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미주문협 <여름문학캠프> 주제 강연 (시) -마종기 시인

2006.08.28 08:34

한길수 조회 수:1049 추천:27

제목; 현대시 작법에 대한 한 견해
      (A Perspective on Contemporary Poetry Writing)

                                 마종기(시인)

이 글은 우선 처음 만나는 여러분과 함께 토론할 문학캠프용 글임을 밝혀야하겠습니다. 그래서 논문이나 에세이로 읽기 위해 조리 있게 쓰여 졌다기보다 토론을 준비하는 한 마당의 멍석으로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제목에 명기했다시피 이 글은 내가 지난 4, 50년 이상 시를 써 오면서 읽고 배우고 경험해 온 시작법에 대한 내 개인의 의견입니다. 무슨 문학 개론 책이나, 시 창작 법에 대한 책이나, 인터넷에서 발췌하거나 떠온 것은 한 줄도 없습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과 방법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듯, 시를 쓰는 방법과 훈련 역시 여러 가지 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제목에서 유일한 방법이 아닌 ‘한 가지 방법’이라고 밝혔고 이런 길도 있다, 이런 길이 혹 어느 분의 시 쓰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의도로 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1. 무엇이 문학인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오랜 경험을 가진 문학교수도 아니고 언어 계통의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의학을 공부하고 외국 의사로 평생을 지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문학에 대한 내 글은 논리적이라기보다 문학적 탐색 같이 펼쳐질 것입니다. 문학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고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거기에 문학의 정의가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문학은 상상이나 감정을 통하여 독자에게 호소하는 언어 예술로서 미적 가치를 지니는 정신적 산물의 총칭이다’
그러나 문학의 이런 의미를 외운다고 문학가가 되고 대학공부에서 문학 개론에 통달했다고 소설가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 3년 전, 서울의 ‘문예진흥원’ 주최로 많은 청중 앞에서 한 평론가와 함께 <문학은 구원인가, 놀이인가>하는 재미있는 제목으로 담론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평론가는 토론을 열면서 내 시가 놀이적인 측면과 구원의 측면이 있다고 말해 주어서 나는 잠시 감동했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니까요.
그러나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계몽의 변증법>으로 유명한 현대의 사회 철학자 ‘아도르노’(T. Adorno)가 갈파한 <아유슈빗츠의 비극 이후에도 세상에 서정시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유명한 말. 문학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문학은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닐 것입니다. 2차 대전 중 독일 군인들은 유태인 수용소에서 사람을 무더기로 매일 죽이고, 피곤하고 혼돈된 마음을 가라앉힌다고 밤에는 ‘화우스트’를 읽고 휠덜린의 시를 읽고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음악을 들었다니 문학이 어찌 그 자체로 구원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시가 구원을 암시하고 인간과 인간의 좋은 유대관계를 강조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믿음을 나는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문학은 특히 사람들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살아가는데 제일 방해가 되는 두 가지 요인, 즉 무지와 이기심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끈기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의 한계점 역시 큰 것이어서 문학을 즐길 수 있는 부류가 한정되어 배고픔이 없는 자와 교육을 받은 자만이 향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몇 해 전, 모국의 ‘한국일보’에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50여명의 시인, 소설가들이 25매의 글들을 신문 한 페이지에 오래 연재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썼던 내 글 중의 마지막 일부를 여기에 다시 적으면서 문학에 대한 내 의견을 여러분께 열어 보입니다.

