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2 22:14
옛집에 샹들리에를 두고 왔다
전희진
고가의 물건은 아니었지만 오색찬란한 빛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 아래서 우리는 계절의 훌륭한 만찬을 즐겼다. 어둠 속에선 머리에 뿔을 매단 붉은 개미들과 쥐들이 퍼레이드 음식을 바삐 나르고 밤이면 가끔 나오는 여자를 두고 왔다.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출렁이는 그녀는 방과 화장실 사이에서 살았다. 자기 집처럼 복도의 수납장을 열고 침대보와 옷가지를 꺼내서 다시 개키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그녀의 너무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나는 내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캐묻게 되었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냉장고 문을 여는 내가 자연스럽지 않았으며 내 손이 맞나 내 팔이 맞나 내 양쪽 손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과 피부를 빌려 쓰는 것 같았다. 냉동고와 냉장고 사이에서 새 나오는 서늘한 기운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즈음 나는 뒷모습이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고 그녀는 앞모습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워낙 큰일이 많아 이 일을 큰일로 다루지 않았다.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 부디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새벽이면 고르게 들리는 도마 소리. 잠옷 차림으로 부엌에 누군가가 있을 것 같아서 화장실에서 일만 보고 침실로 되돌아오곤 했다. 수레국화빛 하늘을 잘게 썰던 도마 소리는 이내 중단이 되었고
아침과 낮은 누구에게나 잊어버리기 좋은 계절이었으므로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 부디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버들잎 같이 유연하게 자라던 아이들은 산에서 내려온 산짐승들과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 먹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아빠의 생활 전선은 철갑처럼 무겁고 턱걸이하듯 목에 간신히 걸리는 희망이라서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크는 법을 터득해갔다.
늦은 밤 쿵, 소리를 들으면 이게 오렌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소리인지 이웃의 총소리인지 아이들의 귓바퀴가 점점 벌어지다가 이내 평온하게 잠이 들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키워본 적이 없다. 아이들의 키도 재본 적이 없다. 아이들을 키운 것은 앤젤레스 뒷산이었으며 이사하면서 산을 통째로 두고 왔다. 이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한국 문학 번역원 웹진 <너머> 창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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