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퍼옴

2005.03.29 10:43

한길수 조회 수:940 추천:37

어둡고 화려했던 흔적을 찾아서
                                                

  지나간 80년대를 기억하면서 박노해를 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노해를 거치지 않고는 그 어둡고도 뜨거웠던 세월을 지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깜깜한 밤에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선명한 별 하나가 하늘에 반짝인다면, 그 시절이 아무리 혹독한 절망의 심연이었다 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80년대가 바로 그러했고, 박노해는 그 처절하게 찢겨진 별 중의 하나로 우리를 이끌어 갔다. 따라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기억하는 것은 참혹했던 상처를 다시 들여보며 그 흔적을 쓰다듬는 일, 또는 혼돈이 난무하는 9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아비판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나는 80년대 후반에 쓴 몇 편의 글에서 '노동시'가 그 시대의 중심으로 다가오게된 연유와 경과를 나름대로 진단한 적이 있다. 이제 그러한 일반론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의 새벽]이라는 한 작품을 중심으로, 세월이 흘렀기에 좀더 객관적인 눈을 갖고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80년대 초반은, 조금 과장한다면 '노동시 시절'이라 부를 만큼 노동시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였다. '광주의 봄'을 겪고 나서 형성된 자유와 민주의 열기가 노동자들에게도 밀려들어가, 노동해방에의 열망이 행동으로 구체화되면서 노동시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누구나 짐작하는 바이지만, 모든 일의 시작은 미숙하기 마련이고, 노동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미숙함은 소위 '소재주의'와 '구호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두가지였다. 소재주의는 노동자들이 생산현장에서 몸소 체험한 경험들을 시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으로, 이전의 음풍농월 같은 시들에 활기와 탄력을 준 점에서는 큰 자극제가 되었고 독자들의 시선도 강하게 잡을 수 있었다. 반면 소재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전달하기 힘들고, 생경한 소재도 한두 번이면 익숙한 것이 되어버리므로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었다. 구호주의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시위현장의 플래카드에서나 볼 수 있는 원색적 표현과 감탄사를 섞어 쓰는 것으로, 감정을 강하게 전달하려는 욕심은 파악할 수 있으나 문학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쉽게 한계를 드러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작품이다.

  16세에 안내원 생활 시작해 벌써 2년
  같은 또래 여학생 실었을 때 굴욕스럽고
  되지못한 손님 만나 욕도 많이 먹고
  하루 17~18시간 중노동에 시달린 몸은
  그저 소원이 실컷 잠자는 것이다
                -최명자, [우리들 소원]에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모여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지친 1000만 노동자여!
  모여라
  각종 직업병을 앓고 있는 한만은 노동자여!
  저임금에 찌들은 노동자의 한숨이여 모여라!
                -정명자, [동지여, 가슴과 가슴을 맞대고 나아가자]에서

  첫 작품은 버스안내양의 경험을 시로 쓴 소재주의적 경향을, 뒤의 작품은 <한국노동자복지협의>를 중심으로 투쟁을 벌일 것을 부르짖는 구호주의의 경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소재주의와 구호주의가 어쩌면, 문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진솔한 감정과 정서를 오히려 잘 나타낸 것이 아니겠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옳은 말이다. 노동자 시인들이 '상징'이나 '이미지'나 '구조주의' 같은 것을 공부해가며 수학문제 풀듯이 시를 쓰지는 않는다. 노동자로서의 비애와 슬픔을 감정이 북받치는 대로 쓸 뿐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구호주의나 소재주의의 작품들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작품은, 감정의 흐름이 일시적이듯, 오랜 기간동안 우리의 기억을 두드리고 회상하게 만들고 새로운 상상력과 의미를 엮어 나아가게 만들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소재와 구호의 한계를 뛰어넘어 노동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 박노해의 등장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소중한 시사적 의미를 갖는다. {노동의 새벽}이 나온 후 소재주의와 구호주의가 빗자루로 쓸려버린 듯 사라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노동시는 박노해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한다고 볼 것이다. 뒤에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지만, 그의 시는 노동자의 생활과 현장을 사실대로 그린다는 점에서 신선한 소재를 동원하면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들만의 정서를 일반적 지평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성공한다. 울림과 연민을 바탕에 깔면서, 그것의 전복을 통해 노동자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열정적으로 제시하고, 이 사회가 갖고 있는 계급모순의 급소에 치명타를 날린다. 그의 시에는 분노를 속에 감춘 힘을 느낀다.
  개인의 경험과 대사회적 이념의식을 결합한 박노해의 작품은 노동시의 한 전형으로 자리를 굳히고, 따라서 이후 노동시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박노해와 거의 같은 연배이긴 하지만, {노동의 새벽} 이후에 작품을 낸 다음 두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불볕에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을
  땀방울로 식히며
  쭈그리고 앉아 철판을 다듬다가
  깨끗하게 철판을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더 뚜렷하게 떠오르는
  울퉁불퉁한 세상을 본다
  내가 들고 있는 그라인더로는
  도저히 갈아 없앨 수 없는
  단단한 요철
                -김해화, [인부수첩 23]에서

