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된 감흥을 즐기는 언어의 집 -주경림

2005.10.13 02:02

한길수 조회 수:950 추천:36


시인은 자아와 세계의 중재자로서의 언어를 가지고 세상과 접촉을 한다. 언어를 가지고 하는 ‘놀이’로 세상과 접촉하며 그 시대의 실상을 첨예하게 받아들인다. ‘놀이’란 ‘일’과 대립되는 개념을 가진 활동으로 어떠한 강제성 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자체가 즐거움과 기쁨이 된다. 그러나 무릇 시인을 비롯해서 예술가들은 ‘놀이’가 ‘일’이 되는, ‘일’이 ‘놀이’가 되는 행복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禮記』의 「樂記」편에서도 ‘즐거워서 말을 하고 말로서는 부족해서 길게 시를 읊고 노래와 춤을 춘다’(故言之 言之不足 故長言志 長言之不足 故嗟嘆之 嗟嘆之不足 故不知手之無之 足之踏之也)며 ‘놀이’로부터 ‘시’가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시인의 언어를 매개로 하는 놀이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되 현실 세계와는 또 다른 허구의 세계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시인의 자유 자재한 상상력으로 독자적인 영역인 시의 세계에서 주제와 접근 방식, 표현 방법의 새로움이라는 시적 체험을 하게 된다. 영국의 철학자 흄(D. Hume)에 의하면 감각에 의해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제공된 상상력은 원래 마음 속에 내장(內藏)된 생각들의 세계를 떠날 수는 없지만 다양한 허구와 예시의 형태로 마음 속의 생각들을 자유롭게 혼합시키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하는 무한한 힘을 지녀 변용을 가능하게 한다고 했다. 시인이 언어를 매개로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집을 짓는 신명나는 놀이판으로 이동해본다.

2.

찰나와 찰나 사이에
쐐기를 박는 연습을 한다

사람에게 한줌 여유도 주지않는
빽빽이 이어진 찰나들의 행진.
음식을 입에 넣으면
서로 다투어 음식을 끌어당기는
혀, 목구멍, 식도의 끈질긴 운동 같은.
하지만 필요할 땐
빙산의 크레바스처럼 벌어져
사람의 목숨쯤은 단숨에 삼키기도 하고
영겁의 번갯불을 잠시 보여주기도 하는
찰나와 찰나 사이의 간격.
찰나와 찰나 사이에
쐐기를 박고
내 번뇌나 거드름,
또는 세상 실경을 한동안 끼워넣는
그런 연습을 한다.
―고창수, 「찰나」

고창수 시인의 시에서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의식 너머의 내면 세계를 보여준다. ‘찰나’는 보이지 않는 일종의 시간의 내면 세계인 셈이다. 찰나는 불교에서 시간의 최소 단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찰나는 1/75초(약0.013초)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찰나와 찰나 사이란 우리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짧은 시간일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찰나와 찰나 사이에 박을 수 있는 쐐기란 어떤 것일까. 찰나와 찰나 사이가 크게 확대되어 물질화되거나 아니면 쐐기라는 물건이 시간의 차원으로 관념화될 수밖에 없다. 시의 뒷 내용으로 미루어 본다면 전자가 맞을 듯 싶다. ‘쐐기를 박는 연습’이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찰나와 찰나라는 관념 속으로 시인의 자아가 개입되는 ‘예술적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둘째 연에서는 첫 연에서 다소 의아스럽고 모호해보였던 ‘예술적 현실’이 비유를 통하여 구체화된다. ‘찰나’가 관념의 옷을 벗고 육화(肉化)되는 과정에서 시인은 이미지의 불꽃을 화려하게 피어올린다. 즉, ‘찰나들의 행진’은 목구멍으로 음식을 넘기기라는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빙산의 크레바스처럼 거대한 자연 현상에 이르기까지 확장된다. 사람의 목숨과 영겁의 번갯불은 시공을 초월해서 찰나와 찰나 사이의 간격에서 생성 소멸하게 된다.
마지막 연에서는 무한대로 확대된 찰나의 시간은 다시 내가 개입할 수 있는 근원적인 자리로 돌아온다. ‘내 번뇌나 거드름’, 또는 ‘세상 실경’이 ‘영겁의 번갯불‘을 보여주기도 한 바로 그 자리에 쐐기를 박고 끼이게 된다. 시인은 나와 세상이 무한으로 확대되는 우주적 질서의 한 고리로 편입되는 현상을 ‘연습을 한다’는 표현을 쓴다. 현실적으로 감당하기에는 무리해보이는 시의 세계는 ‘연습을 한다’는 표현으로 설득력을 갖게 된다. 시인에게 ‘연습’은 가장 짧은 시간의 단위인 찰나와 찰나 사이에 끼여들어 사고의 폭과 유연성을 길러 정신의 깊이를 보여주는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놀이’인 셈이다.

