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영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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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단편소설/살아있는 날의 동화

2019.02.21 13:48

김태영 조회 수:84

 

1

단편소설

*살아 있는 날의 동화 *


                                                                                                          김태영


 남편이 죽고 몇 달이 지난 다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어디를 가야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당장 길을 떠나야 하는데 미적거리고 있다는, 한데 생각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몸이 보챘다. 도랑물이 길이 막혀 뱅뱅 돌다가 침전되어 가듯 팔다리가 무거웠다. 주저앉을 듯한 걸음걸이로 가게 안에서 서성거리다 겨우 마감시간을 채우고 돌아오곤 했다. 

 소파에 누워 돌덩이같이 무거운 몸을 불평하다 문득, 토요일이구나 깨달아 졌다. 그가 토요 귀신이 되어 날 부르는 것은 아니다. 머슬 메모리 [Muscle Memory]. 이런 현상은 매주마다 계속되었다. 아마 5 년 가까이 그랬었지. 그와 산 세월이 20 년쯤 되었으니 그 때는 싫었던 일조차 몸이 길들여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 남자는 토요일 이른 아침에 집을 떠나야 했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야 비로소 살아 있는 기분을 느낀다고 했다. 남에게 고용된 사람, 즉 Employee로서 돈과 시간에 묶여 있는 자신을 노예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남자와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다고 판단 내렸을 때는 채팅 결혼의 실패를 대비해 라운드 티켓을 끊어 왔던 티켓의 기한이 하루 지난 다음이었다. 365일 동안은 낯설게 살기 놀음이 그런대로 새로웠다. 하지만 나머지 19 년 정도의 시간은 어쩔 수 없이 살아 냈다고 해야 옳다. 비참한 기분이 종류석처럼 안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자기 중심적인 남편은 전혀 알지 못했고 나는 모른 체하며 외국이니 자립할 용기가 없다는 핑계로 그에게 기생해 살았다.     

 금요일 4시 집에 온 남편은 이른 저녁을 먹는다. 머리와 뼈와 가시들을 말끔히 뜯어내 이름을 알 수 없는 알라스카산 생선들이 바삭하게 튀기거나 번지르 하게 지져진 채로 그의 입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점점 식욕을 잃어 갔다.

 “왜 안 먹어? 이거 우리 딱지섬에 있는 빠가사리 냄새가 난다. 맛있어.”


2.


코를 벌름거리며 포식하는 그는 지도에도 찾기 힘든 섬 태생이었다. 배를 가득 채운 다음 짐을 차에 실어 두어야만 두 발을 쭉 뻗는다. 그 순간부터 눈빛이 살아 났다. 이제 시간은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누워 있는 시간도 아까워 앞 뒤뜰을 걸어다니다가 새벽을 맞기도 했다. 고용된 시간과 그렇지 않는 시간은 나와 타인처럼 취급되었다. 

 토요일 아침 눈뜨자마자 차에 올랐다. 늘 캄캄한 새벽에 Olive Avenue 1307을 빠져 나갔다. 그 순간부터 어쩐 일인지 나는 늘 캑캑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안녕? 또다시 인생을 바꾸어 볼 찬스가 왔군. 반가워요.  Brian 입니다.”

 “ 처음 뵙겠어요. Aria 예요. 같이 가게 되어 기뻐요.” 