나는 문학을 왜 하는가?
문학은 내가 외국에 나가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은 어둠 속을 헤맬 때, 또 내가 불안과 당황과 절망의 늪에서도 크게 낯설어 하지 않고 찾아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기 때문에 계속해왔다.
물 찬 제비같이 날렵하지는 못해도 사람답게 생각하고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내가 매달린 신명나는 놀이였고, 황홀이었고, 진심이었다.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도구로서 내 시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 시는 언제나 내 진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진심이 아닌 것이 어떻게 인간을 위로할 수 있으랴. 그래서 나는 시 앞에서는 정직하려고 했고 성실하려고 했다.
- 중략 -
시가 고급스런 게임이고 장난이고 놀이이기만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값비싼 향수로 치장된다고 해도 이제는 전자게임이나 컴퓨터 놀이의 흥미를 따라갈 수 없게 되었고 결국에는 천천히 외면 받아 소멸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시가 정치적 선전도구나 사회 정의의 호소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획일적 템포의 구호나 현란한 표어나 뜨거운 격문의 힘과 열기에 어찌 비교가 될 것인가. 피 냄새를 많이 맡아오며 살아온 때문인지 나는 그런 시에서 풍기는 땀 냄새와 피 냄새에서 수상한 자극제의 기미를 많이 느끼고 진정한 껴안음의 힘을 보기 어렵다
- 중략 -
문학은 어차피 서로간의 껴안음이고 나눔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에 전쟁과 살육이 그치지 않는 이 세상에서, 또 어느 한 쪽에 편들어서 정의와 평화를 부르짖는 무리의 함성 속에서, 아직까지도 의연하게 인간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어쩌다 나는 평생을 의사로 지내오면서 인간의 육체적 조건과 항상 가깝게 함께 어울려 살아왔다. 그래서 내 문학의 화두는 자연히 생명이었다. 인간의 생명은 언제나 희망과 사랑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 따뜻함이 그리워 나는 시를 써왔고 시를 쓰는 동안의 어줍잖은 고통까지도 껴안으려고 했다.
      (‘신명나는 놀이, 혹은 황홀’ 중에서)  

2. 시를 향한 우리의 자세
이제 문학의 한 부분이고, 문학의 첨단병인 시에 대해서 말해 보십시다. 나는 여기서 현대시가 무엇인가를 강의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시인이시고 문학가이신 여러분들과 함께 오늘의 시에 대해 토론하듯이 문제점을 지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우선 내가 좋아하는 글을 몇 줄 읽어볼까 합니다. 이글은 연작시 <두이노의 비가>나 소설 <말테의 수기>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롸이너 마리아 륄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Briefe an einen Jungen Dichter) 중의 한 부분입니다.

......... 당신은 당신의 시가 좋으냐고 내게 묻고 있습니다. 충고를 해도 좋다고 했으므로 감히 말하는데 제발 그런 일은 이제 그만 두도록 하십시오. 자기 속으로 파고들어 가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에게 시를 쓰라고 명령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리고 쓰고 싶다는 욕구가 당신의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뿌리가 뻗어 나오고 있다면, 만일 쓰는 일을 그만 둘 경우에는 차라리 죽어버릴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조용한 밤에 나는 정말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인가를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 밑바닥에서 나오는 대답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십시오. 만일 그 대답이 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명확한 대답을 내릴 수 있거든 당신은 당신의 생애를 이 필연성에 의해서 만들어 가십시오. 당신 생활의 하찮은 순간까지도 그 절박한 충동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 모방하지 말고,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또 잃게 될 것을 표현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런 모든 것이 마음에서 울려 나오도록 은근하고 겸손하게 묘사하십시오. 창조자에게는 가난이 없으며 그냥 지나쳐 버려도 좋을 하찮은 장소란 없습니다.
당신은 혹 자신의 고독 속으로 파고든 뒤에 시인이 되겠다는 것을 포기해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앞서 말했듯이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쓰지 않고서도 살아 갈 수 있겠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

여러분은 이제 준비가 되셨습니까? 정말 시를 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한 편의 완벽하고 좋은 시를 위해 열 달씩 밥 먹기를 잊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아 보았습니까? 시 한 편을 완성하고 나름대로 그 아름다움과 애처로움에 질려 북받쳐 오는 감정으로 자신의 시를 읽으며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눈이 붓도록 울었습니까?
여러분은 또 여러분이 피땀 흘려 쓴 시를 읽고 또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고치고 다시 고쳐서 언제 어디서나 완벽하게 외울 수 있는 시가 몇 편이나 됩니까? 열편이 됩니까?
나는 시가 안 써지거나 시 쓰기가 귀찮아지거나 문학자체에 회의감이 들 적에 이 글귀를 자주 읽으며, 젊은 날 문학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일을 여러 번 되풀이 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문학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시에 모든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시인은 선구자고 선험자고 길잡이이자 현자입니다. 현자는 남보다 더한 고난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며 즐거이 이겨냅니다.