돌의
둥근 굴레를 따라 맺힌 이슬마다에 붉은 태양이 들어있다
태양은 언제 이슬을 깨고 나올까
이것이 나의 현재
내가 바라보는 것의 전부

농익은 포도가 저절로 터져 퍼런 과즙이 흘러내린다
땅은 큰 잔
땅 위에선, 모두가 자유롭디
이것이 나의 현재
내 입안의 포도

저녁이다
신들이 제가끔 지상으로 내려온다
불 켠 집들이 하나, 둘 그곳에 가 들인다
이제, 신이 이곳으로 오리라
제가 창조한 것들을 보러
순간이 그 일을 하리라

한 말의 씨앗 속에 든 이 많은 꽃들이여!
―류수안, 「그것이 사실일까」

류수안 시인의 시를 어떻게 읽어내려갈까 하는 고민은 사실상 한낱 기우에 불과하다. 눈 앞에 펼쳐진 언어로 지어진 그 집의 풍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시인은 우주와 신들의 세상, 인간 세상과 물질 세상을 통째로 아울러 지면 위에서 한바탕 놀이판을 벌인다. 시인의 시각은 기존의 틀에서 훌쩍 벗어나는 시적 상상력의 일탈을 즐기므로 독자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실험적인 시들, 도전적인 시들, 일반 대중들의 눈높이와는 거리가 있는 시들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왔다’며 타성에 젖은 일상성을 언제나 예술의 적으로 경계하는 김춘수 시인의 말을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류수안 시인의 시 세계는 해독이 불가능해 보일지 몰라도 잠시 그 곁에 머물어 그 낯선 세계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감흥이 넘치는 매력적인 공간임에는 틀림 없다.
첫연에서는 돌과 돌에 맺힌 이슬, 이슬마다 들어 있는 붉은 태양이 ‘나의 현재’와 동격으로 처리되어 있다. 장차 시적 화자인 나는 이슬을 깨고 나올 태양이 되는 모양이다. 둘째 연에서는 농익은 포도에서 터져 흘러내린 포도즙을 받는 땅은 큰 잔으로 비유된다. 태양과 포도의 이야기를 하다가 셋째 연에서는 돌연, 저녁이면 신들이 내려온다며 무대 장치를 완전히 바꿔 버린다. 독자로서는 시인의 자유자재한 상상력이 어디로 튈지 모를 팽팽한 공 같아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셋째 연의 마지막 행, ‘순간이 그 일을 하리라’는 예언이나 전언처럼 시 전체에 효력을 미쳐서 각각 독립적으로 보이던 세 연이 하나의 장면으로 겹쳐지는 시적 경험으로 유도한다. ‘순간’은 또한 미래를 예비하는 잠재력을 갖춘 듯, 한 말의 씨앗 속에서 많은 꽃들의 세상까지 내다보게 된다. 류수안 시인의 시에서는 구태여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아도 시의 발상과 접근 방법의 새로움 자체가 경이로움이다. 또한 신성(神性)과 인간성, 자연의 세계가 한데 어울려 놀고 있는 듯 신비함마저 들어 즐거움은 더욱 커진다.

