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2005.02.17 06:55
김성남[-g-alstjstkfkd-j-]거울에 어둠이 들자 난새는 춤을 멈추고
비어 있는 들보에 제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향내 가시지 않은 비단이불에,
눈물로 젖은 비단옷.
아름다운 꿈은 난꽃 핀 물가에서 헤매이고,
형산의 구름은 상서성으로 떨어진다.
서강의 오늘 밤 달은,
흐르는 그림자 되어 금미산을 비춘다.
위의 시는 허난설헌이 닫혀진 조선사회의 울타리 속, 규방의 벽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비유하여 지은 시이다.
"'거울 속 난새'란 새장에 갇혀 자유를 그리다가 죽은 봉황을 의미한다. 이 새의 출처는 남조 송나라 범태의 난조시서에 나온다.
옛날에 계빈왕이 준기산에서 긴 그물로 난새 한 마리를 잡았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새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금으로 장식한 새장에 넣고 온갖 맛있는 음식을 주었다. 그러나 새는 점점 더 슬픔에 젖어서 3년 동안이나 한번도 울지 않았다.
그 부인이 "듣기에 새는 같은 종류의 새를 보면 곧 운다고 하는데, 왜 거울을 하나 걸어서 그가 비춰 볼 수 있게 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자 왕이 부인의 말대로 했다.
난새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서 슬피 울기 시작했다. 슬픈 울음소리는 하늘 끝까지 울려 퍼지고, 난새는 거울을 향해 달려나가 부딪혀 죽고 말았다."
허난설헌은 놀라운 사람이다. 봉건사회의 규방에 갇혀 사는 자신의 우울한 삶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 나오는 화려하고 우아한 정취는 단지 반작용이라고만 할 수 없는 신비한 힘과 유쾌한 긍정성을 가지고 있다.
똑같이 우울한 삶을 살면서도 우울하고 궁상스럽기 짝이 없는 글로 자신을 표현한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제인 에어를 썼던 브론테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물론 미모와 환경을 넘어선 불멸의 사랑으로 끝을 맺긴 했어도 작품 전반에 흐르는 우울한 기조는 부인할 수가 없다. 물론 그런 이유로 그 속에서 결실을 맺은 사랑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예브스키의 글도 마찬가지다. 허난설헌에게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에서 보여주듯 낙천적인 기지와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서구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도덕적인 억압감을 가지지 않았기에, 차라리 자유로운 선계를 사랑하는 도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의 상상의 세계는 훨씬 더 자유롭고 낙천적이었으며 화려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왜 이런 멋진 시인을 한국의 국어 시간에는 가르치지 않은 것일까.(적어도 내 기억에는 깊이 있게 배운 일이 없다.) 그랬다면 보다 자유로운 상상을 즐길 수 있었을 테고 중국의 신화를 통한 재미있는 신화와 상상의 세계를 접할 기회가 되었을 텐데. 유교가 전부가 아닌 보다 인간과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녀의 작품을 평전을 통해서나마 훔쳐보면서 중국신화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 독서의 방향은 중국신화이다. 물론 중국신화 그 자체보다도 허난설헌의 난천적이고 진취적인 해석과 상상이 더욱 재미있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어 있는 들보에 제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향내 가시지 않은 비단이불에,
눈물로 젖은 비단옷.
아름다운 꿈은 난꽃 핀 물가에서 헤매이고,
형산의 구름은 상서성으로 떨어진다.
서강의 오늘 밤 달은,
흐르는 그림자 되어 금미산을 비춘다.
위의 시는 허난설헌이 닫혀진 조선사회의 울타리 속, 규방의 벽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비유하여 지은 시이다.
"'거울 속 난새'란 새장에 갇혀 자유를 그리다가 죽은 봉황을 의미한다. 이 새의 출처는 남조 송나라 범태의 난조시서에 나온다.
옛날에 계빈왕이 준기산에서 긴 그물로 난새 한 마리를 잡았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새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금으로 장식한 새장에 넣고 온갖 맛있는 음식을 주었다. 그러나 새는 점점 더 슬픔에 젖어서 3년 동안이나 한번도 울지 않았다.
그 부인이 "듣기에 새는 같은 종류의 새를 보면 곧 운다고 하는데, 왜 거울을 하나 걸어서 그가 비춰 볼 수 있게 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자 왕이 부인의 말대로 했다.
난새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서 슬피 울기 시작했다. 슬픈 울음소리는 하늘 끝까지 울려 퍼지고, 난새는 거울을 향해 달려나가 부딪혀 죽고 말았다."
허난설헌은 놀라운 사람이다. 봉건사회의 규방에 갇혀 사는 자신의 우울한 삶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 나오는 화려하고 우아한 정취는 단지 반작용이라고만 할 수 없는 신비한 힘과 유쾌한 긍정성을 가지고 있다.
똑같이 우울한 삶을 살면서도 우울하고 궁상스럽기 짝이 없는 글로 자신을 표현한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제인 에어를 썼던 브론테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물론 미모와 환경을 넘어선 불멸의 사랑으로 끝을 맺긴 했어도 작품 전반에 흐르는 우울한 기조는 부인할 수가 없다. 물론 그런 이유로 그 속에서 결실을 맺은 사랑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도스토예브스키의 글도 마찬가지다. 허난설헌에게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에서 보여주듯 낙천적인 기지와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서구인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적, 도덕적인 억압감을 가지지 않았기에, 차라리 자유로운 선계를 사랑하는 도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의 상상의 세계는 훨씬 더 자유롭고 낙천적이었으며 화려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왜 이런 멋진 시인을 한국의 국어 시간에는 가르치지 않은 것일까.(적어도 내 기억에는 깊이 있게 배운 일이 없다.) 그랬다면 보다 자유로운 상상을 즐길 수 있었을 테고 중국의 신화를 통한 재미있는 신화와 상상의 세계를 접할 기회가 되었을 텐데. 유교가 전부가 아닌 보다 인간과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녀의 작품을 평전을 통해서나마 훔쳐보면서 중국신화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 독서의 방향은 중국신화이다. 물론 중국신화 그 자체보다도 허난설헌의 난천적이고 진취적인 해석과 상상이 더욱 재미있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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