두 번째 글은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혔다고 회자되는 고 김수영 시인이 1968년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쓴 <시여, 침을 뱉어라> 라는 시평 중에서 몇 줄을 적어봅니다. 이 글은 우리가 시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를 암시 해 줍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이다. 온몸으로 온몸을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시의 형식이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

여러분은 시를 쓸 때 여러분의 얼마를 시 쓰기에 투자 하십니까? 온몸으로 ‘올인’ 하십니까? 시 한편에 나를 ‘올인’해서 세상에 태어나서 이것이 내 생애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쏟습니까?

3. 현대시의 사조와 소재.
현대 시는 영원불변성과 현장성을 동시에 가져서 서로 교감하고 직조되는 특수 물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노래가 되는 리듬 감각과 진심에 호소하고 진실에 가까워짐으로서 느껴지고 보여지는 미적 감각이 그 불변성이라고 한다면, 현장성, 현재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대적 감각은 항상 변할 수밖에 없는 한 상태와 조건의 표현력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이나 수필에서 혹 간과될 수도 있는 표현력이 현대시에서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표현력 그 자체가 시 전체의 색감이고 구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소월, 윤동주, 한용운의 시적 감수성과 진실성이 그 시의 품위나 시인의 자질에는 중요하면서 그런 식의 표현은 이제는 진부한 것이 되어 금기조항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는 그 표현의 장력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고 근본적으로 모험의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표현력, 그 자체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다고 극단적으로 말 할 수도 있겠습니다.l
그래서 소위 ‘무의미시’ 라는 것이 지난 20여년 인기를 얻고 자크 데리다 (J. Detrida)의 해체 (deconstruction) 개념이 여기에 운용되고 이해되는 것입니다.
문학 이론서는 시인에게는 필요악이라고 간단히 평할 수도 있습니다. 시문학의 이론이나 사조를 모르면 방향타 없는 배가 되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되지만, 사조에 너무 민감하거나 지배되면 그 시는 작위적이 되고 시가 가지는 자유의 광채를 잃게 되는 수가 많게 됩니다.
우리는 현대시라고 아직 부르고 있는 일련의 시의 탄생을 스테판 말라르메 (S. Mallerme)의 상징주의와 에즈라 파운드 (E. Pound)의 이미지즘부터 시작된다고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언어와 언어의 상충관계, 언어의 긴장감이나 탄력, 형용사나 감탄사의 배제 같은 것을 우리는 여기서 배워 이용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후에 앙드레 부르통 (A. Breton)의 초현실주의 실험에서 보는 ‘자동기술’같은 시적 변용, 1970, 80년대 한국을 휩쓸었던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이나 미셀 푸코 (M. Foucault)의 광기에 대한 저서와 언술이 권력에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 그리고 후기 구조주의의 첫 주자인 롤랑 바르트 (R. Barthes)가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즐거움은 관능적 쾌감과 정신적 희열의 의미를 ‘초월’로 느낄 수 있다는 기호학의 요소들이 적게든 크게든 한국 현대시에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프로이드의 이론을 현대 문학이론으로 발전시킨 ‘언어와 무의식’의 자크 라캉(J. Lacan)이 쓰기 시작한 은유와 환유의 상징적 이미지 표현, 또 한국서는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해체시학 이론이 많은 시작품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특정한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 해체함으로서 새로워진다는 해체시들은 아직도 한국의 시 문학권을 상당히 차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 했듯이 이런 현대시의 사조나 철학적, 미학적 주장들이 고국에서 무슨 이유에서든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 그 주위까지 모두 그 일색이 되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포스트모던이고 너도나도 후기구조주의를 중얼거립니다. 모두들 흰 셔츠에 곤색 싱글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출근해 누가 누군지 모르는 모국의 아침 출근길처럼 문학 판에서도 심한 인기 돌림이 횡횡하고 있습니다. 누가 한번 ‘고래’나 ‘낙타’ 이야기로 멋을 부리면 많은 한국의 시인이나 소설가가 너도나도 고래요 낙타 이야기이고, 누가 돈황을 들먹이면 모두가 실크로드로 달리고, 그 길은 이제 바이칼 호수에 이르렀습니다. 앤티 아메리카니즘도 그런 맥락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좁은 나라에 사는 한국 문인들의 위험하고 협소한 시야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서양 철학이나 문학 사조도 좋지만 동양인으로 ‘노자’나 ‘장자’의 드넓고 깊은 시야를 공부 하는 것도 시공부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다. 중국의 두보나 이백의 시나 한산 시, 우리 선조들의 시나 산문은 물론 선불교나 성경에서도 우리는 아름답고 의미 깊은 시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4. 공동체 운명의 길