 이름을 말할 땐 긴장한다. 혹시 같은 이름을 대면 버럭 화를 낸다. 그의 이름은 듣지도 않는다. 20 년 동안 토요일 아침마다 새로운 사람 행세를 하며 1박 2일을   낯선 곳에서 보낸다. 생소한 침대에서 모르는 남자와 잠자는 게임을 한다. 한 사람과 일생을 같이 살기가 지루하다는 것, 기대가 있어야 살 맛이 난다는 것, 밋밋하게 주말을 보내면 월부터 금요일까지는 완전 지옥이니 탈출할 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가 식도암으로 죽자 일탈의 기회를 엿봤던 날카로운 시간들이 비밀의 강물 위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10 년쯤 지나자 주말이 되어도 몸이 보채지 않았다. 부부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둘이서 흘려보냈던 시간의 물줄기가 보이는 것 같아 멍하니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살 냄새에 빠져 있던 시간 또한 인생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노라고 여자는 고백했을까. 등 구부리고 자는 모습이 정말 안쓰러웠소 내 더 잘해 줄 게. 남자는 입 벌려 말한 일이 있을까. 쓰잘데없는 생각을 하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면 검은 새떼들이 실크스카프처럼 출렁출렁 날아가고 빈 하늘만 이슬 맺힌 눈에 가득하였다. 

새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화석에 핀 은회색 조개껍질 흔적같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노라면 시간은 폭포를 타고 내리는 물살처럼 빨리 흘러서 하늘이 불타올랐다.  하루가 사라지는 순간이 온 것이다. 나도 결국 불에 타서 흙으로 돌아갈 시간이 올 것이다. 

일에 묶여 있는 상태였으니 훅, 떠날 수는 없었으나 정신은 바람이었다. 구름을 따라가다 새를 따라가다 은사시나무 이파리에 앉아 잠깐 반짝일 때도 있었다. 어쩌다 


3


그늘에 앉아 쉴 때면 얼굴의 주름이 빗살무늬 토기의 표면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유년의 내가 배춧잎 같이 푸른 눈으로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시니어 아파트로 이사 왔다. 원인불명으로 키드니가 많이 손상된 상태다. 생계를 책임져 주지 않던 장난감 가게를 접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마지막 3년은

 회생의 몸부림 같았지만 실은 Los Angeles 에 시니어 아파트를 신청해 놓고 기다리는 기간, 패업과 맞물려 삶의 터를 6시간 떨어진 곳으로 옮길 수 있었던 건 좋은 징조라 생각한다.

작은 침대 하나 하얀 벽에 붙어 있다. 관 같다. 반듯하게 눕는다. 올록볼록한 석회질의 천정이 어느 혹성의 표면처럼 표정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길 잃은 어린 별 하나 없나 꼼꼼히 살핀다. 눈 먼 귀뚜라미 조차 아쉬운 밤, 침대 네 귀퉁이를 샅샅이 뒤지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누구 없어요?” 대답이 없다. 둘이 였을 때도 혼자였다.  딱지섬엔 부모와 아들 하나, 친척이 없었다는 남편, 왜 남자와 여자는 섬에 숨어 들어와 은밀히 살았을까. 그는 홀로 미국까지 와서 곁에 와이프가 있는데 늘 외롭고 답답하다는 말로 거리를 두었다. 살아서 입 열지 않았으니 수수께끼다. 부초로 기억되는 남편의 뒤에 내가 떠가고 있다.  

지난 일을 생각하지 말자. 벌떡 일어나 노트를 펼친다. 일기를 쓰기로 한다. 

1000 일. 첫 날. 로스 엔젤레스 파라다이스 시니어 아파트 입주. 서 쪽에 엔젤레스 산이 보인다. 저택들의 하얀 벽, 창마다 빛나는 따스한 불빛, 별이 보이는 하늘이 맘에 든다. 일기는 1000단위로 잘라 씀. 오늘부터 1000일, 즉 24000 시간을 맘껏 쓸 수 있음. 숫자가 바닥 나도 2 년 73 일을 살았음. 아직 살아 있으면 다시 1000 일 갖게 될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 여생을 살아가는 지침서를 쓰자니 버켓 리스트가[Bucket List] 가 된다.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방, 부엌, 응접실, 화장실, 옷장을 걸어본다.  일 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다. 다시 산 쪽을 바라보며  “거기 누구 없어요?” 검은 유리창을 두들겨보는데 느닷없이 전화가 운다. 고양이 울음소리. ?.?.?. 이삿짐을 옮기다가 전화기를 잃어 버렸다. 오늘 전화기 회사에 갔다. 헌 전화기에 임시 번호를 넣어주며 당분간 쓰라고 했다. 2018년

스마트폰 겔럭시 X는 시간이 좀 걸린다 했다. 새 번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무 늦은 시간. 받지 말자. 고양이는 배고픈 아이처럼 애처롭게 울다 꼬리를 감춘다.


