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2 01:42

▲사진: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 / 가나의 혼인 잔치(The Wedding at Cana)1563년 作
조갑재
고구려의 3대 통치(統治)자인 대무신왕(大武神王:이름 무휼無恤)이 다스리던 국내성은 평온과 긴장이 겹쳐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 안에서는 장인들의 망치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고, 시장에서는 말과 곡식, 철과 가죽이 오갔다. 그러나 성벽 위로 올라가면 풍경은 달라졌다. 북쪽 산맥과 서쪽 강 너머에는 언제든 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침묵이 깔려 있었다. 이 도성은 쉬는 법을 배우지 않은 나라의 심장이었다.
왕궁 가까이에는 국정(國政)의 한 축을 담담하는 고위관리의 자택이 있었다.
담장이 낮은 고택(古宅)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오래된 나무와 돌로 지어져 묵직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대무신왕의 왼팔 격인 좌보(左輔)출신인 조갑재의 집이었다.
조갑재는 왕의 지근거리에서 왕정출납(王政出納)을 도맡아 하며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었다.
이 집안은 새로 떠오른 가문이 아니었다.
대무신왕의 치세(治世)이전부터, 왕권과 행정을 잇는 가교(架橋)역할을 해온 집안이었다.
조갑재의 어머니는 대무신왕의 외 조카였다.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그녀는 궁에 머무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말했다. “왕실의 피는 자랑이 아니라 짐이다.”
그녀는 화려한 비단보다 소박한 삼베를 입었고, 궁중의 말씨보다 국내성 사람들의 말투를 택했다. 그러나 위급한 순간이면, 그 눈빛에는 왕가 특유의 단호함이 드러났다. 아들은 어릴 적부터 그 눈빛을 보며 자랐다. 결단이란 감정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그는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아버지는 나라의 승상(國相)이었다.
그는 전장에서 이름을 날린 장수도, 대중 앞에서 연설을 즐기는 정치가도 아니었다. 대신 그는 문서와 숫자, 인심의 흐름을 읽는 사람이었다.
조정의 재정과 군량, 인사와 외교 문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왕의 명령이 현실에서 작동하도록 다듬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아버지는 조갑재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칼은 한 번 휘두르면 끝이지만, 문서는 수십 년을 남긴다.나라를 움직이는 것은 보이는 힘보다 보이지 않는 계산이다.”
그 말은 훗날 조갑재가 왕정출납을 맡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조갑재 곁에는 두 오누이가 있었다.
형은 무예에 능했고, 국경 수비를 담당하는 장수가 되었다. 그는 말 위에서 더 편안해 했고, 말보다 빠른 판단으로 이름을 얻었다. 동생은 여인이었으나 글과 음악에 밝았고, 집안의 기록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녀의 손을 거친 문서는 언제나 정확했고, 감정이 섞이지 않았다.
세 남매의 관계는 유난히 돈독했다.
저녁이면 한 상에 둘러앉아 하루의 일을 나누었고, 각자의 세계가 달라도 서로를 이해하려 애썼다. 형은 국경의 소식을 전했다.
동생은 조정과 민심의 기류를 이야기했다.
조갑재는 왕의 뜻과 나라의 흐름을 조심스럽게 풀어놓았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가끔 이렇게 덧붙였다.
“너희 셋은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한 나라 안에 있다.
그것을 잊지 마라.”
대무신왕의 통치 아래, 국내성은 움직이는 요새(要塞)였다.
백성들은 전쟁을 두려워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활 쏘기를 놀이처럼 배웠고, 노인들은 지난 전쟁의 이야기를 마치 계절 이야기처럼 들려주었다. 평화는 잠시 머무는 손님일 뿐이라는 인식이 도시 전체에 스며 있었다.
조갑재의 집안은 그 중심에 있었다.
왕실과 조정을 잇고, 문과 무를 잇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자리.
조갑재가 왕정출납으로서 왕의 곁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집안 전체가 짊어지고 있던 균형의 연장선에 서 있었던 것이다.
조갑재는 밤이 되면 종종 고택의 마당에 섰다.