  근육을 태워 만든 쇠들은 또 실려가서
  저들의 자가용이 되고 트로피가 되고
  고층건물이 되고 비행기가 되고
  총칼이 되어 우리 귓전에
  에밀레 종소리가 되어 돌아온다

  공장문을 나서면서 만나는 모든 쇠붙이에서
  우리의 가난과 살이 섞인 쇠붙이에서
  에밀레 종소리가 난다
  악쓰며 울부짖는 에밀레 종소리가 난다
                -백무산, [에밀레 종소리]에서

  김해화의 작품은 철판을 다듬는 노동현장의 경험에다 철판의 요철을 사회계급의 높낮이로 의식전환시키는 수법이 놀랍다. 백무산의 작품은 쇳물을 다루는 용광로 작업이라는 특수한 소재를 바탕으로 하면서, 에밀레 종소리의 이미지를 통해 노동자의 공동체적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문학의 가치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얼마나 잘 조화시키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교과서처럼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전문 문인의 글에서도 그런 작품을 만나기 어렵다. 박노해에서 시작된 노동시의 맥이, 80년대 후반 '민족문학 주체논쟁'이 뜨거울 때 '문학의 전선화'를 주장한 평론가들의 이론적 근거로 가능했던 것을, 그 어둡고도 화려했던 흔적을, 나는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박노해라는 이름을 가능하게 했던 시집 [노동의 새벽]에서, 사실 나는 표제작인 [노동의 새벽]보다는 [하늘], [포장마차], [통박], [손무덤], [어쩌면], [허깨비] 등의 작품을 더 절창으로 꼽는다. 특히 [통박]과 [손무덤]은 채광석이 지적한 바와 같이, 착취받고 억눌려온 노동자의 분노를 안으로 감추면서 겉으로 풍자와 해학을 담아내는 여유를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즐거운 고통에 빠져들게 한다. 또한 투철한 계급의식을 담아내 노동시가 지향해 나아갈 한 극점을 제시한 느낌마저 주며, 다 읽고 난 뒤 숙연한 자기반성에 젖게 만든다. 지금 내가 초점으로 삼은 작품 [노동의 새벽]과 함께 독자들께선 그 작품들을 다시 한번 꺼내 펼쳐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노동의 새벽]은 5연 40행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시의 내용 전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연 : 밤일을 마치고 새벽에 소주를 마시며 삶의 위기를 느낀다.
  2연 : 엉성한 식사와 고혈을 짜낸 노동에 위기와 체념이 겹친다.
  3년 : 스물 아홉의 나이, 노동-가난과 운명-에서 탈출하고 싶어한다.
  4연 : 내일의 노동을 위해 소주를 부으며 분노와 슬픔을 느낀다.
  5연 : 날이 밝기까지 마시는 소주가 사랑/분노/희망/단결로 연결되기를 염원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은 일정한 의도와 구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연은 철야작업이 끝나고 나서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하여 소주를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라고 위기를 느끼는, 발단 부분이다. 2연과 3연은 화자의 서로 상반되는 자세를 보여준다. 즉 2연은 '오래 못가도/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나타내면서, 3연에선 '진이 빠진/스물 아홉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운명을 어쩔 수 없다'는 갈등이 상반된다. 따라서 2.3연은 전개 혹은 갈등 부분인 셈이다. 4연에 이르러 '소주를 붓는' 것이 '분노와 슬픔을 붓는' 것으로 전환된다. 슬픔은 앞의 갈등의 연속이라면 분노는 체념을 넘어서는 힘이 된다. 5연에서는 4연에서의 분노의 힘이 더욱 확산되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치른 땀방울'로 퍼져나간다. 절망은 씻어지고 그 대신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희망과 단결의 의지를 다진다. 5연에서 절정과 화해를 이루고 있다.
  [노동의 새벽]이라는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제 선명해진 셈이다. '노동'은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새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사랑을 가슴에 지피려는 결연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삶의 고통과 초월이라는 대립구도는 사실 박노해의 시가 아니라도 문학의, 삶의 커다란 원형일 터이다. 하지만 박노해의 작품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단순한 대립구도나 갈등 때문이 아니다. 그의 갈등과 전환은 언제나 '절망의 벽'이라 할 수 있는 노동현실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그 운명을 감싸안으려는 몸부림을 절실히 그려낸다는, 아니 그런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우리의 가슴을 아름다운 슬픔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4연과 5연의 다음 구절을 보라.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4연에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5연에서>
  
