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1 11:27
다 부질없다 하더니
(고 배정웅 시인의 마지막 7일)
김태영
_온 몸이 꽃잎같이 얇아지고 시간의 헤진 베옷은 칭칭 감고
슬프게 작아진 여자미라를 그처럼 죽었어도 다시 죽은 듯이
조용한 꽃미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앓아 누운지 40여일 사이에 책갈피에 채집된 나비처럼 얇아져 있는 사람, 시인의 “꽃미라”를 웅얼거리며 나는 난을 안고 달린다. 살아만 있어준다면 그의 눈길이 닿는 곳에 언제나 꽃을 놓아두고 싶다. 시인의 방엔 꽃이 있어야 해. 아직 볼 수 있고 생각도 살아 있어. 지체된 시간을 변명하며 속력을 내는데 딸로부터 전화, 아빠 돌아 가셨어요. 핸들을 잡은 그 친구의 손이 부르르 떤다. 집에 당도하니 장의 차가 현실을 말해 준다. 오후 3시에 도착 했는데 1시 30분에 눈을 감았다 한다. 7월 9일 토요일. 반듯이 잠들어있는 시인, 눈길 닿는 곳에 꽃을두려하나 부질없다. 그는 세상을 다 보고 있으나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하얀 띠로 얼굴을 묶었다. 새의 주둥이를 묶은 그림을 본일 있다. 열려있는 입 때문이겠지만 새가 된 그를 상상해 본다. 그토록 어디론가 훨훨 가고 싶어 하더니 지금쯤 먼저 간 아내를 데불고 고향바다 위를 나를 것이다.
5월 초 한국가기 전 시인과 점심을 했다. 6년만이라고? 잘 놀다오소. 좋아하는 된장찌개 속의 바지락을 건져 올리며 쓸쓸히 웃었다. 그 눈에 고향바다가 스친다. 제주여행중 불현듯 전활 했더니 딸이 아버질 바꿀 수 없다 한다. 그의 절친에게 듣는 소식은 소식 불통 이라고. 날마다 소풍 같던 여행에 가슴이 무거워지기 시작 했다. 다른 문인들에 비해 시인을 안 시간은 짧다. 그의 절친과 내 언니 같은 J선생님이 엘에이에서 네 시간 거리에 사는 나를 찾아 왔다. 작년 겨울 일이다. 우리는 Yosemite Park 에 갔다. 산길은 험해서 시인이 힘들어 했으나 시도 낭송하고 다음에 Sanfrancisco도 가자며 기뻐했다. 여행은 묵은 시간을 압축시켜 하루를 10년같이 가깝게 한다.
_급류에 떠내려가다가 수초나 마른 풀대에 매달려
애처럽구나 허우적 허우적대며 보이지않는 전능한 손 하나
마음에 다급히 놓아보는 내 존재의 모습
늘 속이 좋지 않다는 시인의 “배앓이” 를 읽은터라 어두운 마음이 죽음에 닿으려 했다. 아니나 다를까 50일만에 귀국해 들은 소식은 말을 잃었다는 것. 전복 죽을 산 그의 절친과 집에 가니 빈 집. 메모를 남겨놓고 돌아 섰다. 다행히 다음 날 7월 4일 딸이 전화를 해 아빠를 바꿨다. 와보란다. 말 소리를 직접 들은 절친이 기뻐한다. 전복 죽을 다시 사 들고 달렸다. 센 빈센트병원 703호. 흰 시트 아래 박재된 듯 버티고있는 목숨을 본다. 불러도 대답 없고 웃겨보나 웃어지지 않는 새하얀 얼굴, 평소에 style을 즐기는 분이라 그를 꾸며주던 소품, 모자, 안경, 틀니, 구부정한 어깨를 덮어주던 겉 옷 없이 그토록 보이기 싫어하던 모습을 보니 죄송하고 민망하다. 지인들께 소식을 알릴까요 하니 겨우 팔을 올려 손사래를 친다. 손가락이 마른 솔가지 같다.
_흔한 울음 한 점 없이 오직 침묵으로 맞서고 있다.