4 


 자정을 넘은 시간, 이제 999일이 남았다. 나는 시간을 가진 부자다. 무엇을 할 것 인가. 날자. 웃자. 달리자. 많이 보자. 산에 가자. 바다에 가자.  바람과 햇빛과 달빛과 별들과 도요새와 엄지를 높이 들고 사랑을 나누는 게들과 소라와 초록 눈을 가진 작은 물고기들과 무당이 아닌데도 무당벌레가 된 레이디 버그와 친하게 지낼 것이다. 지팡이 짚고 가는 노파를 부축해 줄 일이며 무엇보다도 나는 이제 신호등 앞에서 절대 뛰지 않을 것임.

 다시 고양이가 운다 전화 벨 소릴 바꿔야겠다. 좀 버텨 보다가 팬을 놓고 받는다.  

“산드라? 왜 전활 안 받아.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 들으니 살겠다. 이봐 나 오늘 붕어 빵 먹었다. 배를 가르니 뜨거운 팥이 가득, 음 너랑 같이 먹고 싶어. 붕어빵은 코리언만 먹지? 아주 많이 보고 싶다. 나 한 입 너 한 입 같이 먹자. 우리 만나자. OK?”

“당신은 누구 십니까?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멀고 먼 별에서 내가 왔나요?”

“맞아. 산드라!  얼굴 보자.  2 년 동안 얼굴도 모르고 이게 뭐야. 만나자 .응?”

귓 볼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간절히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뇌를 자극하는 바리톤.

1:00 am을 적신다.  나는 목소리 땜에 사랑에 풍덩 빠진 경험이 있다. 끊지 못한다.

오히려 따뜻하고 단단한 팔베개가 그리워 진다. 비밀의 오솔길을 따라 그에게 닿고 싶은 나른한 유혹. 육체는 얌전한 숙녀인데 뇌가 젤리 피쉬처럼 꿈틀거린다.

“2 년 동안 얼굴 한 번 못 봤으면 뭐가 잘못 됐네. 반성하고 끊어요.”

“ 산드라.  끊지 마. 알잖아. 난 너밖에 없어. 죽은 줄 알고 많이 슬펐다. 네가 그랬지 3개월 밖에 못 산다고.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사랑하게 해 줘. 너를 위해 눈 뜨고 너를 위해 일하게 해다오. 난 네가 필요해. 입양센터에서 네 번호를 받아와 전화 한 순간부터 널 사랑하게 됐어. 우리가 아주 먼 옛적부터 강물처럼 만나질 사이라는 것을 느꼈어.”

“미안해요. 난 산드라가 아닙니다. “

“ 내 스탭 마더와 엑스 와이프는 날 무시하며 돈만 뺏어가는 마귀 같은 여자들 이었어.  너는 달라. 너는 나의 천사. 목소리 들으면 알지. 나 심리상담 닥터라고 말했지? 너 같은 목소린 찾을 수 없어. 부드럽고 달콤하고 사랑해주고 싶은, 제발 널 사랑하게 해다오.


 5


 나의 베이비. 이 행운 놓지 않을 거야. 다음 달 첫째 토요일 한 시에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내 딸 결혼식이 있어. 와 줘. 내 곁에 앉아 줘. 소원이야. 네가 필요해. 꼭 와야 해. 제발 부탁해.”

“어떻게 갑자기 우린 모르는 사인데.”