그게 맨드라미꽃이었던가

맨드라미 꽃술에 꿀벌이 들자마자
신고 있던 고무신으로 냅다 나꿔채어
그걸 귀 가까이에다 빙빙 돌려본 것인데

아마 그때 웽 웽 불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랬었구나 아무래도 결국엔

내 스스로의 화엄이든 연옥이든 어디든 가서

불을 맨발로 밟아 꺼야 할 것 같다.
―신현정, 「고백」

신현정 시인의 「고백」은 지면 위에 마치 활자가 튀어나와 수탉의 벼슬 모양의 맨드라미 한 송이라도 쑤욱 뽑아올릴 것처럼 입체감이 강렬하다. 색감과 소리로서 시각과 청각을 자극시켜 강렬함을 한층 고무시킨 다음, 그 강렬함을 떠나 내적인 성찰의 세계―‘내 스스로의 화엄이든 연옥이든 어디든 가서/ 불을 맨발로 밟아 꺼야 할 것 같다.’―를 보여주고 있다. 꿀벌이 맨드라미꽃 속으로 들어가 꿀을 찾는 순간의 즐거움과 기쁨이 바로 ‘화엄’ 이라면, 얼떨결에 고무신 속에 갇힌 꿀벌의 웽웽거림은 바로 출구를 찾기 위한 두려움과 고통으로 가득한 ‘연옥’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맨드라미 꽃술에 들어간 꿀벌을 고무신으로 나꿔채어 빙빙 돌려보는 것은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보았을 놀이이다. 출구를 잃은 고무신 속의 꿀벌들이 웽웽거리는 다급한 소리가 불자동차의 달리는 소리로 들리면서 시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단순한 놀이에서 불자동차의 연상은 사건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맨드라미와 꿀벌이 불자동차라는 이미지로 확대되면서 웽웽거림은 불자동차 사이렌 소리로 점점 커지면서 소리에 집중하여 삼매를 얻는 이근원통(耳根圓通)의 수행법처럼 소리마저 떠나보내고 ‘그랬었구나 아무래도 결국엔’이라고 내심으로 확연대오(廓然大悟)한다. 시인의 깨달음은 불교나 캐톨릭의 어떤 종교적인 초월이 아니라 자신의 불은 ‘맨발로 밟아’라고 정면 대결의 승부수를 둔다. 이제 시인 자신쪽으로 불길이 당겨지는 것이다. 화엄의 기쁨이나 연옥의 고통일 수 있는 자기 내부의 불길을 꺼나가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맨발’이 된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풀어나가겠다는 ‘맨발’의 의미가 강렬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맨발’은 아무런 가식 없이 진흙밭 수렁에서 솟아난 한 송이의 백련처럼 청정하고 아름답게 ‘화엄이든 연옥이든’ 세상살이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구원의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나는 놀고 있다. 강아지풀하고 염소하고 빗자루하고 구름 비 달 해 바람 풀하고 놀고 있다. 어디 상생의 이치가 따로 있겠느냐 놀고 놀아주고 길동무하는 것이다.’라는 시인 자신의 말을 통해 시인은 ‘놀이’인 ‘시’로서 자신의 내면 세계를 꿈꾸며 가꾸어나가는 자임을 알 수 있다.

건전지는 극과 극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물려 있다. 愛와憎, 삶과 죽음의 자웅동체이다 어느 것 하나로는 심장은 뛰지 않는다 내 사랑도 죽이고 싶을 만큼의 똑같은 전압이 아니었다면 너와 나와의 온몸에 저릿저릿한 피를 흐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몸에 꼭 맞는 관 속에 누워 죽어가면서 건전지가 극과 극에서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불꽃
―복효근, 「生」

복효근 시인의 「生」은 시한부의 생명을 가진 건전지에서 삶의 비의(悲意)를 읽어내는 직관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건전지의 양극을 ‘愛와 憎, 삶과 죽음의 자웅동체’로 비유한 점 또한 흥미롭다. 愛와 憎, 삶과 죽음을 나누는 이분법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자웅동체로서의 건전지의 속성을 제시한다. 단지 첫 행을 지났음에 불과한데 어느 것 하나로는 심장이 뛰지않는 운명적인 공동체 임을 인정하고 감수해야 한다는 존재론적인 통찰에 이르게된다. 건전지에서 +극인 사랑이 저 홀로 전류를 흐르게 할 수는 없듯이 전류가 흐르는 것, 우리 몸에 피가 흐를 수 있음은 죽이고 싶을 만큼의 똑같은 전압인 -극 덕분인 것이다. 사랑과 미움은 접시저울에 달았을 때 어느 한 쪽도 기울지 않는 같은 무게로서 삶의 평형을 이루는 것이다.
이미 그의 시 「석쇠의 비유」에서도 ‘너를 사랑하기에 숯불 위에/ 내가 아프다 너를 죽도록 미워하기에/ 너를 안고 뒹구는 나는 벌겋게 앓는다’와 같이 愛와 憎은 분별을 넘어 한 몸을 이루고있다. 「석쇠의 비유」에서 격렬한 감정적인 토로는 「生」에 와서는 ‘아름다운 불꽃’으로 승화되어 관조의 자세를 보여준다. 삶을 관조하는 자세는 중국 선종의 제3조인 승찬대사(僧璨大師)가 지은 『信心銘』의 한 구절, ―‘但莫憎愛 洞然明白’(사랑하고 미워하는 증애심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툭 트여 명백하게 성취할 수 있다)―을 떠올리게 한다. ‘제 몸에 꼭 맞는 관 속에 누워’는 이승에서 주워진 운명적인 사주 팔자, 혹은 제 나름 대로의 그릇 크기대로를 말함이리라. 生은 결국 죽어가면서 건전지가 극과 극에서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불꽃과 같은 것이다. 제 몸을 불살라 피워내는 꽃, 짧은 순간의 황홀함이다.

