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세월이 지우지 못한 기억

2009.04.29 00:03

김동찬 조회 수:1462 추천:104

  상처는 아물기 마련인가 보다. 결코 잊혀질 것 같지 않던 4.29 엘에이 폭동도 올해로 만 10년을 맞으며 희미해져가고 있다. 한인타운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불타버린 건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가 남는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몇 가지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당시에 도매상을 차려서 운영하고 있었고, 아내는 인도어 스왑밋에서 소매를 하고 있었다. 내 삶의 희망이었던 그 도매 가게가 약탈되는 광경이 텔레비전에 비춰지자 아내는 울음을 터트렸다. 광란의 물결이 무사히 비켜 지나가 주길 바랐던 나도 허탈감에 주저앉고 말았다.
  다음날 나가보니 폭동이 지나간 현장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비참한 몰골로 나를 맞았다. 폭도들은 그 많던 상품을 훔쳐간 것은 물론이고 계산기를 부수고  남아있던 잔돈을 꺼내갔고 화장실의 거울까지도 떼 갔으며 그것도 모자라 불까지 질렀다. 가게 앞쪽으로 온통 시커멓게 타다만 자국, 소방서 차가 출동해서 불을 끄기 위해 끼얹은 물로 참담한 광경이었다. 이민 와서 열심히 일하고 살아온 죄밖에 없는 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 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작은 탑 하나가 무너진 것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빈손으로 이민 와서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시간과 노력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와 내 아내는 경험도 없고 밑천도 없어 1650불 주고 산, 더 이상 낡을 수 없는 중고 포드 밴에 물건을 싣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스왑밋 장사를 시작했고 한푼 두푼 근검절약하며 살아왔다. 나는 아내가 둘째 아이를 낳은 날도 장사를 하러 밴을 몰고 스왑밋으로 향할 정도였다. 방 두 개 짜리 아파트에 방 하나는 부모님이 쓰고, 남은 방에 우리 부부와 어린 두 아이가 기거했었다. 그러다 아내는 인도어 스왑밋에 자리를 얻어 들어간 후 조금 여유가 생겨 내 집을 마련했고 친구와 함께 도매상도 하나 열게 된 것이었다.
  돈을 충분히 벌지 못하는 우리 식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절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몇백 불씩 주고 새 가구를 사는 일은 없었다. 우리 집에 있는 침대, 식탁, 책상 등 모든 가구는 이민 초기에 얻은 중고 가구이거나 거라지 세일에서 산 물건들이었다. 응접실에는 소파 대신 아내가 천을 씌워 만든 낡은 메트리스를 놓았었다.
  우리 집을 방문한 한국에서 온 셋째형이 텔레비전을 사준다며 나가자고 한 적이 있다. 형에 앞서 우리집에  다녀간 한국의 큰누나가 셋째형에게 돈을 주면서 "세상에, 아직까지 흑백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집은 한국에서도 없다"며 칼라로 바꿔주고 오라고 했단다. (사실은 친구 이삿짐을 날라주러 갔다가 텔레비전이 고장나 흑백으로만 나온다며 버리겠다고 하는 걸 얻어와 쓰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셋째형에게 "돈으로 주면 천천히 내가 맘에 드는 걸로 사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셋째형은 한마디로 안 된단다. 돈으로 주면 틀림없이 텔레비전을 안 살 테니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큰누나로부터 당부를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지만 떠돌이 행상을 하면서 내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늘보다 늘 내일이 나을 거라는 희망에 즐거웠고, 낯선 미국 땅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처자식을 굶기지 않고 오손도손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아파트에 살던 시절에도 응접실까지 물건이 쌓여 있어 발 딛을 틈이 없었지만 마지막 남은 공간인 부엌으로 친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들곤 했다. 미국에 살아가는 햇수가 늘어날수록 장사도 규모가 커졌고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러나 1 더하기 1은 항상 2가 되지 않고 때로는 0도 되고 -1도 된다는 세상의 물정을 폭동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세상은 거꾸로도 가고, 날벼락으로 일구고 있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기도 한다.
나에게 한동안 무력감과 절망감을 안겨준 4.29폭동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로드니킹을 무차별 구타한 백인 경관들이 무죄평결을 받았기 때문에 흑인들이 묵은 분노를 터트린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언론은 한인 상인들과 흑인 고객들 간의 불화가 폭동의 주된 요인 중의 하나인 것처럼 연일 보도했다. 그것은 미국의 주류사회가 얼마나 비겁했는지 반증하는 사례다. 흑인들의 분노를 희석시킬 희생양으로 한인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폭동 피해자로서 증언할 수 있다.
  내 가게 앞에 이중으로 닫아 놓은 덧문을 부수고 상자 채로 물건을 훔쳐 나르고 있던 사람들을 찍은 텔레비전 화면 속에 흑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전부 라티노들이었다. 내 고객은 흑인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었다. 그러니 나와 흑인 고객과의 불화는 있을 수도 없었다. 한인타운의 일부를 휩쓸고 지나간 폭도들의 대부분도 마찬가지로 히스패닉 계통의 사람들이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인 상인과 라티노의 갈등이 원인이었다고 해석할까 봐 두렵다.
  바로 군대를 동원했으면 폭동은 그날 밤으로 진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흑인들의 분노가 너무 커서 어느 정도 불길이 약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화재가 크게 나면 불길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멀쩡한 옆집을 부셔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 밀집지역과 가까운 한인타운이 희생되는 걸 미국 정부는 방치했다. 그 것을 감지한 한인타운과 흑인 밀집지역에 사는 비양심적인 주민들이 덩달아 범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4.29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커다란 부분이다.  
