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정겨워 질 때

2007.02.28 12:15

전지은 조회 수:1265 추천:137

  고향이 강릉인 탓이기도 하거니와 미국 생활의 절반 이상을 태평양 연안, 산타크루즈에 살았던 탓에 바다는 늘 마음의 고향이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 그 위로 쉬지 않고 춤추는 파도들은 내 숨소리의 강약을 때론 거세게 때론 아주 잔잔하게 물결치며 보여준다. 끝없이 펼쳐지는 푸르름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결은 쉬지 않는 움직임으로, 내게 살아 있음을 가르치는 것 같다. 가끔 맞다아 있는 하늘로 붉은 노을이라도 질라치면 황홀경은 나의 커다란 꿈이 되어 활활 타오르곤 했다. 주홍빛 석양에 물든 가슴은 삶의 뜨거운 열기가 되어 다가 들었다.
  더하여 짭쪼름한 갯내와 작은 물새들의 유희가 이어지면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음은 행복이었다.
  그런 것들을 뒤로하고 절대로 오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거대한 로키 산맥을 넘었다. 망설임 속에서 상당한 결심이 필요했던 것은 젊은 시절의 치기도 이미 사라졌거니와 어느 것의 유혹에도 빠지지 않는 다는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행자가 되어 잠시 다녀가고 싶었던 산의 이야기들이 생활로 변하여 그 크기를 더하자 나는 점점 위축되며 작아지는 것 같았다.
  산의 끝자락, 숲으로 흰눈이 펄펄 내리며 설국을 만들던 날, 호호 언 손을 불며 흰 함박 눈 꽃 속에 새 둥지를 틀었다. 서투른 몸짓으로 새로운 곳에서 나는 연습을 시작했다.
  세 번째의 겨울이 오고 있는 지금, 또 다른 나를 만난다. 가끔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는 일 말고는 편집인의 기능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성큼 한발 다가선다. 겨울 눈밭에 찍힌 발자국처럼 어설프다. 서툰 자세라도 주저 없이 나서는 것은 '좋은 사회,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신문'이라는 명제의 당위성에 있다. 내 작은 힘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이민 사회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살고 싶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간호사이며 케이스 매니저라는 일을 하고 있는 빠듯한 시간을 쪼개어 본다. 내 일을 하고 난 후의 자투리 시간이더라도 조금씩 배우며 함께 가 볼 모양이다.
  낯선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폭설의 끝으로 아직 남아 있던 희끗희끗한 눈들은 목화 솜 이불 마냥 포근하게 감아든다. 어스름 속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는 산들의 실루엣이 정겨워 지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낯설음의 서걱거림은 산정을 넘고있다. 바다 물결처럼 따스함으로 다가드는 산의 물결들이 바다의 파도처럼 넘실댄다.
  두고 온 것들은 늘 그리움이 되어 남아 있지만 새로운 것들은 또 나의 삶의 활력소가 되어 길고 깊은 심호흡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급하지 않게 서서히 산을 오르고 싶다. 따스한 가슴을 가진 이들의 손을 함께 잡고 오른다. 살아 갈 시간이 살아졌던 시간보다 짧을 것이 분명함으로 급하지 않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따스함 속으로 안긴다.

(덴버 복스코리아나 목요칼럼, 2006년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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