10년 동안 자리 잡힐 대로 잡힌 봉분을 파헤치기로 했다. 背山臨水 左靑龍 右白虎 누가 봐도 명당자리에 아버지집을 짓고, 잊을 만하면 들러 술 석 잔 뿌리고는 효녀인 양 살다가 죽을 듯이 삶에 지칠 즈음 아무래도 이 팔자가 꼬인 것은 명당값도 못하는 조상탓인 것 같아 아버지집을 허물기로 했다. 한 삽 한 삽 퍼올리는 동안 시간의 켜를 허물고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10년 동안 아무도 몰래 흘린 눈물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오들오들 떨고 계신 아버지를 붙들고.
―김주혜, 「億丈」

‘억장’(億丈)은 사전적 의미로 ‘매우 높음’의 뜻으로 억장지성(億丈之城)의 준말이라고 한다. ‘억장이 무너지다’라고 흔히 쓰는 표현은 몹시 분하거나 슬픈 일이 있어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다는 뜻으로 그렇게 애써서 쌓은 성이 무너졌으니 공들여 해온 일이 쓸모가 없어져 몹시 허무한 상황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김주혜 시인의 「億丈」에서 언어는 시에서 표현 이상의 의미를 지님으로써 독자의 영혼을 뒤흔드는 듯한 파장이 긴 여운을 오래도록 남긴다.
명당값도 못하는 조상탓에 아버지 봉분을 파헤치기로 했다는 시 작품의 동기가 옛속담에 ‘잘 되면 제탓, 못 되면 조상탓’ 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정서에 큰 호소력을 지닌다. 또한 ‘잊을 만하면 들러 술 석 잔 뿌리고는 효녀인 양 살다가’ 라는 자기 고백에는 아픈 데라도 찔린듯 공감하게 된다. 진정으로 돌아가신 이를 위함이라기보다 다분히 허례허식적인 우리의 삶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인 ‘이 팔자가 꼬인 것은 명당값도 못하는 조상탓인 것 같아 아버지집을 허물기로 했다.’에 이르면 좀 지나치지않나 하는 생각과 함께 봉분을 파헤치는 데 공범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시, 「億丈」의 매력은 바로 자기 합리화를 적당히 시키가면서 시의 제단에 자신을 희생양으로 받쳐 솔직한 언어로 독자들을 차츰 자기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한 삽 한 삽 퍼올리는 동안 시간의 켜를 허물고’에서는 극단으로 치닫던 화자의 생각도 무너진다. 세속적인 욕망은 힘들고 지치게 하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내면에 교묘하게 감추어진 이중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아버지를 따라가겠다는 발버둥에서 시는 절정에 오른다. 자기 합리화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 하는 반성은 감정이 격해지면서 발버둥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10년 동안 아무도 몰래 흘린 눈물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오들오들 떨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또한 얼마나 무죄(無罪)한가. 이승을 떠났어도 도움을 주려고 했던 아버지의 사랑도 어쩔 수 없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버지를 붙들고 발버둥치는 화자의 모습은 비극적인 만남이지만 가장 밑바닥까지 간 절망 너머의 삶을 뜨겁게 끌어안았으니 다시 일어서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져보아도 좋을 것이다.
충남 삽교호, 겨울이면 가창오리 날아와 수만 마리 떼, 떼지어 바닥에 내려앉았다가 떠오르는데 구름섬 같은 회화를 황금빛 하늘에 조였다가는 풀어주고 쭈욱 폈다가는 접으면서 하늘에 굵은 한 획으로 묽은 붓질하는데

저 묽은 붓질 한 획은 수만 마리의 목숨을 이어놓은 사슬,
사슬의 고리일 테지
놓을 수 없는 因果의 숨줄 끊어질세라
푸드득 푸드득
물결에 쏟아져 내려앉는 저녁 날개들