  인용한 4연의 구절을 좀더 세밀히 살펴본다. 우선 '늘어쳐진/쓰린/차가운' 등의 이미지는 노동현실의 피폐함을 더욱 아프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런데 '소주'의 이미지는 두가지 속성을 지닌다. 즉 차가움과 뜨거움을 한 몸에 지닌 것, 바슐라르가 알코올이 물과 불의 두가지 속성을 지녔다고 했을 때와 같은 동시성을 바로 소주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소주의 이러한 속성은 차가움을 뜨거움으로 바꾸는 촉매가 된다. 시적화자를 포함한 노동자들이 마시는 차가운 소주는 곧 뜨거운 에너지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현실을 초극하는 힘을 제공하게 된다.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은 그러므로 현재의 피폐한 운명의 반복일 수 없다는 당위성을 갖는다.
  5연에서는 '돌리며 돌리며'라는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화자가 혼자 마시는 것인지 여럿이 마시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돌리며'라는 표현을 통해, 그가 함께 일을 끝낸 동료들과 한 패를 이루어 선술집이나, 새벽 해장국집이거나, 아니면 포장마차에 들러 마시는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한다. '돌리며'를 두번 반복하여 쓴 것은 다양한 느낌을 자아내게 만든다. 술잔을 여러번 주고받는다는 동작을 포함하여, 노동자들의 동지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술잔을 돌리는 음주문화는, 정확히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도 하는데, 그 의식 속에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서로 마음을 연다는 뜻, 서로가 동등하다는 뜻, 한 무리로 묶인다는 집단의식의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햇새벽은 화자 혼자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마시는 동료들, 나아가 노동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눌 모든 노동자들의 새벽인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술잔 돌리는 것을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잔을 다른 사람과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처럼 건강에 예민해진 세대들에겐 당연한 일이고, 사실 그들의 의견에 충분히 납득이 간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의 변화는 80년대와 90년대를 구별하는 중요한 점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80년대의 공동체적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고, 개별화 파편화된 일상이 지금의 우리에게 밀려왔다. 80년대와 90년대의 중반을 지나는 지금은 분명히 다르다. 모든 게 변했다.
  그렇다면 박노해가 염원했던 노동해방, '노동자의 햇새벽'은 이루어졌는가. 나는 이 질문에 감히 대답할 수가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90년대라는 한 시대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또 단순히 문학에 국한된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능력을 벗어난다. 다만 나는 박노해가 감옥에서 낸 두번째 시집 [참된 시작] 중에서 [강철 새잎]이라는 작품이, 그 상징적 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마지막에 인용하며, 이 글을 맺는다.

  저거 봐라 새잎 돋는다
  아가 손마냥 고물고물 잼잼
  봄볕에 가느란 눈 부비며
  새록새록 고목에 새순 돋는다

  하 연둣빛 새 이파리
  네가 바로 강철이다
  엄혹한 겨울도 두꺼운 껍질도
  제 힘으로 뚫었으니 보드라움으로 이겼으니

  썩어가는 것들 크게 썩은 위에서
  분노처럼 불끈불끈 새싹 돋는구나
  부드러운 만큼 강하고 여린 만큼 우람하게
  오 눈부신 강철 새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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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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