“아니야. 우린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 되어 있었던 거야. 산드라! 너도 말 했었지. 진정한 가족이 필요하다고. 같이 살지 않아도 좋아. 돕는 거야. 외로움을 밀어내야지. 걔 시집 가고 나면 난 비로소 자유야. 새가 된다. 너랑 온 세상을 날아 다닐 거야. 비행기를 사고 싶니? 사 줄게. 하얀 요트를 살까? 그러자. 파리에서 브런치? 가자. 두려워하지 마. 같이 사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 방향을 보고 함께 즐기는 것에 삶의 가치가 있는 거야. 망설이지 마라. NO라고 말하지 마세요. 시간이 없어요. 오늘 이 순간을 살아야 해요. 살아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따로 그러나 하나가 되자. 그리피스 언덕에 소라껍질 같은 집 하나 남겨 놓고 단순하나 풍요롭게 살자. 우린 할 수 있어. 이제 뿌리를 내리자.”

 “안돼요. 산드라가 아닙니다. 나는 나는………….”

 많은 이름들이 뇌속에서 싸우는 바람에 전화를 끊고 만다. 이름만 바꾸면 되는 건 아니었는데. 나는 누구인가.  맞아 산드라다. 그는 죽었을까? 화장실로 가서 옷을 벗는다. 터무니없이 큰 거울이다. 벗은 몸을 본다. 주름진 얼굴과 목 아래로부터는 갑자기 달라지는 뽀얀 살결, 크지 않은 젖가슴에 분홍빛 젖꼭지가 막 익기 시작한 오디 같이 수줍게 달려 있다. 뒤돌아선다. 크림트의 여자들보다 훨씬 여성스런 곡선. 모딜리아니의 애인 Jeanne이 서러운 말 한마디를 품고 아쉽게 돌아설 때 보이는, 죽음조차 뛰어 넘을 수 있는 표정을 담고 휘어진 목선. 얼핏 생각나는 남편 이름과 같은 이름 브라이언이 알아야 할 기적은 늙지 않는 내 몸에 환생한 산드라일 것이다. 결혼식까지는 33일 남았다.

 991일. 도시의 기적 소리는 밤에만 들린다. 유칼립투스 나무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껍질을 벗어 기차에 실어 보낸다. 오늘 그린 라인 전철을 타고 숲에 가서 발가벗은 나목을 껴안아 주었다. 한겹 두겹 껍질을 떨구며 속으로 울었을 나무.  피 흘리며 가벼워졌겠지. 나뭇잎 사이로 하늘을 보았다. 꽃가루가 한없이 날아왔다. 움켜쥐려 해도 잡히지 않는


6


 시간의 몸짓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연분홍 쉬폰 드레스를 샀다. 석 줄짜리 진주 목걸이도 샀다.  토요일이 아닌데도 스스로 설레이기 시작함. 그래 산드라니까.

 고양이, 아니 전화가 운다. 소릴 바꿔야지. 자정 넘은 시간이다. 저절로 받아진다.

 “산드라! 너랑 결혼 해야겠어.  같이 살자. 듣고 있니? 아들이 플로리다 휴양지에 집을 마련해 놨어, 너랑같이 가겠다 했지. 다음 달 토요일 12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만나자. 전화번호를 잃어 버렸었어. 약속 지키려고 애썼지만. 미안해 용서해줘. 꼭 와. 도와줘.  부탁해. 같이 떠나자. 사실 딴 여자들 많지만 너를 선택 했어. 알겠지?” 

떨리는 목소리다. 목젖에 눌린 쉰 소리는 누구에겐가 쫓기고 있다. ‘You have a wrong number.’ 대답할 사이도 없이 끊어졌다. 산드라는 저런 노인과도? 다시 일기를 쓰려다 말고 옷을 들고 화장실로 간다. 발가벗는다. 드레스를 입어 준다. 두 살 때 아이리시 가족에 입양된 브라이언.  딸은 한국계 백인이다. 산드라도 입양된 한국인이다. 거울 속의 내가 두 살 때부터 이탈리언 가정에서 자란 얼굴을 만들어 보려고 묘하게 웃다가 

 ‘ 삐아체레 디 꼰노쉐띠 [처음 뵙겠습니다.] 차우  [안녕] 우물거려 본다.