국내성의 불빛이 멀리서 반짝였고, 성벽 위의 횃불은 바람에 흔들렸다.
이 도성(都城), 이 나라, 이 가족. 모두가 하나의 질서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자신이 곧 이 질서에서 가장 멀리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대무신왕의 시대, 국내성의 공기와
왕실의 피, 조정의 책임, 가족의 신뢰 속에서 자란 조갑재는 이미 한 개인의 삶을 넘어서는 준비를 마친 사람이었다.
그래서 훗날, 그가 길을 떠나야 했을 때
이 집안 누구도 붙잡지 않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 진정으로 멀리 가는 사람은
늘, 가장 깊이 뿌리내린 사람이라는 것을.
지혜와 용맹(勇猛)을 겸한 위대한 군주(君主)대무신왕
국내성의 조정(朝廷)은 아직 해가 들지 않았다.
대무신왕은 이른 시각부터 좌정해 있었고, 대신들은 물러난 뒤였다.
비단 발이 내려진 전각 안에는 왕과 조갑재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바깥에서는 병졸의 교대 소리와 말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조갑재는 깊이 엎드려 있었다.
이 나라에서 그가 이런 자세를 취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왕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총애하는 신하가, 그것도 조정의 수치를 꿰뚫는 천재 신하가 이른 새벽 단독으로 알현을 청한 이유를.
“일어나라.”
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조갑재는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오래 생각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단단한 침착이 있었다.
“전하께 아룁니다.”
“말하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갑재는 마치 단어 하나하나를 마음속에서 꺼내 놓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은 떠나고자 합니다.”
왕의 손이 미세하게 멈췄다.
“어디로.”
“서쪽으로. 빛이 있는 곳으로.”
그 말이 전각에 닿자, 공기가 바뀌었다. 대무신왕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빛이라… 그대는 고구려를 대표하는 영명(英明)한 학자다. 학문적 비유로 말하지 말고, 왕에게 말하라. 무엇을 뜻하는가.”
조갑재는 숨을 고르고 답했다.
“전하, 신은 고구려가 강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신은 알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강함 말고 무엇이 있는지를. 왜 어떤 나라는 무너지지 않고, 어떤 사상은 칼 없이도 사람을 움직이는지를.”
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대는 이 나라가 부족하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조갑재는 단호했다.
“이 나라는 충분히 강합니다. 그래서 더욱, 신은 두렵습니다. 강함만으로는 오래갈 수 없음을, 신은 기록과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각을 천천히 걸었다. 발걸음마다 나무 바닥이 낮게 울렸다.
“그대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젊은 신하다.”
왕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그대가 떠난다면, 조정은 한쪽 눈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갑재는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그러하시기에, 신은 더 머물 수 없습니다. 신이 여기서 빛을 말한다면, 그것은 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보고 돌아온다면, 그것은 나라의 눈이 될 것입니다.”
왕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마침내 신하 앞에 섰다.
“그대는 돌아올 수 있을지 조차 알 수 없는 길을 가겠다는 것이로군.”
“예, 전하.”
“죽을 수도 있다.”
“알고 있습니다.”
왕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 나라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이렇게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드물지.”
왕은 조갑재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시, 아주 잠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붙잡고 싶다. 명하여 남게 하고 싶다.”
조갑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꺾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왕은 낮게 말했다.
“그대의 눈은 이미 이 전각 밖을 보고 있다.”
대무신왕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마정(馬政)을 부르라.”
잠시 후 시종이 들어왔다. 왕은 명했다.
“명마 두 필을 내어주어라. 하나는 북방의 장마를 견딘 말, 하나는 장거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이다.”
그는 다시 조갑재를 보았다.
“금과 은을 충분히 내어주어라. 상인에게도, 병졸에게도, 때로는 침묵을 사는 데에도 필요할 것이다.”
조갑재는 다시 엎드렸다. 이번에는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전하의 은혜를, 신은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왕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좌보, 조갑재.”
“예, 전하.”