  모든 티비 방송국에서 생중계 했던 폭동의 현장 중에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많다. 한 폭도가 전자상점에서 커다란 텔레비전을 훔쳐 나와 너무 무거운 나머지 차에 옮겨 싣지 못하자 경찰이 함께 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물론 물건을 훔치는 걸 어차피 막지 못할 바에는 교통이라도 소통시키자는 '민중의 지팡이'가 가졌던 소박한 사명감을 이해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공권력이 폭동에 어떤 자세로 대치했었던 가를 보여주는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 순간, 그 혼란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범죄는 면죄부를 받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면 공권력은 폭동의 공범으로 비난받아야만 한다.
  비슷한 예가 또 하나 있다. 어느 옷가게에서 한 폭도가 옷을 한아름 안고 나오고 있었다. 여성 리포터가 마이크를 들어대며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이 옷들을 왜 가지고 나오고 있습니까?" 그 폭도는 현명한 대답을 했다. "왜 안 되요? 공짠데요.(Why not? It's free.)" 세상이 무법천지가 되었다는 걸 당신은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하고 그 폭도가 묻는 것처럼 보였다. 당당한 불법 앞에서, 그 옷들을 팔아 식구들과 새 가구를 사고, 여행을 가고, 가족과 함께 맛있는 외식을 하려고 했던 한 소매상이 눈물을 흘리며 겪고 있을 좌절은 무시되어졌다. 세계의 경찰이라고 자부하던 USA는 뒷짐을 지고 있었고, 그래서 선량한 시민이 믿고 있었던 정의는 구겨지고 버려졌다.  
  "베버리 힐스나 다른 백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까지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흑인밀집지역이나 한인타운을 포함한 인근 지역을 방패막이로 사용했다"는 미국정부의 고백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더 많은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폭동의 진압을 늦췄으며 불법난동을 방치했다는 진실을 미국의 경찰이나 미국정부는 밝혀야한다. 그리고 미국정부가 지키지 못한, 아니 '지키지 않은' 폭동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 피해는 원금에 이자까지 갚아야하는 융자가 아니라 당연히 보상으로 마무리되었어야 한다.
  미국정부가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점은 보상은커녕 명백한 피해자였던 한국계 피해자들에게 은근히 폭동의 책임을 전가했다는 점이다. 흑인 밀접지역의 상가들은 인종에 상관없이 피해를 입었고 상당부분의 난동은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들이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있을 수 있는 한인 상인과 흑인과의 사소한 갈등을 크게 부각시키고, 신문과 라디오 등에서는 한인이 갖고 있는 문화적 차이에 대해 토론하고 비난하는 행태를 일삼았다. 도대체 한국계 폭동 피해자들이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잘 모를 지경이었다. 세계의 인권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파병까지도 서슴지 않는 대국인 미국의 행동으로는 너무나 비열해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상실감과 절망감에 빠져 당황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생각보다도 많은 것을 여전히 잃지 않고 있었다. 사람이 다치고 죽기까지 한, 억장이 무너지는 피해자도 있었던 그 난리통에서 내 가족과 집이 무사했고, 아내가 하던 인도어 스왑밋도 불타지 않았다. 교회, 이웃, 친구, 조국의 동포 등 각지에서 보내주는 성금도 나를 감격시키고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이 되었다. 나는 재산보다도 더욱더 귀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재산은 금방이라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지만 가족이나 친구, 이웃 등과 나누는 정이야말로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폭동이 나를 단련시켰다. 만일 일찍 그러한 일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작은 추위에도 견디지 못하는 온실 속의 화초가 되었을 뻔했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깨어졌지만 미국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세상의 질서와 규범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 지를 알게 되었다. 또 미국은 복잡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산다는 건 그 구성원 중의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고객이고,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동료가 되는 그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하는 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미국 정부가 그나마 신속하게 저리 융자를 해주어 다시 도매상을 시작했고, 폭동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4.29 전보다 몇십 배 더 큰 규모의 업체로 성장시켰다. 이제 4.29폭동은 과거의 일로 잊혀져 가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4.29는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들에게 일어났었고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미주이민 100주년을 앞둔 지금 사탕수수 하와이 이민 선조들의 애환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처럼, 후일에 4.29를 겪은 한 개인의 생생한 증언을 누군가 듣고 싶어할 때가 꼭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비록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4.29의 일면에 불과하겠지만, 내가 보고 느낀 4.29를 그를 위해 남긴다.



---  미주 <문학세계> 14호. 2002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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