나처럼 차마 죽지 못하는 목숨 하나
“작은 개 한 마리” 다. 헝겊인형으로 만든 개가 차 바퀴에 깔리는 것을 보고 그 주인을 생각해 차마 죽지 못하는 목숨을 그렸다. 얼핏 보아도 네 가지의 물약 주사를 몸 속에 흘려 넣고 있다. 본인이 원해서 목에 넘기는 건 오직 식혜란다. 기쁜 마음으로 식혜가루를 산다. 밤새워 삭히고 식혀 다음날 가지고 가니 퇴원 준비란다. 병원에서 더 두지 않겠다는 것. 위와 간이 최악이라 수술 불가능 하다고. 선생님 손 좀 만져봐도 될까요. 눈을 떴다 감는다. 반가워 얼른 손을 잡아 본다. 늘 그가 먼저 모든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었지. 차가운 손이 마지막 악수라 한다. 손을 잡길 잘 했다 생각한다. 이제는 무엇을 보류할 시간이 없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한 한이 있다. 고 2 때였다. 광주에서 시외버스 타고 가니 입관이 끝났다. 온 밤을 관 앞에 앉아 울었다. 한시를 즐겨 쓰시던 그의 시 한 줄 갖지 못해 아쉽다. 돌 안 된 막내를 두고 어찌 눈을 감았으리. 나는 시인의 손을 어루만지며 마지막 인사를 한다. Madera에 왔을 때 밤 늦도록 얘기하며 놀 걸 피곤한데 일찍 자라며 여자들은 일찍 우리 집으로 왔다. 와인이라도 한 잔 하며 좀 앉았다 가면 안되냐며 허허로이 웃더라는 뒷얘기다. 그 때 좀 밤새워 좋은 얘기 많이 들을 껄. 인생이란 껄껄껄 하다 보면 끝나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처럼 빈 방을 지키던 초로의 신사가 마지막 먼 거리 여행을 왔던 것을. 얇삽했던 내 처사가 못내 부끄럽다.
_차마 시와 결별하지 못해 고뇌와 슬픔이 하마 더 깊어진 나처럼
밤이면 숲의 어둠을 쪼는 붉은 가슴 울새처럼
불면으로 뒤척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느 시인에게”에서 썼듯이 외지에서 떠도는 외로움을 토해내는 그의 시는 가슴에 혈흔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손을 놓고 나오는 발걸음이 뒤로 간다. 퇴원 했단 소식에 집으로 갔다. 큰 딸이 와 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한다. 종이에 뭐라도 적어 남기게 하자 하나 이미 기력이 없어 보인다. 평소에 즐겨 입던 많은 옷들이 일어 나세요 속삭이며 옷걸이에서 주인을 내려다 보고 있다. 유리창 너머 목타는 장미 가지 안을 기웃거린다. 딸 없는 나 아프면 당신이 와서 봐줘야지. 얼른 일어나. 친구의 말에 간신이 말아 올린 검지와 식지가 가늘게 떤다. 주 두 세 번은 점심을 같이했던 그의 절친의 눈이 붉게 젖는다. 해 줄 일이 아무것도 없어 집으로 왔다. 다음 날은 미숫가루를 가져 갔다. 꿀이나 식혜에 엷게 타서 마시게 하면 어떨까 그러나 다 소용 없는 일이 되었다.
침대 양쪽에서 아빠의 손을 붙잡고 소리 없이 우는 예쁘게 잘 자란 미혼의 두 딸. 나도 아버지의 손을 잡아보고 싶었었다. 네 시가 되자 두 딸과 이모네 식구, 우리 두 사람이 둘러 선 가운데 가신 분을 위한 기도가 있었다. 숨을 쉴 것만 같은데 곧 장의 차에 실려 나간다. 돌아 오는 길 피리소리 들리는 것 같아 하늘을 보니 “내 이승의 숨 놓거든”이 떠돌고 있다.
_내 이승의 숨 놓거든 내 뼈에다가는 구멍 되는 대로 몇 개 뚫어
온전한 소리꾼이 되지 못한 내 허허한 노래를
그대여 한 두 소절만 읊조려 주었으면
미주 한국 문인 장으로 장례예식이 치러졌다. 7월 13일 수요일 밤 6시. 많은 문인들과 지인들이 고인을 추모 했다. 다음 날 아침 11시 발인예식이 다. 최운형 목사님의 말씀이다. 장례식에 초대된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한 것. 죽을 것을 미리 알고 겸손하게 감사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장지로 옮겨져 하관식이 있었다. 나는 차마 삽을 잡지 못 했다. 바치는 장미가 시를 향한 그의 마음처럼 새 빨갛다.얼추 50여명이 경건하게 그를 배웅했다. 아내의 묘지가 몇 발짝 발치에 있어 우리를 위로한다. 이제 스타 박스 에도 사무실에도 그는 없다. _정말 색색 타투같이 인간의 몸과 영혼 속에 영원으로 각인되는 그런 시 한 줄 쓰고 싶었다는 시인의 고백을 존경 하기에 나는 감히 이 글을 쓴다. 또한 소식 몰라 애타하던 문우들께 우연히 나마 가까이서 7일 동안 지켜 본 후배로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밑 줄 그으며 읽을 수 있는 시를 남겨주신 선배님께 감사 드리며 하늘의 평화가 깃들기를 빈다.
