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 어둠이 내리면1

2006.10.23 10:51

전지은 조회 수:1713 추천:133

인사동에 어둠이 내리면
                                                                        전 지은

  "다녀올게, 걱정하지 말고 며칠, 친구들 만나고 그래. 공항으로 마중 나올 필요 없어, 귀국하면 곧장 그리로 갈게."
  "그래요, 잘 다녀오세요" 물기에 젖은 듯 한 인희의 목소리에 가슴이 짠하다. 공항버스 안에서 그녀에게 거는 전화는 늘 편하지가 않다.
  영종대교에 올라선 버스는 시원하게 달린다. 어스름의 끝으로 가로등들은 희뿌연 빛을 뿌린다. 갑자기 소나기라도 퍼부었으며 싶다. 버스의 자동 안내는 다음 정차하는 곳에서 내리면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알려준다. 내가 가는 곳 '서울특별시 나성구'에서 듣는 영어보다 훨씬 정확한 발음의 안내는 며칠이라도 불편할 나의 모습에 더욱 주눅이 들게 한다.
  짐칸에 놓여져 있는 바퀴가 달린 소형 가방 안엔 아들과 딸이 부탁한 한국 젊은 가수들의 라이브 공연 DVD들과 만화책 시리즈, 짝퉁 손지갑들이 유명상표 별로 들어있다. 비행기 안에서 읽을 경제 잡지 한 권은 바깥 주머니에 넣어놓았다. 인희가 억지로 넣어준 원피스 한 벌은 정숙의 몫이다.
  소형 가방은 무겁지 않으나 버스에서 내리는 걸음은 천근만근의 무게가 실려진다. 한숨을 한번 크게 쉬고 천천히 가방을 끈다. 자동 개폐문이 그림자를 인지하고 스스르 소리도 없이 열린다. 새로 지어진 공항은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게 정돈돼 있고 깨끗하다. 정복을 하고 보폭을 맞추어 절도 있게 걷는 청원 경찰들의 지침 봉이 착착,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반들반들 닦여진 대리석 입구엔 똑같은 표정의 공항 안내원들의 얼굴이 비칠 것도 같다.
  여권은 많이 낡았다. 빨갛고 푸른 스탬프들이 더 이상 찍힐 자리가 없이  꽉 찼다. 표를 확인해 주는 항공사의 직원은 풋풋한 젊은 냄새를 풍긴다. 사무적인 몸짓이라도 젊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
  내 젊은 날의 시간들은 이미 많이 기울었다. 애쓰면 쓸수록 더욱 초라해지는 중년의 쓸쓸함은 고개를 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던 그 때부터 계속됐다. 정확한 날짜나 시간을 기억할 수 없어도 사십 후반, 인희를 만나기 시작했던 때부터 떨칠 수 없이 가슴속의 서늘함에 되어있었다. 폐경기 이후의 여자들에게나 있는 줄 알았던 감정의 기복과 삶을 바라보는 눈 속의 서글픔은 소주 몇 잔이나 줄담배로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비행기가 떠나기까지는 아직 꽤 시간이 있다. 출출한 속을 달래볼까 식당가로 올라간다. 공항의 크기에 비해 에스컬레이터는 어른 하나 겨우 설 수  있게 좁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내려가는 시내의 에스컬레이터나 백화점의 것들도 상당히 좁았다. 미국 같았으면 뚱보들에 대한 차별이라고 고소나 당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자 조금 웃음이 나온다. 법과 동등한 것과 확실한 자유를 외치는 미국은 진실로 사람들의 천국일까.
  우동 하나를 시킨다. 단무지 세 개와 김치 서너 조각이 담긴 반찬이 곁들여 나왔다. 고춧가루를 듬뻑 치고는 국물부터 소리나게 훌훌 불어 마신다. 속이 개운하고 시원하다. 잠시, 우울이 걷혀지는 듯하다. 다시 소리나게 국수 가락을 쭉 빨아 당긴다. 그리곤 소리나게 단무지를 우걱우걱 씹는다. 이제 며칠간은 불편한 식사를 해야할 것이고 그것은 체기를 불러오고 또 당분간은 소화제를 복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숙은 또 걱정을 할 것이다. 남자 혼자 해 먹는 식사가 오죽하겠느냐, 매식이 지겹지는 않냐, 빨래는, 집안 청소는...그러다가 술과 담배는 언제 끊을 것이냐고 닥달을 하는 것으로 잔소리의 일절은 잠시 쉬게 되겠지. 그리고 한숨을 한번 깊이 내 쉰 뒤, 언제 바다를 두고 건너다니는 살림이 끝날 지의 걱정을 후렴처럼 되풀이 할 것이다. 이어서 영주권 문제와 요즈음 미국 정가의 뜨거운 감자인 불체자 신분 문제를 단 음조로 엮어 가고, '아이들이 대학을 가면, 그때는 모든 것이 좋아지겠지'라는 나의 답은 지난번이나 이번이나 다음 방문에도 똑같이 쓰일 것이다. 다른 방법은 어디에도 있지 않다.
