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은 사회

2004.07.31 06:47

전지은 조회 수:864 추천:90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한 달에 한번쯤은 한국 비디오를 빌려다본다. 순간 순간들을 표현하는 영어에 신경 쓰지 않아도,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장면을 놓쳤어도 이야기가 잘 이해되고 긴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리는 한국 비디오는 그냥 틀어져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엔터테인먼트가 될 때가 있다. 주로 선호하는 것은 한시간이면 끝나는 단막극이다. 다음을 기대 하지 않아도 좋고 한국사회의 요즈음 풍속도는 어떤가 알려고 하는 의도 또한 포함 되어있다.
  한동안은 조폭 이야기가 주를 이루더니 요즈음은 온통 사랑 타령이다. 내가 하면 애틋한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 일컬어지는 관계. 형수를 사랑하고, 사돈을 사랑하며, 어렸을 적 낳은 자식을 막내 동생으로 둔갑시키며 가정을 지켜 가는 일이라거나, 각각 가정을 둔 남녀가 해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일, 삼각관계까지 소재와 풀어 가는 과정이 흥미롭고 다양하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 나라의 이혼율이 일본과 대만 등 주요 국가를 제치고 아시아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IMF가 안겨 준 또 하나의 현실이라고 한다. 남편은 돈만 벌어 오는 기계였을까, 경제적인 궁지에 몰렸을 때 이혼은 더 쉽게 찾아온다고 어느 신문의 사설은 말하고 있다. 한국 남편이 가정을 유지 해 왔던 거의 유일한 기둥이 경제력이란 말과 동일 시 된다.
  현대 여성은 가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지는 않는다. 전문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고 유교적 습성이 몸에 밴 전쟁 전 세대들은 어떤 경우에든 어머니와 아내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덕목처럼 인식되었다. 여하한 이유에서라도 가정을 파괴하는 것은 부도덕한 것이며 일종의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더구나 '바람'이라도 난 여잔 반드시 응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남자들의 '바람'이란 즐기는 오락 정도로 치부되었다.
  전후 세대, 근대 자본주의는 물질의 풍요로움이 자유의 가치를 뛰어넘어 방종이라는 것을 양산했고 절제되지 않는 자신감은 '사랑'조차 즉석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표현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만 특별해야 하고, 자신만이 특별하다고 믿는 세대, 평범하기를 거부하며 서양의 문화를 거르지 않고 받아드린다. 한바탕 홍역 같은 표현의 자유가 사랑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인성을 파괴하며 가정을 파괴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듯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는 배우자. 허울 좋은 울타리만 남아 있거나 그것 마저 거침없이 던져 버리는 사람들. 속 빈 강정이 된 가정 속에서 남겨진 아이들. 뿌리 채 흔들리는 신뢰.
  미국에선 서로 노력해 보다가 그래도 꼭 헤어져야겠다 싶으면 각각 잘살아 보자고, 등 두드려 주며 친구처럼 관계를 지속하는 것에 반해 한국에선  대부분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극심한 상처를 주는 관계로 발전된다. 많은 연예인들의 결혼과 이혼의 과정이 주간지 가십난의 톱 뉴스가 되어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현 내각의 40대 모 여자장관은 몇 년 전 이혼했고 현재는 독신이라는 사실을 거침없이 이력에 쓰고 있는 요즈음이고 보면 나의 사고는 고려장을 면치 못할 만큼 고리타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인간관계에서 지켜져야 할 부분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룻밤의 화끈한 운명적인 사랑 이전에 차곡차곡 쌓아지는 신뢰와 믿음으로 이루어진 시간들. 그것이 그렇게 뜨겁지 않다고 사랑이 없다고는 말자.
  나의 경우에도 지난 25년 결혼 생활을 하면서 살가운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각이 맞지 않다고,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고, 아이가 말썽을 부린다고 등등 의 이유들로 끝없이 부딪혔다. 어떤 경우가 되었더라도 이혼이라는 것은 상상해 보지 않았고 입밖에 내 보지도 않았다. 말이 씨가 된다던가. 각각 다른 두 개체가 모여 한 삶으로 이어질 때 그 두 사람의 관계로 만나게 되는 것들이 늘 좋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사는 것은 꼭 사랑만으로 귀결지어 지는가.
  스트레스 풀이용의 비디오는 내게 더 많은 생각을 권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 싶었던 한국 이야기. 누구의 이야기든 풀어놓으면 한편의 소설 같은 것. 소설은 사회의 한 구석진 면을 펼쳐 보이는 작업이라고 한다. 이제 그만 어둡고 구석진 것들을 접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펼쳐 갈 방법은 진정 없는 것일까.

(한국일보 목요칼럼,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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