990 일 자정이 넘었다. 파라다이스 시니어 아파트 입주 열흘 째다. 6층 노인이 “ 여보! 여보! “  죽은 지 오래 됐다는 아내를 부르고 있다. 밤마다 그런다. 소리는 구름에 실려 저승으로 가다가 별똥별에 맞아 지상으로 떨어진다. 다섯 시면 4 층 할머니는 새벽 기도에 갈 것이고 여섯 시 반에는 2층 노랑머리가 카지노에 간다. 그의 남자친구는   살그머니 자기 방으로 도둑처럼 스며든다. 매일 반복 되는 일이다.  이 와중에 고독사 사건은 엊그제 일어 났다. 아내가 곰국 끓여 놓고 딸네 집 간 사이 한국 노인이 의자에 앉은

채 숨져 있는 것이 사흘 뒤에 발견되었다. 나는 고독사 할 가능성이 있다. 도시에 아는 사람이 없다. 살아있는 날에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슬플 때 함께 울어줄 친구 한 사람이다.   

968 일 -너무 늦기 전에 그 사람을 맞이하라 - 아침에 집을 떠날 때 책상 위에 남겨 놓은 말이다. 빗금 치며 스쳐 간 말들 곧 잊어버린다. 살아 있는 날에 무엇을 보았는가 잊어버리기 전에 일기장에 채집해 두고 싶다.  밤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금성 [Venus] 의

  

7


이름을 잊어 버리고 골똘히 생각 하고 있을 때면 영화 노트 북의 치매 걸린 여주인공이 첫사랑이었던 남편을 몰라보던 생각이 나서 가슴이 공포에 짓눌린다. 

오늘은 지하철 레드 라인을 타고 7 Street에서 블루 라인으로 옮겨   Santa Monica 해변에 갔음. 도요새 한 쌍이 발로 음표를 그리는 것을 바라본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 그윽한 눈동자에 사랑을 담은 바리톤은 속삭인다. ‘사랑하는 관계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처럼 보호 받을 권리가 있겠지요?’ 해변에서 촬영 된 영화 도요새[Sandpiper]에 있는 대사. 뒤돌아본다. 빈 하늘 빈 바다였다. 하늘과 바다가 붉은 빛으로 서로를 파묻을 때까지 나는 다만 홀로 앉아 있었으나 브라이언과 함께 였고 쉰 목소리와 함께였다. 산드라가 등 뒤에 서서 브라이언과 소곤거렸다.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내가 여러 개의 얼굴로 그들 사이에 앉아 있었음. 여기까지 썼을 때 고양이가 운다. 전화기를 귀에 댄다.

 “산드라! 이건 기적이다. 네가 살아서 내 딸 결혼식에 내 곁에 앉게 되다니. 아마 나는 그날을 위해 오늘까지 견딘 거야. 우린 서로 만나지기 위해 입양됐어. 그렇지? 맞아. 

나의 천사 나의 베이비 난 너를 위해 눈뜨고 너를 위해 살 거야. 오직 너만을 위하여.”

 기적은 내가 친부모를 찾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눈에 불을 키고 찾아다닐 때 일어 났어야 했다.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기적을 믿었으나 끝내 찾지 못해서  매정한 양부모와 인연을 끊고 미국에 왔다. 뿌리 없는 생물은 물이 없으면 곧 죽는다. 물은 사랑이다. 살고 싶거든 거짓 사랑이라도 믿어야 한다. 사랑이 없으면 자가발전으로 생성. 에너지의 용량을 늘리도록. 너에게 경배하라. 너를 칭찬 하라. 언제나 웃어야 한다고 깨달아 졌을 때는 시니어라는 훈장이 떡하니 붙여 졌다. 세월의 무정함이 비수 같았다.  