  공항 내의 식사는 언제나 양이 작다. 서너 젓가락에 국수는 건질 것이 없다. 국물을 한번 더 마시자 벌겋게 불은 고춧가루가 밑에 가라앉았다. 잔 파들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정숙이나 인희가 보았더라면 남자가 웬 조잡이냐고 핀잔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두 여자가 유일하게 한 목소리를 내는 부분이 내 식습관이다. 그 외는 어디에도 닮은 구석이 없다. 닮아야할 이유가 물론 없지만 여자라는 공통분모가 상통되는 줄 알았던 것은 한동안의 나의 오해였다. 보리차를 후루룩 소리나게 마시고 일어선다.
  이별을 나누며 눈물을 찍어내는 딸과 엄마 같은 두 여자의 사이를 비집고 공항 용원의 손짓을 따라 입구에 다가섰다. 다시 여권과 비행기표를 보이고 자동 개폐문 안으로 들어간다. 조금은 한적하기까지 한 면세점 앞에서 서성인다. 말보로 한 보루를 집어들고 양주 쪽으로 걸어간다. 한때의 독재자가 죽을 때 마셨던 술을 한 병 집어든다. 이건 처남의 몫이다. 미국에 사는 한국사람들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이 한국식 선물을 좋아한다.
  달러를 아끼기 위해 지갑 깊은 곳에 넣어 두었던 십 만원 짜리 수표를 꺼낸다. 거스름은 달러로 주세요, 수표 뒤에 이서를 하고 면세점 상표가 찍힌 비닐 가방을 건네 받는다.
  울릉도 호박엿이라는 간판이 붙은 손수레가 복도의 한쪽에 서있다. 개량 한복을 입은 판매원은 커다란 엿판의 엿을 열심히 작은 조각으로 깨고 있다. 칼을 대고 톡톡 치는 것이 옛날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는 듯하다. 고물을 바꾸지 않고도 엿은 돈을 내면 살 수 있다. 나성의 한국 마켙에도 있을 터지만 아이들 생각에 한 통 싸달라고 한다. 비행기 안에서 녹진 않겠지요, 라고 묻자 여잔 당연하다는 듯이 그럼요, 비행기 안에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잖아요, 라고 답한다. 요즘 젊은 아이들 같은 말투에 갑자기 엿은 맛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출구 앞 의자에 앉는다. 엿 상자를 면세 비닐 가방 안에 넣고 종이 봉투는 구겨서 버린다. 작은 가방에서 경제잡지를 꺼내 첫 장을 펼친다. 광고, <오늘의 투자가 당신의 내일을 약속합니다>라는 문구 옆에 다정히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바람기가 장안에 유명했던 연예인 부부다. 아직 이혼을 하지 않고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재산을 둘로 나누기가 아까워서라고 누군가 술좌석에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ㅇㅇ증권. 다시 또 한 장을 넘기자, 이번에도 또 똑같은 톤의 이름만 다른 증권 회사 광고가 전면으로 실려있다. 대 여섯 장을 족히 넘겼는데도 광고만 계속 이어진다. 차례는 어디에 실렸는지 벌써 몇 번째 앞부분의 여러 장을 뒤적거렸다. 차례를 찾기를 포기하고 잡지의 중간쯤을 연다. 성공했다는 기업인의 자서전이 실려있다. 잠을 자지 않고 일했으며 진보적인 사고로 늘 앞장서 가는 기업 이였기에 지금의 성공이 있었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의 가족 사에는 딸은 미국에 유학 중이며 군인간 아들이 있다는 것을 무슨 자랑처럼 적어 놓았다.
  상황이 조금만 나았더라도 아이들과 정숙을 내몰다시피 서울시 나성 구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패기 만만했던 시절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 하나로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인생은 계획하고 짜여진 각본처럼 무대에 올려지는 것은 아니다. 시작한 일들이 좀 잘되는가 싶으면 괴도에 오르기 전에 꼭 경쟁자가 나타났다. 번번이 실패를 했던 젊음의 시간들. 신의 장난이라며 넘겨버리기엔 내 인내의 한계가 너무 작고 짧았다. 살아야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은 호흡작용 외에 육체를 유지하고 정신을 이어가는 데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필요했고 조건을 충족 시켜주기 위한 삶의 장치들이 늘 산재했다.
