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그러나 그 밖의 다른 것은 하나도, 어떤 다른 오락이나 다른 유혹도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갑자기 깨닫는다. 마치 기적에 의해서 그밖의 다른 것은 모두 지상권 안에 멈춰지고, 우리가 어떠한 신의 시계에 들어선 것처럼, 그것을 갑자기 안다.
  모딜리아니의 모험 같은 세계에는 무엇인가 초 인간적인 것, 한 곡의 음악과 같이 무엇인가 단순하고 완전한 것이 있다. 이 얼굴, 시선 그리고 몸뚱이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 꿈의 세계에 사는 영혼들은 그곳에, 단지 그곳에 있다. 모딜리아니가 이 지구에 남긴 단 하나의 발자취인 그 그림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낯설은 인상, 그것은 정녕코 꿈의 그것이다. 현실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이 얼굴과 몸들은 숨겨진 채 있었고 그것들을 창조해야 했다.

원시적인 것에의 접근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딜리아니는 그가 찾는 것을 본다. <여인의 흉상> <거인> <식자공 피에르> 등에서 벌써 이 꿈의 얼굴들의 초벌그림임을 느낀다. 모딜리아니는 원시적 현실을 되찾고 또 다른 현실을 들추어내기 위하여 단순화하고 체계화해야만 된다는 것을 안다.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근본을 파헤쳐 보면 자신을 그리는 것이다--모딜리아니는 죽음이 그의 삶을 벌써 지워가기 시작한 생의 말년에 가서야 자화상을 그리기로 작정한다.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수필로 화가 모딜리아니를 읽게 하는 글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더 길어지면 내 강의는 뒷전으로 밀리고 클레지오의 수필이 강의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남은 클레지오의 수필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슬픈 종료의 시간이 다가오는 중에 모딜리아니는 초상화를 그리면서 향락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의 죽음과 파멸을 봅니다.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결코 볼 수 없는,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강렬한 정욕과 관능성, 그 운명의 힘을 그는 초상화에 불어넣었습니다.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근본을 파헤쳐 보면 자신을 그리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심장함이야 말로 ‘수필은 사람이다’와 통합니다. ‘초상화는 자신이다’ 자신은 내가 나를 사람이라 지칭하는 순정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강의의 모두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수필은 선한 사람입니다. 또 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둘을 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필을 쓸 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생을 직시하며 마음이 가는 대로 정직한 사람을 그려내기만 하면 됩니다. 가장 순도 높은 수필은 그렇게 씌어진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경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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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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