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8 08:17
손자국
김태영
오늘은 우리 집 이사 가는 날입니다. 이삿짐 차가 동산만큼 짐을 싣고 떠났어요.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잊은 물건이 없나 살펴 봅니다. 벌써 세 번 째입니다. 갑작스런 일로 충격을 받아서 인지 벽들이 새하얀 빛을 바늘처럼 되쏘고 있을 뿐 텅 빈 집은 먼지 한 톨 남아있지 않아요.
마법의 동굴에 갇힌 아이처럼 무서워 후다닥 뛰쳐나와 빨리 가자고
소리쳤어요. 좋아할 때는 언제고 어떤 슬픔 때문에 가슴이 쓰라렸어요.
고속도로 진입로로 오르던 아빠가 갑자기 차를 갓길에 세우더니
“미안해. 곧 뒤따라 갈 게. 중요한 걸 잊었어.”
키를 엄마 손에 넘겨주고 차에서 내렸어요. 나도 재빨리 따라 내렸죠. 아빠가 숨겨놓은 것이 무엇 인이 정말 궁금 했거든요.
다시 돌아온 아빠는 거실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작은 소리로 똑 같은 말을 중얼거릴 뿐 무얼 찾지를 않아요. 벽에 대고 ‘ 열려라 참깨!’ 하거나 이상한 암호를 외치면 벽이 스르륵 열리고 아빠의 손이 쑥 들어가 보물상자를 꺼내 오기를 나는 기다리고 있어요. 꿈쩍도 않으니 답답해서 아빠 곁에 바짝 붙어 앉아 귀를 갖다 댔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밤 늦게 들어오는 아빠한테 장난감 블록 안 사왔다고 깡깡 울어 야단 맞던 기억, 엄마 아빠 싸우는 소리, 속상해도 숨을 곳이 없던 버섯같이 작은 집. 감사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겨우 그 말을 하려고 엄마 혼자 보냈나 심통이 났지만 기다려야 했어요.
아마 30 분쯤 지났을 겁니다. 아빠가 벽에 대고 얘기를 시작 했어요. 굵은 눈물방울이 입술 위로 후두둑 떨어 졌어요. 아빠의 목이 빨간 걸 보니 속으로 많이 울었나봐요.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창피 할 까봐 참았지요. 아빠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보거든요. 눈물은 한없이 쏟아지는데 이상도 하지요. 아빠 입이 실실 웃고 있어요. 울다 웃는 아이처럼.
“아내의 손을 잡고 처음 이 집에 들어오던 날은 우리들의 결혼식 날이었어요. 텅 빈 네모 칸 속에서 신문지를 깔고 컵라면을 먹었지요.
폴과 세라가 태어나고 방, 부엌, 거실까지 만들고….이제 집이 터져라 하고 사들인 물건들을 싣고 큰 집으로 떠납니다. 참! 팍팍하게 살았어요. 도와 주는 사람 하나 없다고 원망하며 싸우며 살았지요. 5 년 동안 웃지도 않고 일만 했어요. 그렇지만 아프지않고 잘 살았는데…..고마운 줄도 모르고….
이건 비밀인데요. 사실 나는 흰 벽이 정말 싫었어요. 포근한 맛이 없고 쌀쌀 맞죠.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더 피곤해지거든요. “
이 때 엄마랑 세라가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 왔어요. 아빠는 뒤돌아 보지 않고 얘기를 계속해요. 엄마가 눈짓으로 물었어요. ‘감사’ 내 입 모양에 엄마도 무릎 꿇고 “ 감사합니다.” 했고 세라도 “ Thank you.” 했어요.
“어? 당신도 왔어? 빨리 가야지.”
엄마가 손수건을 꺼내 아빠의 눈물 자국을 닦아 주더니 손을 꼭
잡고 흰 벽을 쓰다듬으며 걸었어요. 세라와 나도 손을 잡고 온 집 안의 벽을 만지며 걸었어요. 이 때였어요. 새하얀 벽에 파르스름한 안개가 피어 오르더니 창 마다 불 밝힌 마을이 생겨 났어요. 시냇물 흐르는 소리 카나리아 우는 소리 다리 위에서 아이를 부르는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도 들립니다. 어린이 방에도 거실에도 포근하고 아련한 안개 마을입니다.
“맞아요. 이런 그림이 있는 실크 벽지를 바르고 싶었어요. 정신없이 살았네요.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문득 아빠의 등에 찍힌 희미한 손자국을 보았어요. 이파리 넓은 나무 사이에도 손자국이 보여요. 아빠와 엄마가 내 등을 쓰다듬어요. 세라도 손을 포갰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말. 등이 따뜻합니다. 무엇이 숨을 쉬는 것 같아요.
5 년 동안 거기 있었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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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