아무도 묽은 붓질 한 힉의 고리 어디쯤을 끊어 버리지 못하는데 사슬고리 끊어 버리고 싶은, 어두워질수록 혈맥 붉게 핏대 오르는, 초저녁 노을, 진초록 물결에 햇살 파편으로 잘게 꽂히는데 얼결에 상처처럼 튀어오르는 날개빛 목숨들, 섬 하나로 떠 있던 生의 시슬고리들, 차르르르…… 떼, 떼지어 줄줄이 딸려 올라가서는 검붉은 노을이 퍼지는 하늘에 반투명 환각 같은 구름섬,

섬 하나로 지금 막 떠오르는 중이다
―유수연, 「구름섬, 지금 막 떠오르는 중이다」

유수연 시인의 「구름섬, 지금 막 떠오르는 중이다」는 겨울날 붉게 타오르는 초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수십만 마리의 가창오리떼의 군무(群舞)를 그린 한 폭의 수묵담채화를 대하는 것 같은 정취를 불러일으킨다. 노을 지는 하늘 화폭 속으로 붓질의 먹이 채 스미기도 전에 물결 위에서 단숨에 또 하나의 획이 그어지고, 묽은 붓질로 그려나간 그 획들은 생명의 사슬 고리들로 연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生을 이룬다. 하나의 커다란 生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因果의 숨줄’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의 호흡 또한 길어 가창오리들이 떼지어 날아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또한 마침표 없이 이어나간 행과 행의 연결이 ‘수만 마리의 목숨을 이어놓은 사슬’의 이미지와 잘 들어맞는다. 마치 시인이 사슬 고리의 긴 줄의 끝이라도 움켜쥐고 삽교호의 바다와 하늘 사이의 공간에서 멈추었다 스르륵 풀어주었다 하며 흔들어대는 것 같다. 긴 줄의 끝이 물결에 닿았을 때 내려앉는 가창오리떼는 ‘저녁 날개들’이라는 시간의 이미지를 갖는다. 첫 행에서 언급한 ‘겨울’이 자연스럽게 ‘저녁’의 시간대로 구체화된다. 형식적으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시인의 치밀한 구성력과 언어를 주무르는 솜씨가 돋보이는 구절이다. 날개들이 내려앉아 있는 잠시, 시인은 시의 연을 나누며 또 한바탕의 비상을 위하여 호흡을 고른다. 둘째 연에서 물결에 닿은 줄을 다시 하늘로 돌리기 위해 ‘햇살 파편’이라는 장치를 한다. ‘묽은 붓질 한 획의 고리’인 가창오리떼의 군무(群舞)가 수평의 사슬고리로 출렁대었다면 ‘햇살 파편’은 수직의 이미지로 공간에 변화를 준다. ‘햇살 파편’을 맞아 ‘상처처럼 튀어오르는 날개빛 목숨들’로의 진행은 생명의 역동성을 느끼게 해준다. ‘햇살 파편’은 빛에 불과하므로 고통스러운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상처처럼’ 단지 튀어오를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다. 수평의 사슬고리로 출렁였던 ‘가창오리떼의 군무(群舞)’는 줄줄이 따라 올라가서 ‘반투명 환각 같은 구름섬’으로 떠오른다. 이동하는 날갯짓의 장면은 윤곽선이 모두 허물어져 농담의 강약만 남은 한덩어리의 구름섬으로 수묵담채화를 완성한다. 하늘에서의 철새들이란 머무르는 바 없이 계속 이동하므로 ‘환각 같은 구름섬’은 가장 적절한 낱말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바코드에 빛이 지나간다
콩나물 천 원, 두부 천오백원…
물건의 값이 뜬다
내게도 내 값을 정하는 바코드가 있다
열세 자리의 숫자가 피 오 에스에 걸리는 순간
내 팔과 다리는 핀셋으로 고정되고
파헤쳐진 가슴팍에서는 심장만 팔딱거린다

핀셋의 끝이 가슴깊이 싸매 둔
금단을 콕콕 건드릴 때는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사지의 근육들
따가운 시선들 아래 볼품없이 누워

출생의 뿌리와 운명적 별자리 명운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오류의 자국들도
줄줄이 꿰어 내어 상판에 올려 놓고
내 몸과 마음을 묶었다

아슬한 삶의 갈랫길에서 흘렸던 눈물까지
헌 옷가지 버리듯 버리고 싶은 지금
내 바코드의 숫자들도 거의 자리를 떴다
부질없는 기억들도 집을 떠났다
바코드에 숫자가 없는 나는 내 값이 없어진 셈이지만
이상하게 홀가분하다
―최금녀, 「내 몸에도 바코드가 있다」

