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영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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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수필/멈출 수 없는

2018.02.01 04:09

김태영 조회 수:97

멈출 수 없는


                                                                                          김태영


 ‘좀머 씨 이야기’를 읽었다.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독일 사람이다. 장편소설 ‘향수’ 가 유명하다.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라는 부재가 붙은 이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어 돈과 명성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작가는 모든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다.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 발설한 사람이면 부모나 친구를 막론하고 관계를 끊어 버리고 은둔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좀머 씨 이야기’ 는 평생을 사랑과 죽음 앞에서 도망치는 별난 사나이의 이야기다. 1991년, 작품이 발표되자 독자들은 단번에 매료되어 버렸다. ‘그러니 나를 제발 내버려 두시오!’ 라고 외치며 자꾸만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려고만 하는 좀머 씨의 생활방식은 구태여 가난한 은둔자로 살아가는 쥐스킨트의 삶의 형태와 닮아 있다.

 이야기는 대강 이렇다. 

 좀머 씨는 외지에서 이사 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어린 아이에서부터 강아지까지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호수를 중심으로 60킬로미터 반경을 쉬지 않고 걸어 다닌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날씨에 관계없이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 이상한 일은 그에게 아무런 볼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할 일 없는 그가 돌멩이만큼 큰 우박이 바람과 함께 쏟아지던 날도 혼자 길을 걷고 있었다. 사람은커녕 자동차도 1 미터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무서운 날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아버지와 함께 경마장에서 돌아 오는 길이었다. 아버지가 그 앞에 차를 멈추고 타라고 했다. 차에 타지 않으면 죽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갔다. 아버지가 부탁 했다. 죽지 않으려거든 어서 타라고.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 두시오!“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그를 밀폐 공포증 환자라고 했다. 


 내가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이 되는 동안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때마다 멀리 좀머 씨가 빠른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다. 마치 사건의 배경음악처럼. 그를 빼놓고 나의 성장기를 얘기할 수 없다. 마을의 다른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와 마주 보며 얘기를 나눈 사람은 없다. 서로가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처럼 각자의 세계에서 뱅뱅 돌며 세월을 따라 흘러 가고 있었으니까.

 나는 어느 어둑어둑한 초저녁, 좀머 씨가 호수에 빠져 자살하는 모습을 목

격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꼼짝하지 않고 지켜 보았다. 나는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평생 걸어야만 했던 고달픈 그의 일생을 지켜 보았던 목격자로써 차마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겨울은 켈리포니아인 이곳도 꽤 추웠다. 어느 이른 아침, 나는 Fresno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비가 퍼붓고 있었다. 마침 일요일이라 길을 걷는 사람은커녕 자동차도 많이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오른 쪽 거울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차를 천천히 몰았다. 그는 땅만 보며 뛰고 있었다. 놀랍게도 뒷목 부분이 곱사등이었다. 비옷은 낡고 얇아 보였다. 반바지 밑으로 나온 다리는 지팡이 같이 가늘고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호수에 빠진 좀머 씨가 살아 나온 것만 같아 차를 멈췄다.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은 뛰어야만 사나 봐. 365일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저렇게 뛰거든. Fresno에서 저 사람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버려 둬.”

 내버려두라는 친구의 말에 내 가슴은 찌르르 아팠다. 비가 오는 탓도 있지만 좀머 씨에 대한 짠한 연민 때문이었다. 차디 찬 빗 속을 뛰어야만 하는 사람, 왜 멈출 수 없는 것일까? 당장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었다. 


