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제도를 돌아본다

2008.07.12 23:25

김동찬 조회 수:919 추천:75

   글을 소수의 특권층이 독점하던 시대가 있었다. 물론 그 때는 글이 담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소수가 독식했다. 법전이 어려운 말로 돼 있는 것이나 의사들의 처방전이 그렇게 휘갈겨져 있는 것도 법관들이나 의사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은연중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최초로 법을 글로 기록한 함무라비 법전에서 시작했고 산업혁명 이후 대량으로 책을 찍어내는 기계가 발달함으로써 누구나 책을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두말 할 필요 없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일은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부인권이다. 누구나 미적인 창의력을 동원해서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한국 문단에는 등단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등단한 사람에 한해 문인이라 인정하고 문학지에 글을 실어준다. 등단한 필자의 나쁜 글은 문학지에 실리지만, 등단하지 않은 필자의 글은 쳐다보지도 않는 이 제도는 일제시대에 일본의 문학 관행을 받아들인 후, 우리 한국문단의 전통으로 고착됐다.
   등단제도는 나름대로 많은 장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가난한 시대에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여전히 우리의 형편에는 비쌌던 출판기회를 엄선한 필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유용했다. 최소한의 창작기본도 갖추지 못하고 글을 써대는 필자를 어느 정도 걸러낼 수도 있고, 등단하려고 하는 문인도 자신의 글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전문 문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다지는 계기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제 등단제도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우선 인쇄의 비용이 현저하게 낮아져서 책을 출판하기 쉬어졌고 출판사와 각종 신문, 문학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과거에 비해 엄청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터넷의 등장으로 까다로운 인쇄과정을 거치지 않고 필자가 독자에게 수시로 직접 글을 전달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실제로 많은 문학지들이 글을 잘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기량만 보고 한 호에 칠, 팔 명씩 신인들을 선정, 배출하고 있다. 전문적으로 숙련된 운전 실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비록 미숙하지만 최소한의 법규와 기술을 갖추었는지를 보고 발급해주는 운전면허와 같이 등단이 쉬어졌다. 등단제도는 문인이 아닌 사람이 글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글을 쓰는 기회를 제공해주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많은 문학지 편집인들이 생각하는 것 같다.
    일부 문인들은 이런 현상이 무자격 문인을 양산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게 해야 하고, 그 기준 - 자격을 심사위원 몇 사람이 결정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또 문학작품의 질은 등단제도를 통해서 등단했는지 안 했는지가 아니라 등단 이후 작가 개인이 얼마만큼 최선을 다해 글을 썼는가 하는 데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외국 영화를 자유롭게 수입함으로써 한국 영화가 한류를 일으키는 국제 경쟁력을 갖게 된 것처럼, 등단제도라는 온실을 어느 정도 벗겨냄으로써 문인들을 과보호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어야 할 것 같다. 등단한 문인의 글이라서가 아니라 좋은 글이라서 책에 싣는 풍토가 살아나야 한다.  
   한국 문단의 오랜 전통이 돼 왔고 편리함과 장점도 있는 등단제도를 당장 버리자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현재의 등단제도를 유연하게 운영해야 하고 등단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진정한 작가가 되는 길은 단 한번의 등단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꾸준히 걸어가야 하는 머나먼 수행의 여로가 아니겠는가. 현재의 등단제도가 등단한 사람끼리 글 쓰는 일을 독점하게 함으로써, 천부인권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싶다.

-- 계간 <미주문학> 08년 여름호 권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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