그러고 보면 우리들, 여기 계신 여러분과 나는, 어떤 의미로는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싫어도 좋아도 교포시인이고 해외 시인입니다.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모리스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부정의 공동체’이든 조르쥬 바타유의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공동체’든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운명공동체의 한 부류가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이런 공동체에 대한 ‘빛과 그늘’에 대해서 잠시 생각 해 보십시다. 우선 우리들의 ‘그늘’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대형 책방이 없다는 것도 하나가 되겠지요. 문학책을 풍부하게 접할 수 없으니 문학적 자극을 얻기 힘들고 좋은 작품을 많이 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보다 큰 그늘은 아마도 주위에 문학하는 친구가 많이 없어서 문학수업을 함께 못하고 서로 격려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다음은 아마도 모국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많이 향유할 수 없다는 것, 모국의 산천에 둘러싸여 생활할 수 없다는 것, 다른 언어를 생활언어로 써야 하는 것도 그늘이 될 수 있겠습니다. 모국에서 잘 쓰는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삶을 여기에 쓸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한국의 문학가, 평론가들이 미주 교포 문인을 싸잡아 얕잡아 보는 것일까요? 교포 시인들은 공부를 안 한다, 시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70년대에 고국을 떠난 시인들은 아직도 70년대의 언어로 70년대식의 시를 쓴다고 합니다. 책을 많이 안 읽으니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실력이 떨어지니 아무리 밤을 지새도 옛날 소리만 지껄이게 되는 것이지요. 모국의 문인을 원망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게으름 탓입니다. 모국의 좋은 시인들의 생활을 보세요. 얼마나 그들이 열심히 시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아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우선권이 다릅니다.
70년대, 80년대에 유행하던 옷을 입고 파티에 가십니까? 요즈음 쓰여 지는 시를 못 읽어보아서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모르는 것일까요? 사업이 바빠 책 읽고 공부 할 시간이 없다면 아예 당분간 시를 쓰지 않아야 합니다. 재주만으로 글을 쓰던 시대는 종친지 오래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부었습니까? 학위를 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습니까? 그런 정성과 시간의 1/10만 시를 위해 바치세요. 그 정도의 노력과 정성도 없이 세상의 그 누구를 감동시키겠다는 것입니까?
‘이태백 증후군’ 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태백이 어느 날 술을 잔뜩 마시고 호수에 비친 달을 보다가 시를 쓰기 시작했고 매일 하루에 열편도 더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오늘의 이태백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마세요. 바로 그 이태백은 1300년 전 사람이고, 수억 인구의 중국인 중 손꼽히는 천재고, 시를 쓰기 전 읽은 중국의 고전과 시집이 수 천 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훌륭한 사업가가, 과학자가, 피아니스트가, 발레리나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수 십 년 쏟아 부어 주위에서 존경을 받게 됩니까? 시인이 되는 것은 공짜인가요? 이런 전문인들의 노력의 1/10도 시 공부를 위해 투자할 용의가 없는 분은 아예 시 쓰기를 집어치우는 것이 몸에 좋습니다. 공연히 스트레스만 쌓입니다. 문학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가를 준엄하게 당신에게 묻고 있는 뢸케에게 목숨까지는 못 바쳐도 십일조는 한다고 말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공동체에 그러면 ‘빛’은 없을까요? 모국의 문단을 침 흘리며 부러워하는 일밖에 없을까요? 나는 빛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많은 분들이 나와 동감을 하실 것입니다.
우선 색다른 문학적 소재와 신선한 자극을 모국보다 더 받고 즐길 수 있습니다. 고국에서는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하는 산천과 풍경과 이색적인 생활 풍습도 좋은 소재가 될 수 있고 무엇보다 앞서가는 예술과 접촉함으로 문학적 자극을 적극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전위적인 음악과 무용과 시 낭독회가 있습니다. 미술관에 가서 드뷔훼나 폴락의 그림 앞에서 30분 동안 넋 놓고 그림을 응시 해 보세요. 한 줄의 시가 섬광같이 빛을 내며 당신의 가슴을 찌를 것입니다.
모국의 그 문학적, 예술적 획일성을 거부하고 데스 벨리로, 록키 산록으로 드라이브를 가세요. 문학의 질료가 되는 천혜의 선물은 여러분이 노력하고 찾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두지 못하고 씨를 뿌리고 찾아 헤맨 만큼 확실한 수확을 약속 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의 철칙입니다.