 죽는 날까지 오직 자신밖에 몰랐던 남편은 사랑의 싹을 말리는 사람이었다. 가슴이 심하게 요동친다.  순간의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의 가슴에 온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여름날 소나기처럼 힘차게 파닥거린다. 와락 껴안아주고 싶다. 아직 나는 진짜 나를 밝히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산드라가 되어 있다. 결혼식 참석 여부도 대답 하지 않았다. 침묵은 자칫 상대방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해석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전화가 운다. 

 “산드라십니까?”


 8


 “……………………?”

 바리톤도 아니고 쉰 목소리도 아닌 젊고 씩씩한 목소리, 발음이 완전 미국태생이다. 

 “아버지한테 들었습니다. 내일 호텔에서 만나시기로 하셨죠? 12시 입니다. 확인 차 전화 드렸어요. 실례 많았습니다. 그럼 Good Night! Have a Good Dream.” 

 “이봐요 난 산드라가 아닙니다.” 끊긴 전화.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젊은이 였다. 

 뒤돌아보지 말며 미래를 당겨 걱정하지 말고 단순하게 살자. 뼈에 새겼건만 나의 34일은 브라이언 딸의 결혼식과 브라이언과의 무지갯빛 미래에 끌려왔다. 오늘이 그 날이다. 핑크빛 쉬폰 드레스에 진주 목걸이 반지 귀고리까지. 날씬해 보이도록 올림 머리를 했다. 2018 년 형 빨간 BMW를 몰고 KAL 빌딩, Wilshire Grand Center 로 갔다. 최근에 문을 연 빌딩은 73층 고층건물이다. 최첨단 기술로 외벽은 요세미티를 상징 하였고 친환경  건물 인증을 받았다. 밤이면 전광판의 태극문양이 엘에이  다운 타운을 화려하게 밝혀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빌딩 안에 콘티넨탈 호텔이 있다. 나는 익숙하게 차를 발렛 파킹에 맡기고 호텔 커피 샾으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10 분 전 12 시다. 벽들이 청록색 통유리로 되어있는 홀 안, 밝은 창가에 두 남자가 앉아 있다. 창 안 쪽에 공기 정화수 산세베리아가 쪼르륵 줄 맞춰 서 있다. 운동선수같이 근육질의 탄탄한 몸에 1메타 83은 넘어 보이는 검은 머리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산드라 여사님 어서 오십시오. 내 아버지십니다.”

 앞에 있는 노인을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산드라입니다.”

 머리속에서는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입에서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식당에 점심 자리를 예약해 뒀으니 옮기실까요?”

 ‘아닙니다. 급한 일이 있어 식사는 사양하겠어요. 용건만.’뇌는 이렇게 돌아가나

 “어머! 식사까지 예약 하시다니 친절하시기도 하네요.”


 


너무 상냥한 내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식당에서 새우 크림 파스타를 먹고 있을 때 그는 낮인데도 켈리포니아 산 샤도네 한 병을 시켰다. 

 “죄송합니다. 입술만 대도 됩니다. 저는 마셔야겠어요. 아버지도 시늉만 하세요.” 

 머리가 하얗고 쪼그라진 호도같이 몸집이 작은 노인은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 산드라! 산드라! ”  중얼거리고만 있었다. 남자는 그의 귀에 대고 잠자코 있으라고 영어로 주의를 주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사람 얼굴이었으나 한국 말을 못 했다. 

