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 어둠이 내리면3
2006.10.23 11:01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한 채 무거운 가슴의 짐을 지고 떠난다.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런 문제없이 대학이라도 가면 좋으련만 그 사이 이민법이 더 강화되어 신분의 문제로 불이익을 받게 된다면...누군가 정숙을 고발하는 것은 아닌지... 매스컴은 왜, 자꾸만 이민자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불체자들의 신분을 사회문제의 시각으로 보려하는지. 매스컴이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사건을 확대 해석하는데는 일가견을 갖고 있다. 그들 말장난 소용돌이 속에서 누군가는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 흑백의 논리로 다가서는 그들의 시선이 두렵고 가슴은 더욱 답답해진다. 10여 시간 동안 한숨 눈을 부치지 못한다. 청해 마신 와인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내에서 향수 한 병을 산다. 미국에서 돌아 올 때는 꼭 그녀에게 줄 선물을 기내에서 준비한다. 항공사 로고가 새겨진 앞치마, 작은 보석들, 립스틱 세트 등등.
바다 너머에 가족을 두고 돌아온 서울 거리는 눅눅했고 숨막히게 답답할 때가 있었다. 조여드는 가슴을 풀 수 있는 곳은 내 어릴 적 고향처럼 작은 골목들이 있는 인사동이었다. 골목을 기웃거리며 아기자기한 소품을 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 졌다.
그날은 토요일 오후였다. 작은 공방에서 전시해 놓은 전통공예품들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섬세한 바늘땀과 화려한 듯 은근한 색깔들. 고요함을 더해 주는 다향음악이 은은히 퍼졌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의식했고 그녀를 따라 전시장을 나와 작은 찻집으로 들어섰다. 오후 내내 난 그 찻집의 손님으로 앉아있었다. 문닫을 시간이 훨씬 지나고 골목 앞의 인적이 끊긴 뒤에도 그녀는 나에게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내 가슴은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작아서 편안한 곳, 그곳에서 그녀가 따라주는 차는 따스하게, 아주 천천히, 한 모금씩 목울대를 떨며 지나갔다.
인천 공항으로 인희는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영종도를 넘어가는 버스 안으로 짙은 바다 냄새가 다가드는 듯 하다. 정숙이 있는 곳도 바닷가 이었지만 그곳에선 바닷 내음을 맡지 못했다. 어스름 속에서도 푸른빛을 내는 가로등은 하늘에 다을 듯 높다. 많은 빛에 섞여 달은 떴는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다. 버스에 함께 탄 승객들은 간혹 코를 곤다. 코 고는 소리 속으로 나의 머리는 더욱 말똥거려지며 가끔 한숨만 놓여난다.
'인사동 입구입니다' 가방을 꺼내 입구에 선다. 버스에서 내리자 길은 눈에 익숙하다. 천천히 가방을 끌며 걷는다. 한낮의 소란스런 청객이나 한국을 알린다는 명목의 수선스러움이 사라진 거리는 한적하다. '이모집' 골목 앞에서 파장을 알리는 주인이 한바탕 물을 뿌리며 골목을 쓴다. '오, 자네 왔는가'에는 한식 창호지 문안으로 손님들의 모습이 실루엣이 되어 비친다. 그 앞의 포장 마차는 오뎅을 끓이고, 꽁치를 굽는 냄새가 골목 안을 진동한다. 갑자기 시장기가 밀려온다. 소주 한잔을 마시고 싶다.
내일의 도시를 준비하는 손길들이 서행의 쓰레기차를 끌며 다닌다. 더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시큼한 시궁창 냄새가 달려든다. 삶의 냄새를 맡으며 인희네 찻집 문을 두드린다. 작은 종이 달랑 달랑 흔들린다. 안 쪽에서 급하게 신발을 끄는 소리가 들린다.
일순간에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아, 지금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품에서 오래 오래 잠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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