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향기

2005.05.05 07:40

전지은 조회 수:1570 추천:140

  몇 주일 전은 결혼 25 주년, 은혼이였다. 은 쟁반을 잘 닦아 서로의 얼굴을 비추니, 비친 얼굴에 풍상 세월의 흔적은 남아도 거울 같은 쟁반에 서로의 마음속까지 비춰 지더라는 세월. 한 남자를 만나 한눈 팔지 않고 앞만 보면 달려 온 길다면 꽤 긴 시간이었다.
  결혼 후 처음 얼마간, 연애를 했던 시절의 애틋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살갑게 굴지 못하면서 직선적이고 급한 나의 성격과 말수가 적고 사색이 깊은 그의 인성은 서로에게 심한 부조화를 가져오는 듯 했다. 그러나 '3개월을 견디면 3년을 살 수 있고, 3년을 견디면 30년은 그냥 살아지더라'는 말처럼 3년이 지나 더 긴 시간을 함께 했고 앞으로도 별 힘든 일없이 살아 질 것 같다.
  결혼 생활의 고비라던 3년이 되던 해에 미국에 왔고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에는 백지장도 맞들어야 할만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도와야 했다. 아이의 성장과 교육, 그의 공부와 일, 그리고 내 직장.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도 숨차고 바쁜 시간인데 외롭다, 쓸쓸하다, 그립다, 등의 단어들은 어쩌면 삶의 한 사치 같은 부분이었다. 그런 것들을 묻어 두고 열심히 살았다. 누구든 그만큼 치열하지 않은 삶이 있었겠느냐고 묻는다면 할말은 없다. 다만 자신이 서있던 자리에서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모여 세월의 다발이 되어 있더라는 것 말고는.
  간혹, 관습에 충실한 여자가 현모 양처이고 돈을 많이 벌어오는 남자가 능력이 있고 우등생 자녀를 두어야 좋은 가정이 되는 듯한 사람들의 일갈을 보고 들으면서 그런 의미에서의 나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아 허무 내지는 자괴감에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치열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인생의 후회는 삶의 성취감과 동시에 공존하는 아이러니이기도 하니까.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고 여름이 되어야 녹음이 우거지는 것처럼 삶의 여정은 질서를 지킬 때 만 가을의 풍성함을 이룬다. 질서 속에서 그날, 그날의 나의 모습에 최선을 다했고 도무지 맞지 않을 것 같았던 성격들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느새 조화를 이루어 갔다. 늘 좋은 시간만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니다. 한때는 암울했고, 또 한때는 위태로웠으며, 다른 한때는 가슴 깊은 곳까지 한기가 밀려들었다. 내 스스로 삶의 사치라고 치부했던 것들이 밀고 들어오던 시간에도 그는 옆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커다랗고 높고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 지켜 주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아이에게 더 큰 디딤 목과 버팀목이 되어 주는 아빠의 자리. 그가 그어 놓은 커다란 선 안에서 안주했던 일상들. 젊음에 잠 못 이루었던 설레임의 풋사랑이 이젠 제법 익었다.
  어느 그윽한 저녁, 붉은 포도주 한 잔을 앞에 놓고 지난 시간들을 옛날 이야기처럼 두런거려도 좋고, 침실 창가로 달려든 이른 아침 햇살에 서로의 흰 머리카락을 확인하며 웃어도 세월이 나쁘지만은 않다.
  그렇게 서로에게 농익은 확인의 시간을 위해 길을 떠났다. 길지 않은 일정 중에 결혼 기념일이 들어있었다. 물보라를 인 바닷바람이 치는 커다란 배의 난간에 서서 서쪽으로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 '오랫동안 잘 참아 주어서 참 고마웠다'고. 그 한마디를 건네며 내 가슴속에는 감회와 고마움, 믿음의 눈물이 흘렀다.
  이 25년이 한번 더 거듭되는 그날, 따스한 그의 손잡고 지금과 똑같이 배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석양 속의 나와 아이의 커다란 울타리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돌아온 집에는 지인이 보내준 한 다발의 후레시아가 꼽혀 있었다. 화려하고 짙은 장미는 아니더라도 은은한 향은 방안 가득 번졌다. 사랑은, 오래되고 지극한 사랑은 이 작은 꽃의 향기같이 오래 오래 곱게 펴져 갈 것이다.

(한국일보, 목요칼럼 4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6 인사동에 어둠이 내리면1 전지은 2006.10.23 1726
35 산이 정겨워 질 때 전지은 2007.02.28 1270
34 인사동에 어둠이 내리면3 전지은 2006.10.23 1724
33 인사동에 어둠이 내리면2 전지은 2006.10.23 1418
» 세월의 향기 전지은 2005.05.05 1570
31 재혼 이야기 전지은 2005.05.05 1678
30 겨울 산정에서 전지은 2005.05.05 1534
29 봉투 속의 다짐 전지은 2005.01.17 1100
28 Viva Las Vegas! [1] 전지은 2005.01.17 793
27 가을 묵상 전지은 2004.11.11 859
26 하늘가는 길 전지은 2004.09.16 1017
25 인터넷 유감 전지은 2004.08.24 775
24 소설 같은 사회 전지은 2004.07.31 866
23 기러기 아빠 전지은 2004.07.31 895
22 세월 전지은 2004.06.01 885
21 WELCOME HOME! 전지은 2004.04.01 815
20 심기일전(心機一轉) 전지은 2004.03.04 873
19 하이웨이 17에서 생겼던 일 전지은 2004.03.04 834
18 선물 전지은 2004.01.08 846
17 은둔 전지은 2003.12.15 754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10
어제:
8
전체:
24,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