“아버지가 알츠하이머입니다. 집에서 케어할 수가 없어 요양병원에 맡기러 가는 날 입니다. 오래 전부터 소원이 있다고 했는데 관심을 안 뒀죠. 후회될 것 같아 여쭈어보니 누런 쪽지에 산드라 씨 전화번호를 주시네요. 10 년 전인가 입양된 한국 사람들 모임이 있었대요. 첫 눈에 반해서 일방적으로 결혼을 약속했다고. 동화 같은 얘기죠. 산드라 씨와 결혼하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계셨답니다. 막상 만나니 누군지도 모르시네요. 가엾은 아버지. 조금만 일찍 만나셨더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지. 후회는 늘 Too Late 이죠. 가엾은 아버지. 블루 스타 아시죠? 우리 회사 창업주십니다. I.T. 쪽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지요. 유태계 가정에 입양되어……” 

 그는 빈 술잔에 다시 샤도네를 따랐다. 시계를 본다. 1 시 22 분, 시간은 너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똑딱 똑딱 똑딱 시침소리 들린다. 벌떡 일어선다. 그때다.

 “산드라! 제발 가지 마. 나랑 살자. 나는 요양병원 싫어. 도와줘.”

 노인이 드레스 자락을 붙잡는다.  같은 방향을 보며 나란히 가자. NO라고 해야 할 때 NO라고 말할 줄 아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 귓바퀴 속에서 브라이언의 목소리 돌고 있다.

 “죄송해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괜찮을 겁니다. 용기를 내세요. “

 손을 밀친다. 붙잡는 손의 힘이 문어발에 붙은 흡반처럼 세다. 차가운 감촉에 몸서리 친다.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체온이 아니다. 식은 피 퍼렇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귀신의 머리카락 잡아뜯 듯 뜯어내고는 황망히 일어서 찬바람을 일으키며 매섭게 떠난다.  

 

 10 


명치 끝에 걸린 빈말에 헉헉거리며 엘리베이터로 달려간다. 드레스 끝자락이 구두에 달린 모조 다이아몬드에 걸렸다. 신발을 벗어 들었다. 21층에서 내려 붉은 카펫을 밟고 식장에 들어설 때까지 영원의 시간을 걷는 듯 아득했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맨 앞자리에서 뒤돌아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고 있는 노신사, 숱 많은 검은 머리에 희끗희끗 새치가 섞인 자연 그대로의 머리칼, 반듯하게 잘생긴 얼굴에 겁이 많아 보이는 크고 선한 눈으로 나를 본 순간 그는 내게로 달려와 나를 안았다.

 “고마워 나의 산드라 당신이 오는 꿈을 꾸었다오. 나의 천사 나의 베이비 당신을 보내 주지 않는다면 신은 없는 것이라고. 맙소사 하늘이여 용서하소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 멀고 험한 길을 걸어 왔어요 아주 먼 별에서. “  

 “리무진 봤어? 하나는 우리가 탈 거야. 너를 태우고 싶었어. 내 사랑! 고마워 살아줘서 고마워.  아! 감사 합니다. 사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니 감 합니다.” 

 그는 나를 안고 성큼성큼 앞자리로 걸어가며 말했다. 남자의 목에 얼굴을 묻는다. 달콤하고 상큼한 냄새다. 내 친 엄마를 그리워하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 때마다 아련히 스며오던 냄새. 다정하다. 포근하다. 잠이 온다.  자리에 앉았을 때 무엇이라고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을 뿐인데 내 목소리와 똑같은 소리가 들린다. 나와 같은 운명을 타고난 여인이 내 곁에

브라이언 축하해요. 그리고 너무 멋져요. 고마워요. 초대해줘서. 난 너무 너무 기뻐요. 우리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도록 해요. My darling! ”

이탈리언 식 영어 발음인데 꼭 껴안아 주고 싶게 여리고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이 달콤하고 카나리아처럼 청량한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꿈결인 양 흘러 들어 왔다.

어쩐 일인지 나는 또Olive Avenue 1307 을 빠져나갈 때처럼 뒤돌아보며 캑캑 거리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