다 부질없다 하더니
(고 배정웅 시인의 마지막 7일)
김태영
_온 몸이 꽃잎같이 얇아지고 시간의 헤진 베옷은 칭칭 감고
슬프게 작아진 여자미라를 그처럼 죽었어도 다시 죽은 듯이
조용한 꽃미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앓아 누운지 40여일 사이에 책갈피에 채집된 나비처럼 얇아져 있는 사람, 시인의 “꽃미라”를 웅얼거리며 나는 난을 안고 달린다. 살아만 있어준다면 그의 눈길이 닿는 곳에 언제나 꽃을 놓아두고 싶다. 시인의 방엔 꽃이 있어야 해. 아직 볼 수 있고 생각도 살아 있어. 지체된 시간을 변명하며 속력을 내는데 딸로부터 전화, 아빠 돌아 가셨어요. 핸들을 잡은 그 친구의 손이 부르르 떤다. 집에 당도하니 장의 차가 현실을 말해 준다. 오후 3시에 도착 했는데 1시 30분에 눈을 감았다 한다. 7월 9일 토요일. 반듯이 잠들어있는 시인, 눈길 닿는 곳에 꽃을두려하나 부질없다. 그는 세상을 다 보고 있으나 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하얀 띠로 얼굴을 묶었다. 새의 주둥이를 묶은 그림을 본일 있다. 열려있는 입 때문이겠지만 새가 된 그를 상상해 본다. 그토록 어디론가 훨훨 가고 싶어 하더니 지금쯤 먼저 간 아내를 데불고 고향바다 위를 나를 것이다.
5월 초 한국가기 전 시인과 점심을 했다. 6년만이라고? 잘 놀다오소. 좋아하는 된장찌개 속의 바지락을 건져 올리며 쓸쓸히 웃었다. 그 눈에 고향바다가 스친다. 제주여행중 불현듯 전활 했더니 딸이 아버질 바꿀 수 없다 한다. 그의 절친에게 듣는 소식은 소식 불통 이라고. 날마다 소풍 같던 여행에 가슴이 무거워지기 시작 했다. 다른 문인들에 비해 시인을 안 시간은 짧다. 그의 절친과 내 언니 같은 J선생님이 엘에이에서 네 시간 거리에 사는 나를 찾아 왔다. 작년 겨울 일이다. 우리는 Yosemite Park 에 갔다. 산길은 험해서 시인이 힘들어 했으나 시도 낭송하고 다음에 Sanfrancisco도 가자며 기뻐했다. 여행은 묵은 시간을 압축시켜 하루를 10년같이 가깝게 한다.
_급류에 떠내려가다가 수초나 마른 풀대에 매달려
애처럽구나 허우적 허우적대며 보이지않는 전능한 손 하나
마음에 다급히 놓아보는 내 존재의 모습
늘 속이 좋지 않다는 시인의 “배앓이” 를 읽은터라 어두운 마음이 죽음에 닿으려 했다. 아니나 다를까 50일만에 귀국해 들은 소식은 말을 잃었다는 것. 전복 죽을 산 그의 절친과 집에 가니 빈 집. 메모를 남겨놓고 돌아 섰다. 다행히 다음 날 7월 4일 딸이 전화를 해 아빠를 바꿨다. 와보란다. 말 소리를 직접 들은 절친이 기뻐한다. 전복 죽을 다시 사 들고 달렸다. 센 빈센트병원 703호. 흰 시트 아래 박재된 듯 버티고있는 목숨을 본다. 불러도 대답 없고 웃겨보나 웃어지지 않는 새하얀 얼굴, 평소에 style을 즐기는 분이라 그를 꾸며주던 소품, 모자, 안경, 틀니, 구부정한 어깨를 덮어주던 겉 옷 없이 그토록 보이기 싫어하던 모습을 보니 죄송하고 민망하다. 지인들께 소식을 알릴까요 하니 겨우 팔을 올려 손사래를 친다. 손가락이 마른 솔가지 같다.
_흔한 울음 한 점 없이 오직 침묵으로 맞서고 있다.