5. 텍스트와 실습
우선 텍스트로 내 시를 몇 개 사용하는 것을 이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시이기 때문에 시를 쓰게 된 동기나 전개, 발전, 그리고 그 사이의 이야기를 비교적 정확하고 자세하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내 시를 골랐습니다. 많은 분들과 나누는 이야기라 우선 쉬운 시를 골랐습니다. 시를 읽고 함께 토론할 이 실습이 내 시작법의 견해를 밝히는 주 내용이 되겠습니다.

A. 바람의 말 (1977년 작)
        1. 은유에 대하여
        2. 대상의 유무
        3. 시의 다면성
B. 우화의 강 (1990년 작)
        1. 강조와 반어법
        2. 형용사와 감탄사
        3. 사랑, 외로움, 그리움들.
C. 온유에 대하여 (2000년 작)
        1. 시어- 언어의 연금술
        2. 긴장감, 탄력성
        3. 주제와 표현력
D. 캄보디아 저녁 (2005년 작)
        1.진실과 노래
        2. 자유로 가는 길
        3. 난해와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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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시>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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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강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 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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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에 대하여

온유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그 사람 빈집 안의 작은 불꽃이
오늘은 더욱 맑고 섬세하구나.
겨울 아침에 무거운 사람들 모여서
온유의 강을 조용히 건너가느니
주위의 추운 나무들 눈보라 털어내고
눈부신 강의 숨결을 받아 마신다.

말과 숨결로 나를 방문한 온유여.
언 손을 여기 얹고 이마 내리노니
시끄러운 사람들의 도시를 지나
님이여 누군가 어깨 떨며 운다.
그 겸손하고 작은 물 내게 묻어와
떠돌던 날의 더운 몸을 씻어준다.

하루를 마감하는 내 저녁 속의 노을.
가없는 온유의 강이 큰 힘이라니!
나도 저런 색으로 강해지고 싶었다.
불타는 뜬구름도 하나 외롭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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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저녁

천 년을 산 나비 한 마리가
내 손에 지친 몸을 앉힌다.
천 년 전 앙코르와트에서
내 손이 바로 꽃이었다는 것을
나비는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그 해에 내가 말없이 그대를 떠났듯
내 몸 안에 사는 방랑자 하나
손 놓고 깊은 노을 속으로 다시 떠난다.
뜨겁고 무성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뒤뜰로만 돌아다니는 노란 나비

흙으로 삭아가는 저 큰 돌까지
늙어 그늘진 내 과거였다니!
이제 무엇을 또 어쩌자고
노을은 날개를 접으면서
자꾸 내 잠을 깨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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