“빛을 보거든, 기록하라. 이해하지 못해도 기록하라. 그리고 만일 돌아온다면… 그때는 나에게 묻지 말고, 이 나라에 말하라.”
조갑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날 해가 떠오를 무렵, 국내성의 동문이 열렸다.
두 필의 말이 나란히 서 있었고, 조갑재는 마지막으로 성을 돌아보았다.
성벽 위, 아무도 없는 듯한 그곳에서 대무신왕은 조용히 서 있었다.
말은 움직였고, 길은 열렸다.
왕은 돌아보지 않았고, 신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작별은 끝이 아니라, 훗날을 위한 약속임을.
전령사(傳令使)
빛이 먼저 있었다.
불도, 해도 아니었다.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 빛이었다. 그 빛 속에서 한 존재가 형상을 드러냈다. 사람의 모습이었으나, 발은 땅에 닿지 않았고, 날개는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공간이 흔들렸다.
조갑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이 존재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 것조차 불경일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음성은 귀가 아니라 가슴에서 울렸다.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음에도, 분명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너는 길을 묻고 있으나,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조갑재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말이 아니라, 생각조차 허락되지 않는 침묵 속에서, 존재는 한 걸음 다가왔다. 빛이 더욱 짙어 졌다.
“동방의 끝에서 태어난 자여,”
천사가 말했다.
“너는 칼의 나라에서 자랐으나, 칼을 위해 부름 받지 않았다.”
그제야 조갑재는 떨리는 마음으로 묻듯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천사는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 방향은 땅의 서쪽이 아니었다.시간의 서쪽 세상의 끝과 시작이 맞닿은 방향이었다.
“빛을 찾아가라.”
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조갑재는 알 수 있었다. 그 빛은 불도, 별도, 왕도 아니었다.사람의 형상(形象)을 입고세상에 들어 온 빛이라는 것을.
“그 빛은 지금 걷고 있다.”
천사가 말했다.
“돌 위를, 먼지 위를, 사람들 사이를.”
조갑재의 가슴이 죄어왔다.
“너는 증인이 될 것이다.
보는 자가 아니라, 돌아와 전하는 자로.”
마지막 말과 함께 빛은 수축하듯 사라졌다.
날개가 접히는 소리도, 바람도 없었다. 그저 세상이 다시 어둠을 되찾았을 뿐이었다.
조갑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깨어났다.
동쪽 하늘이 아직 푸르스름한 이른 아침이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가슴은 꿈속의 울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더 머물 수 없었다.
겉옷을 걸치고 고택의 문을 열었다.
마당으로 나서는 순간, 조갑재의 발걸음이 멈췄다.
빈 감나무였다.
분명히 어제까지도, 아니 전부터도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던 나무였다. 그런데 그 검은 가지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감이 열려 있었다.
하나, 둘이 아니었다.
세어보니 정확히 열셋.
살이 가득 차고 윤기가 도는 탐스러운 감들이,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듯 가지 끝마다 매달려 있었다.
더 기이한 것은 그 빛이었다.
햇살이 아직 마당에 들지 않았는데도, 감들은 스스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불빛처럼 눈부시지 않았고, 달빛처럼 차갑지도 않았다.살아 있는 온기(溫氣) 같은 빛이었다.
조갑재는 천천히 다가갔다.
손을 뻗었다가, 차마 닿지 못하고 멈추었다.
“지난해 수확이 끝난 나무인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계절에, 이 숫자로, 이 빛으로.
꿈속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빛을 찾아가라.’
열 셋의 감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다는 듯, 마당 한가운데서 고요히 달려 있었다.
조갑재는 그제야 알았다.
이것은 길의 허락이 아니라,부름의 확인이라는 것을.
왕의 윤허보다 앞선, 인간의 판단보다 깊은 징표(徵表).
그는 마당 한가운데서 오래 서 있었다.
고구려의 아침 공기가 차갑게 뺨을 스쳤다.
산과 성과 나라가 아직 잠든 시간이었다.
잠시 후, 조갑재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 대무신왕께 나아가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고 청할 것이다.
이제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나라의 한 신하의 생각도 아니었다.
빛이 이미 길을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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