나처럼 차마 죽지 못하는 목숨 하나
“작은 개 한 마리” 다. 헝겊인형으로 만든 개가 차 바퀴에 깔리는 것을 보고 그 주인을 생각해 차마 죽지 못하는 목숨을 그렸다. 얼핏 보아도 네 가지의 물약 주사를 몸 속에 흘려 넣고 있다. 본인이 원해서 목에 넘기는 건 오직 식혜란다. 기쁜 마음으로 식혜가루를 산다. 밤새워 삭히고 식혀 다음날 가지고 가니 퇴원 준비란다. 병원에서 더 두지 않겠다는 것. 위와 간이 최악이라 수술 불가능 하다고. 선생님 손 좀 만져봐도 될까요. 눈을 떴다 감는다. 반가워 얼른 손을 잡아 본다. 늘 그가 먼저 모든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었지. 차가운 손이 마지막 악수라 한다. 손을 잡길 잘 했다 생각한다. 이제는 무엇을 보류할 시간이 없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한 한이 있다. 고 2 때였다. 광주에서 시외버스 타고 가니 입관이 끝났다. 온 밤을 관 앞에 앉아 울었다. 한시를 즐겨 쓰시던 그의 시 한 줄 갖지 못해 아쉽다. 돌 안 된 막내를 두고 어찌 눈을 감았으리. 나는 시인의 손을 어루만지며 마지막 인사를 한다. Madera에 왔을 때 밤 늦도록 얘기하며 놀 걸 피곤한데 일찍 자라며 여자들은 일찍 우리 집으로 왔다. 와인이라도 한 잔 하며 좀 앉았다 가면 안되냐며 허허로이 웃더라는 뒷얘기다. 그 때 좀 밤새워 좋은 얘기 많이 들을 껄. 인생이란 껄껄껄 하다 보면 끝나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처럼 빈 방을 지키던 초로의 신사가 마지막 먼 거리 여행을 왔던 것을. 얇삽했던 내 처사가 못내 부끄럽다.
_차마 시와 결별하지 못해 고뇌와 슬픔이 하마 더 깊어진 나처럼
밤이면 숲의 어둠을 쪼는 붉은 가슴 울새처럼
불면으로 뒤척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느 시인에게”에서 썼듯이 외지에서 떠도는 외로움을 토해내는 그의 시는 가슴에 혈흔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손을 놓고 나오는 발걸음이 뒤로 간다. 퇴원 했단 소식에 집으로 갔다. 큰 딸이 와 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한다. 종이에 뭐라도 적어 남기게 하자 하나 이미 기력이 없어 보인다. 평소에 즐겨 입던 많은 옷들이 일어 나세요 속삭이며 옷걸이에서 주인을 내려다 보고 있다. 유리창 너머 목타는 장미 가지 안을 기웃거린다. 딸 없는 나 아프면 당신이 와서 봐줘야지. 얼른 일어나. 친구의 말에 간신이 말아 올린 검지와 식지가 가늘게 떤다. 주 두 세 번은 점심을 같이했던 그의 절친의 눈이 붉게 젖는다. 해 줄 일이 아무것도 없어 집으로 왔다. 다음 날은 미숫가루를 가져 갔다. 꿀이나 식혜에 엷게 타서 마시게 하면 어떨까 그러나 다 소용 없는 일이 되었다.
침대 양쪽에서 아빠의 손을 붙잡고 소리 없이 우는 예쁘게 잘 자란 미혼의 두 딸. 나도 아버지의 손을 잡아보고 싶었었다. 네 시가 되자 두 딸과 이모네 식구, 우리 두 사람이 둘러 선 가운데 가신 분을 위한 기도가 있었다. 숨을 쉴 것만 같은데 곧 장의 차에 실려 나간다. 돌아 오는 길 피리소리 들리는 것 같아 하늘을 보니 “내 이승의 숨 놓거든”이 떠돌고 있다.
_내 이승의 숨 놓거든 내 뼈에다가는 구멍 되는 대로 몇 개 뚫어
온전한 소리꾼이 되지 못한 내 허허한 노래를
그대여 한 두 소절만 읊조려 주었으면
미주 한국 문인 장으로 장례예식이 치러졌다. 7월 13일 수요일 밤 6시. 많은 문인들과 지인들이 고인을 추모 했다. 다음 날 아침 11시 발인예식이 다. 최운형 목사님의 말씀이다. 장례식에 초대된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한 것. 죽을 것을 미리 알고 겸손하게 감사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장지로 옮겨져 하관식이 있었다. 나는 차마 삽을 잡지 못 했다. 바치는 장미가 시를 향한 그의 마음처럼 새 빨갛다.얼추 50여명이 경건하게 그를 배웅했다. 아내의 묘지가 몇 발짝 발치에 있어 우리를 위로한다. 이제 스타 박스 에도 사무실에도 그는 없다. _정말 색색 타투같이 인간의 몸과 영혼 속에 영원으로 각인되는 그런 시 한 줄 쓰고 싶었다는 시인의 고백을 존경 하기에 나는 감히 이 글을 쓴다. 또한 소식 몰라 애타하던 문우들께 우연히 나마 가까이서 7일 동안 지켜 본 후배로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밑 줄 그으며 읽을 수 있는 시를 남겨주신 선배님께 감사 드리며 하늘의 평화가 깃들기를 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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