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티지 않은 편지중에서
▲ 미국의 9.11 테러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 중 일부가 테러관련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 알 카에다 대원의 구명 救命을 호소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테러범을 처형한다고 정의가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노와 복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전체 희생자 가족들의 일치된 의견은 아니지만, 복수와 응징이 결코 유일한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피해자들 자신의 입으로 웅변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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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 근 (李宇根)
現 서울행정법원장
前 인천지방법원장
춘천지방법원장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 사법연수원 수석교수
◎ 2006/2/21(화)
창비 40년
▲ 그대들이 퍼먹고 놀다 잠든 한밤에도 하수도는 흐른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잡고 하수도는 흐른다
씨벌씨벌하며 기어이 하수도는 흐른다
이 악물고 눈물 머금고 닦지도 않고 하수도는 흐른다
똥오줌물 데리고 하수도는 흐른다
고관의 저택에도 하수도는 흐른다
아파트 층과 층 사이로도 하수도는 흐른다
손에 손을 잡고 하수도는 흐른다
땅 밑에도 길이 있다고 하수도는 흐른다
이 썩은 세상을 뒤집어쓰고 하수도는 흐른다
흐르다가 숨이 막히면 거꾸로 하수도는 흐른다
그대들의 주방으로 침실로 하수도는 흐른다
(안도현 ‘하수도는 흐른다’ 全文)
계간지 季刊誌 창작과 비평(창비)이 1989년에 펴낸 안도현 시집 ‘모닥불’에 수록된 이 시는 질식할 듯 썩어 흐르는 하수도의 물길에서 ‘이를 악문’ 민중 民衆의 삶을 읽어내는가 하면, 감히 거꾸로 흐르려는 불온 不穩한(?) 꿈마저 꾸고 있습니다.
1966년에 창간된 창비는 1970~80년대를 거치는 동안 이렇듯 역류 逆流의 꿈을 해몽 解夢하며 민족문학과 저항적 민중문학의 산실 産室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학석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약관 28세의 백낙청 교수가 주도하여 창간한 창비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황석영의 '객지', 조태일의 '국토', 신경림의 '농무 農舞', 양성우의 '북치는 앉은뱅이' 등을 지식인과 청년사회에 소개해오면서 군사정권으로부터 등록취소, 판매금지, 폐간, 주간 主幹의 구속 등 숱한 고초 苦楚를 당했고 백 교수는 대학에서 해직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혹독한 수난을 통해서 창비는 도리어 진보성향의 대표적 지성지 知性誌로 자리잡으며 장준하, 부완혁의 ‘사상계’에 버금가는 문화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풀’의 김수영. ‘금강 錦江’의 신동엽. ‘오적 五賊’의 김지하. ‘남한강’의 신경림.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의 박완서, ‘서울은 만원이다’의 이호철,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등이 창비를 제 집 안방처럼 여기며 창작활동에 몰두했습니다.
▲ 창비는 창간호 권두평론에서 "문학은 현실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야 하며 현실 구성원이 처한 위기를 반영하고 그 구성원 대다수의 복지를 위한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고 천명했습니다. 리얼리즘 realism과 참여문학을 지향하는 진보좌파 進步左派의 방향성을 뚜렷이 설정하고, 왜곡된 정치현실과 순치 馴致된 문화현장에 겁 없이(?) 도전을 선언한 창비는 이후 순수문학과의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창비는 군사독재를 거부하는 비판적 지식인, 문인, 학자들이 거센 저항담론 抵抗談論을 토해낸, 몇 안 되는 양심의 목소리들 중 하나였습니다.
10월 유신과 5.18의 광주를 거치는 동안, 나는 20~30대의 세월을 사상계에서 민권정신을, 창비에서 민주 평등을, 그리고 조금 늦게 태어난 문학과 지성(文知)에서 자유혼 自由魂의 내음을 게걸스레 핥으며 정의로운 시대의 도래를 신앙처럼 대망 待望했습니다.
▲ 특히 ‘문지’는 내가 자그맣게나마 그 힘겨운 인권투쟁을 돕고 배우며 사형 師兄으로 가까이 모시던 고 황인철 변호사가 김병익 김현 김주연 등 발행진을 음양으로 성원해온 인연이 있을 뿐 아니라 최인훈의 ‘광장’,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 걸출한 작품들을 잇따라 펴내면서 희박한 자유의 대기 大氣에다 산소 같은 향기를 듬뿍 뿌렸기에 ‘문지’에 대한 내 애착은 창비나 사상계에 못지않았습니다.
그렇게 내 젊은 날의 숨결을 이뤘던 세 지성지 가운데 창비가 올 1월로 창간 40년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창비는 예전 같은 문화권력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탄압받았을 때가 덜 힘들었다. 그땐 전선 戰線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들었던 때라면, 물질적 기반 갖추고 훌륭한 인재도 모였는데 과거와 같은 활력이 떨어진 최근이었다." 창간을 주도한 백 교수의 회고입니다.
▲ 활력이 떨어졌다는 것은 권력에 대한 저항성을 상실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소련과 동구공산권의 몰락, 군사독재정권의 붕괴, 남북체제경쟁의 종결 등을 두루 경험한 민주화 이후의 시대정신은 저항의 목표와 열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맑시즘이 물러난 빈자리를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과 해체주의 解體主義가 새로이 점령하면서 종래의 좌파담론에 대한 갈증을 상당부분 해소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비의 무기력 無氣力이 반드시 그런 외부적 요인 때문만은 아닙니다. 창비를 움직여온 주요 문인들이 제도정치권에 몸담아 정권의 일부에 편입되어 있는 지금, 창비는 저항이 아니라 경륜을 펼쳐야 할 처지가 된 셈이니 저항성에서 키워온 활력이 예전 같을 리 없습니다.
심지어 ‘권력비판’의 참여가 ‘권력변호’의 참여로 변질되었다고 꼬집으며 참여문학의 정체성 正體性을 의심하는 눈길마저 있습니다.
▲ “이미 주류문화의 일부가 된 창비 편집진부터 타성 惰性을 떨쳐버리겠다... 뚜렷한 시대인식과 사명감을 갖고 아카데믹한 틀에서 벗어나... 실천적이고 논쟁적인 잡지로 다시 태어나겠다.” 창간 40년을 맞는 백 교수의 각오는 그래서 정직한 자기진단이요 올바른 처방이며, 또 신뢰할 만한 자성 自省의 목소리로 울려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全文)
▲ 가난 때문에 외로움도 두려움도 또 그리움도, 아니 사랑마저도 버려야 했던 농어촌출신의 도시변두리 근로자들은 그러나 바로 그 가난 속에서, 그 소외 疎外된 자리에서 두려움과 외로움을, 사랑과 그리움의 아픔을 더 깊숙이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들을 차마 떨쳐버리지 못하는 가난한 영혼, 그 소외된 자리야말로 민초 民草들의 삶 속에 진실의 씨앗을 심어가는 순수한 열정이었습니다.
이제 불혹 不惑에 접어들어 지천명 知天命의 역사를 지향하는 창비에 바라건대, 제도권에 포섭된 주류의식 主流意識의 몽환 夢幻에서 깨어나 저 탄압받던 시절의 가난한 영혼을, 그 소외된 삶의 자리를 회복하기를...
좌우 左右의 옛 틀, 민족유일 民族唯一의 비좁은 울타리, 그 옛적의 도그마 dogma들을 훌쩍 뛰어넘어, 보다 고양 高揚된 인문정신 人文精神으로 자유와 민족애 民族愛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광야의 외침을 울려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