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정에서

2005.05.05 07:34

전지은 조회 수:1534 추천:127

  며칠간 독감으로 누워 있었던 탓일까 바깥 새벽공기는 맵도록 시리다. 둘둘 말아 쓴 겨울 목도리 사이로 찬바람이 뭉텅 뭉텅 불어든다. 그래도 차에 시동을 걸고 히터를 올리며 길을 떠난다. 뜨거운 생강차를 한 모금 넘기며 기침을 참아본다.
  꼭 떠나야 하는 길도 아닌데 서두르는 것은 몇 주전부터 마음먹었던 이유도 있지만 누워있었던 몇 일 동안 갇혀 있다는 생각을 했던 탓이기도 하다. 겨울 바람과 눈, 독감의 울타리 속에서 버둥거리는 던 날 꺼내고 싶었다.
  차 속의 히터가 올라가고 의자도 뜨뜻해 지자 목도리를 풀고 주위를 돌아본다. 창 밖으로 이어지는 설경들 속에서 깊은 날숨이 트여져 나온다. 두 시간 반쯤 달려 온 곳, 산 물결은 커다란 거품을 머금은 거대한 파도들이 되어 끝없이 이어진다. 나를 태운 차는 파도타기를 하는 설퍼들 처럼 산 물결을 타며 구비 구비 넘는다. 골짜기마다 능선마다 숨쉬고 있는 만년설 봉우리들. 그것과 다아 있는 일렁이는 회색 하늘을 정수리에 인 로키 마운틴 국립 공원을 만난다.
  산은 눈 속에 잠겨 숨소리도 죽인 채 방문객을 반긴다. 유엔이 정한 '생태계 보존 지역'답께 공원 입구의 안내자 설명이 길다. 팜플렛을 내주며 야생동물에 절대 가까이 가지 말 것과 새들에게 먹이를 주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한다. 한 겨울임을 잠시 잊고 곰을 볼 수 있는 냐는 우문을 하고 말았다. 곰은 긴 겨울잠을 자고 있다고 알려 준다.
  겨울 동안 공원의 2/3 정도는 눈에 막혀있다. 차로 갈 수 있는 두 곳만이라도 보아 두기로 한다. 베어 레익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오자 숨을 쉴 수 없이 눈바람이 차다. 바람부는데로 흔들리는 산자락을 따라 나도 나서본다. 인적이 드문 산길. 꽝꽝 얼어붙은 호수 위로 싸여 있는 순백의 눈벌판. 그곳이 호수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지 않았더라면 눈 쌓인 평원, 설국이 아니었을까.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위로 내 발자국을 조심스레 내딛어본다. 봄이 되면 녹아질 것이라도 상관없다. 발자국은 오늘 살아 있음을 증거 했으므로. 산자락의 흰 물결들 사이로 잔설을 인 나뭇가지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추위에 아랑 곳 없이 계곡으로 걸음을 옮긴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들 사이로 숲에선 눈꽃 축제가 한창이다. 가끔 바람에 흩어지는 영롱한 물보라도 만난다.  
  수 만년의 고요와 침묵으로 만들어진 숲의 정진이며 차마 눈뜨고 바라보지 못할 적막의 아름다움이다. 좀더 긴 겨울 트레일을 할 수 있는 장비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돌아 나와 아스펜글렌을 향한다. 정점에서 내려다보이는 구릉들과 산들. 지층의 켜켜가 5억 년에 걸쳐 형성되었다는 공원은 그 길이와 층의 높이 들이 말해 주는 것처럼 거대하고 웅장하다. 그 안에 가슴을 열고 하나의 점으로 서있는 나. 아주 작은 먼지였고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을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괜찮다. 지금 숨쉬고 있음을 감사함으로.
  4500km의 길이로 캐나다와 미국의 중서부를 이어주는 거대한 산맥은 1859년에 발견되어, 1915년 미국의 열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산행을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는12,210 feet인 툰드라 트레일로 여름 동안에만 등산객들을 맞고 있다.
  처음 가는 곳이라 준비가 너무 없었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이될지 산세를 푸르게 바꿀 봄이 될지 지금은 기약을 할 수 없으나 너무도 가까운 곳에 둔 자연의 신비를 좀더 알아보아야겠다. 할 수 만 있다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질 풍경들도 만나보고 싶다.
  산의 어두움은 늘 빠르게 다가온다. 서둘러 돌아오는 길을 방해하는 것은 사슴과 산양 가족들이다. 아무 것도 급할 것이 없는 그들은 도로의 곳곳에서 복병이 되어 나타난다. 몇 대 안 되는 차들도 그들의 여유를 배우며 서행한다. 누구도 짜증을 부려 질러간다거나 크락숀을 누르지 않는다. 어둠음은 조금씩 더 짙어지며 산 물결 끝으로 그야말로 커다랗고 둥근  콜로라도의 달이 떠오른다. 주황의 둥근 달과 어우러지는 하늘은 금새라도 내려앉을 듯 산정에 닿다. 환상 같은 그림이 차창 밖으로 지나간다. 황홀경 한 폭이다.

(한국일보, 목요칼럼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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