  그 상황들의 필요충분 조건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나 하나 외에 가족이라는 사회의 최소 단위가 흔들리고 요동이 심하면 견디지 못하게 될 때도 있다. 세상의 누구도 실패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래도 정숙은 용케 버티었다. 그녀의 음식점은 내 도움이 없이도 번창했고 내가 사업 자금을 뭉텅 뭉텅 까먹으며 며칠씩 술을 푸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쉴 때마다 정숙은 번번이 뭉치 돈을 내 주었고 아파트를 지켰다. 잠시 쉬다 오겠소, 라는 말을 남기고 몇 달 씩 사라졌다 돌아와도 정숙은 아이들과 함께 늘 같은 자리에 있었다. 아이들은 다행이 엄마의 울타리 안에서 잘 자라는 것 같았다. 그런 아이들에게 바람이 든 것 사실, 처남 때문이었다. 아이들의 외사촌들은 공부를 무지하게 잘한다고 했고 외삼촌은 세탁소를 세 개나 하며 꽤 잘 산다고 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여행을 한번 갔던 것이 전부였던 미국 행을 결심했던 것은 그 잘나가던 정숙의 음식점도 한집 건너 하나씩 미국이나 유럽의 심지어는 멕시코의 프랜차이즈 음식 전문점이 생기면서 매상이 점점 줄자 불안했고 더 늦기 전에 떠나야 할 것 같다 는 위기 의식 같은 것이 작용했다. 안 갈 것이면 모르되 갈 것이라면 하루라도 빠른 게, 아이들이 한 살이라도 어릴 때가 낫지 싶었다. 미국에 도착하는 대로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는 처남의 말도 미국 행을 결심하게 되는 데 한 몫을 했다.
  이민. 그때는 들떴고 설레었고 새로운 희망을 나라로 돗을 저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특별시 나성구라는 것은 노래에만 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하나에서 열까지 동포들끼리 서로 뜯고 할 키며 나누어 먹는 것인 줄은 정말 몰랐다. 처남의 세탁소에 나가기 시작한 일주일째 정숙은 내 품속에서 밤을 꼬박 세우며 흐느꼈다. 아침엔 얼굴을 알아 볼 수 없게 부었어도 자명종은 정확히 4시 반에 울렸다. 보일러를 올리고 누가 입었던 것인지도 모르는 냄새나는 속옷들을 분리하며 정숙의 손은 허물이 벗겨졌고 손톱에는 곰팡이가 쓸었다. 문둥이처럼 손톱이 갈라지며 삭아 들어가는데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독한 세제와 독한 드라이클리닝 연료, 화학 섬유들은 장갑을 끼고 음식점을 할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험했고 구역질 나게 더러웠다. 그러나 이미 떠나 온 길을 후회만 하고 밤마다 우는 그녀를 안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내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책임과 의무감이 두 어깨를 눌러 왔다.
  탑승 안내 방송에 지난 시간들에서 깨어난다. 열 시간 한 자리에 갇혀 있어야한다. 작은 가방과 비닐 가방을 쓰러지지 않게 머리 위 선반에 올리고 자리에 앉는다. 옆자리는 아직 비었다. 계속 비었으면 싶다. 쓸데없이 말을 걸어오는 젊은이나, 누구한테 가쉬우, 라고 물어 오는 늙은이, 둘 중 어느 누구도 반갑지 않다. 그냥 빈자리인 채로 다리나 편하게 올리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 한국 영화나 두어 편 보고 두 번 식사에 곁들여 와인을 몇 잔 하고 나면 새우잠이라도 좀 자 둘 수 있을 것이다.
  긴 여행은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고, 특히 지난 시간들의 아픔이나 추억들은 이렇게 혼자가 되는 시간들이면 흑백 필름이 되어 돌아간다. 무성영화는 간간이 필름이 끊기거나 낡고 오랜 된 테이프처럼 흰 선들이 기억의 편린들을 놓지 못하며 근근히 이어져간다. 소리가 들리지않아도 찍찍거리는 듯하기 도하고 안간힘을 쓰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정숙은 내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 갈 것이다. 그녀가 내 끈을 놓지 않는 한 내가 그녀를 떠날 수는 없다. 가끔씩 방문하거나 전화와 인터넷으로 가장의 노릇을 해 주고 통장의 잔고가 바닥이 나지 않는 한 나의 의무와 책임은 다 하는 것으로 치부 될 수 있다. 정숙이 인희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 질 수도 있겠지. 그러나 당분간 그럴 상황이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관객을 웃기기에 애를 쓴다. 그러나 보고 있는 나는 시간만 죽일 뿐 우습지가 않다. 어떤 일에도 웃음을 주기에 인색해 진 것은 다시 귀국한 후 부터였던 것 같다. 강박 관념 같은 돈벌기, 아이들 걱정, 정숙이 혼자 책임지고 있는 가정이라는 울타리까지, 세상의 어느 것도 재미나고 신나는 일이 없었다. 영화를 보고있던 헤드폰을 빼 옆자리에 놓는다. 신발을 벗고 담요를 무릎 위로 올린다. 벨을 눌러 와인 한잔을 더 청해 마시고 잠을 자 볼까 의자를 뒤로 젖힌다. 건너편에선 삶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코고는 소리가 푸푸거리며 들린다. 술기운에도 잠이 들지 않는 것은 비행기의 속도음 때문인 것도 같다. 다시 또 와인을 청해 마시고 기내식을 또 먹고 채널을 돌리다가 면세 책자를 뒤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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