‘바코드’란 컴퓨터에 판독시키기 위해 부호화된 라벨을 가리키는데 문자나 숫자를 흑과 백의 막대 모양으로 조합한 것으로 상품의 종류를 나타내거나 슈퍼마켓 등에서 매출정보의 관리(POS:point of sales system) 등에 이용된다. 시인의 「내 몸에도 바코드가 있다」에서는 자신을 콩나물이나 두부처럼 상품화 시켜 판독대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발단이 이루어진다. 아마 상품을 분류하듯 주민등록번호가 최금녀 시인의 값을 정하는 바코드가 되는 모양이다. 시인의 형식적인 겉모습 뿐만 아니라 ‘가슴깊이 싸매 둔 금단’까지 판독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렇다면 그 판독대는 예사롭지 않아 판독대 이상의 의미로,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미루어 짐작해 보게 된다.
출생의 뿌리와 운명, 과거의 오류까지 자신의 내부를 낱낱이 드러내놓는 동안 시의 화자는 헌옷가지 버리듯 자신의 모든 것을 정리해나간다. 자신의 경력을 정리해나감으로써 ‘바코드에 숫자가 없는 나’가 된다. 내 값이 없어진 셈이지만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나를 구속하던 과거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와 짐을 말한다. 내면 깊숙이에 감추어진 것 까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렸을 때 만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한 발자국 더 나가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갱신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몸에다 바코드를 달고다니는 상상으로나 가능했던 세상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환자의 의료정보가 내장된 컴퓨터 칩인 바코드의 판매를 허용했다고 한다. 의사는 스캐너만 갖다대면 필요한 모든 정보를 알아낼 수 있으니 환자의 치료에는 획기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 다음의 닥쳐올 세상이 은근히 걱정스럽다. 시에서는 바코드를 심정적인 차원에서 내면의 감추어진 모습을 드러내기에 집중했지만 현실에서 개인 정보와 이력이 담긴 바코드를 달고 다닌다면 그대로 사생활이 노출될 염려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빚은 꿈의 세계가 과학으로 실현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시인들은 좀더 행복해지는 삶을 꿈꾸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가까운 앞날을 설계해볼 필요가 있겠다.

3.

시인들의 ‘놀이’에는 기쁘고 즐거운 일들만이 판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놀이’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뛰어넘기위해 몸부림칠수록 현실은 더욱 시인들의 몸과 마음을 옥죄어 오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그럴수록 시인들은 자신을 찾기위해, 자신과 자신, 자신과 세상과 화해를 위해 다양한 형태의 몸부림으로 끊임없이 놀이판에 뛰어드는 것이다. 따라서 고창수 시인은 시공을 초월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형이상학적인 시 「찰나」를, 류수안 시인은 일상성을 벗어난 일탈된 감흥으로 낯선 세계를 보여주는 시 「그것이 사실일까」를 놀이판에 올렸다. 신현정 시인은 「고백」에서 색감과 소리가 시각과 청각을 자극해서 일어나는 연상작용을 통해 내면적 성찰을 보여주었다. 양극과 시한부 생명을 가진 건전지에서 삶의 비의(悲意)를 읽어내는 복효근 시인의 「生」 또한 놀이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작품이다. 김주혜 시인은 「억장」에서 고통받는 자신의 내부를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가슴 저릿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솜씨 있게 언어를 주물러 수묵담채화의 정취를 불러일으킨 유수연 시인의 「구름섬, 지금 막 떠오르는 중이다」와 감추어진 자신의 내면을 털어내고 새로운 자아를 꿈꾸는 최금녀 시인의 「내 몸에도 바코드가 있다」 등도 언어를 통한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내면의 뿌리를 확인해 보려는 의미 있는 ‘놀이’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시는 일찍이 내 생을 관통해 간 한 발의 탄환이었고
나는 그로 인해 일생을 앓으며
만신창이로 여기 서 있다
진실로 내생을 관통한 한 발의 탄환
그 고통과 기쁨의 황홀한 상처
참담하고 아름답다
그것으로 족하다

시인의 놀이판은 즐거움보다 실은 슬픔과 고통이 더 난무하는 곳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곳에서 슬픔과 고통으로 인한 상처는 치유와 회복을 통해 새로운 눈을 열어주어 모든 고통은 더할 나위없이 황홀한 기쁨으로 치환되는 곳이기도 하다. 홍윤숙 시인의 열다섯 번째 시집, 『지상의 그집』의 「서시 ―위난(危難)한 시대의 시인의 변」을 인용하며 글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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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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