 내가 사는 madera에도 좀머 씨가 있다. 신호등에 걸려 서 있을 때 걷다가 멈춘 그를 똑바로 본 일이 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 남자는 넓은 챙이 양 쪽으로 살짝 치켜 올라간 검정 모자에 검정 제복을 입었다. 신발까지 완벽하게 유니폼에 맞췄다. 가슴에 금빛 훈장 같은 것을 달았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천천히 걷는 것이 특징이다. 한 번도 웃어 본 일이 없는 사람 같다. 돈키호테 시대의 스페인 기사 복장을 한 이 사람도 Madera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또한 날씨에 상관치 아니하고 걷고 있다. madera에는 멈출 수 없어 걷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다. 50 대로 보이는 여자다. 키가 무척 크고 뚱뚱하다. 멕시코 사람 같기도 하고 인디언과 멕시칸이 섞인 것 같기도 하다. 볼 일 없어 보이는 걸음걸이로 쉬지 않고 또박또박 걸어 가고 있다. 화씨 1 백도에 가까운 여름 날, 거구의 이 여자를 보면 나는 또 차를 멈추고 타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틀림없이 여자는 말 할 것이다.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 나는 가끔 스페인 기사와 그 여자가 마주치지 않나 궁금해지기도 하다. 왜 그들은 공원에 가서 좀 앉아있지 않나 하고 내 노파심이 잔가지를 칠라치면 멈출 수 없다잖아. 또 다른 내가 참견을 한다.


 Turlock 이라는 도시에 살 때도 좀머 씨를 보았다. 그는 중국 할머니였다. 그 때는 책을 읽기 전이었기에 왜? 왜? 하고 애를 태웠다. 깨끗한 차림새나 똑바른 걸음걸이로 보아 치매 노인은 아닌데 쉴새 없이 걷고만 있었다. 같은 동양인이었기에 보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적도 있다. 애타는 사람은 나였고 그는 아무 볼 일 없이 그러나 분명한 명분을 가진 듯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나는 그들을 만나면 자세히 바라 보는 버릇이 있다. 못 말리는 시험정신은 나도 한 번 그렇게 걸어볼까? 상상의 가지가 쭉 뻗친다는 사실이다. 걷는 이를 바라보다가 직접 걸어보면 세상이 어떻게 느껴질까? 도시 마다 한 두 명의 유명한 좀머 씨들이 있을 것이다. 동그라미를 그리며, 직선, 혹은 네모 꼴로 걷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그림을 그리면 재미있는 움직임이 될 것이다. 색을 칠해보면 어떨까 보이지 않는 생각은 형광 색으로, 움직이는 팔 다리는 노랑, 몸통은 보라색. 새로운 좀머 씨인 내가 끼어 있다. 생각이 많아 [어쩌면 대작이 될지도 모르는] 형광 색을 마구 뿌리며 걸어가고 있다. 멈추면 죽을 것만 같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진실은 딴 데 있다. 외로움과 맞닥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외로움을 피해서 달아나는 사람들. 내가 그들의 얼굴에서 읽어 낸 것은 깊이 숨겨진 외로움이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이 땅에 외롭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외로움은 세포 속에 켜켜이 박혀있다. 어떻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 도시에 흩어져있는 성실한 좀머 씨들이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가끔은 시원한 물이라도 한 병 차창 밖으로 내밀어 줄 일이다.


 나는 내가 다른 모습의 좀머 씨 인 것을 오래 전에 알게 되었다. 친구들이 즐겁게 놀 때 책을 들고 있던 기억,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다. 동면하는 뱀처럼 쭉 늘어져 쉬고 싶은 날조차도 무언가 하고 있다. 꼭 해야 할, 아주 대의명분이 확실한 큰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 때문이다. 그렇다고 괄목할만한 일을 하나 완성한 것도 아니다. 모래시계에 모래가 흘러 내리듯 부서지는 시간 속에 내가 부서지며 흘러가고 있다.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길 때도 있다. 제발 좀 쉬시오! 말 할라치면, 그러니 제발 날 내버려 두시오. 다른 내가 말 한다. 멈추어 서시오. 죽을 만큼 외롭지도 아니한데 왜 그렇게 쉬지 않고 걷고 있소?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시오. 그리고 느끼란 말이오. 산다는 것은 그렇게 빨리 가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것이 아니던가요? 


 나와 또 다른 내가 마주 보고 서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