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8 21:27
누구나 슬픈 저녁 하나쯤 갖고 있겠죠
전희진
꽃으로 모자를 만들어 썼군요. 길을 가다가 작약을 만나거나 작약의 친척들을 만나요. 아니 아니죠. 작약같이
고운 꽃이 길 위에 있을 리 만무하죠. 작약들은 아름다운 정원에 서식하겠지만 웨딩드레스 입은 신부에게
어울리는 꽃이죠.
그러나 나는 작약에게서 작약의 내면에서 촘촘히 번지는 붉은 피를 봐요. 그건 작약도 모르는 일이 될 수
있어요. 신부 옆에서 아름다운 꽃들로 둘러싸여서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내 곁에 묶어두고 싶은 심정을
이해해요. 그게 진정한 사랑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테이블 위 날리는 꽃잎들. 그렇게 우리는 삼단 케이크처럼 하얗게 잘리고 묶여서 한 울타리 안에서 살지요.
얼마간이 될지 모를 불투명한 미래를, 피를 흘리는 동안 우리는 존재하죠. 피가 나의 내면을 흐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 꽃들은 사랑이란 슬픈 저녁에 당도하기 위한 오브제일까요. 그러나 태양이 끓어오르지 않으면
태양이 아니듯 나는 끓어오르는 삶 속에 나의 사물들을 배치해요. 맙소사! 룸바 청소기는 나만 따라다녀요.
꽃을 가슴의 중심에 두고 우아하게 걷고 싶은데 탁상시계가 주변 세계를 움직여요.
시집<나는 낯선 풍경 속으로 밀려가지 않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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