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현대사의 한 장면을 감각화하는 격정의 목소리 (유성호)
이번 『서시』 여름호에서는 해외 신인상으로 이월란 씨를 선정하였다. 이월란 씨는 이미 한국문인협회 등에서 활약해왔고, 시집을 두 권이나 상재한 바 있는 기성 시인이다. 그녀는 미국 Utah주에 살면서 미주동포문학상 등을 수상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큼 이번 신인상 수상은, 국내 문단에 그녀의 존재를 알리는, 그녀로서는 제2의 등단이라 할 수 있겠다.
당선작 「공항대기실」외 4편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줄곧 미국에서 살아온 시인이, 일종의 ‘경계인적 경험’을 겪은 과정과 그 정서적 결실들을 폭 넓게 들려준다는 점에서, 우리 시단의 새로운 음역으로 호소력 있게 착근되리라 생각한다. 특별히 “목자 잃은 슬픈 노마드 족들은 구름짬마다 집을 짓고/ 은익 같은 디아스포라의 화석을 새긴다”(「공항대기실」)라든지, “불 밝힌 빌딩의 역상이/ 질척한 베가스의 아랫도리를 기웃거리고/ 슬롯머신 앞에서 밤을 지새운/ 현실과 꿈의 능선이 저승의 달빛처럼/ 도시 위를 배회”(「몸 푸는 사막」)한다는 표현 같은 데서 우리는 이 시인이 평범한 여성적 정서를 그만그만하게 드러내는 시인이 아니라, ‘이역’과 ‘고향’을 힘겹게 오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사유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목소리를 가진 시인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렇게 표현하는 중요한 목소리를 가진 시인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렇게 살아가는 일종의 ‘노마드’ 감각과 ‘디아스포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을 격정의 목소리로 감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월란 시편의 독자성이 보인다 할 것이다. 아울러 「수선집 여자」에서처럼 구체적 대상의 형상과 경험을 들려준다든지,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아이」에서처럼 자의식의 균열 과정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날아오르는 상상력을 통해 존재 전환을 꿈꾸는 욕망을 동시에 보여준다든지 하는 부분도 읽을 만한 시적 역량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후진국의 하늘처럼 내려앉은 젖은 발에 마른 입술을 대고 한 뼘씩 해갈을 도모해보았죠.”(「안개정국」)라고 할 때 그녀의 감각과 상상력은 매우 경쾌하고 견고한 것이다.
『서시』로 재등장하게 된 이월란 시인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하면서, 더욱 좋은 작품으로 『서시』를 빚내주시기를 당부 드린다.
심사위원: 임헌영(평론가), 문정영(시인), 유성호(평론가)
『서시』유성호, 2009년 여름호
수상소감 / 이월란
제대로 길을 잃고 싶다.
내 생의 난간이 허물어질 때까지
둘째 아이가 막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쇼핑몰에서 잠시 아이를 잃은 적이 있었다. 순간 필름이 끊겼고 무서운 정적에 둘러싸인 세상 속에서 난 완전히 길을 잃었다. 단 5분 아니 10분이었을까. 그런 종류의 공포와 두려움을 일상 속에서 흉내라도 내듯 길을 잃기를 자처해 왔다. 임의로 그어놓은, 처음엔 그저 장난질에 불과했던 금들을 길이라 우기며 그 어설픈 길들을 쏘다닌 것이다. 늘 [주인을 찾습니다]라고 광고 문구를 들고 다니는 듯 안타까워야 했고 환청 속에 살아 있어야 했다. 그렇게 우습기만 했던 것들이 이젠 전혀 우습지 않게 되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마치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 무작정 그것을 꽉 부여잡고 있는 것이라고 한 쉼보르스카의 말을 좋아한다. 지금, 잠시 구조를 받은 것일까. 아니면 붙들고 있던 난간이 더욱 부실해진 것일까. 그래서 구조를 기다리는 마음도 더욱 절실해진다.
내 삶의 아픈 것들로부터 온전한 보호막이 되어준 시들에게 감사한다. 그 시들이 다시 뿌리를 내리고 안주할 수 있도록 비옥한 터를 마련해주신 서시 가족 분들께 감사한다. 거칠기도 어설프기도 한 글을 보듬어주시고 이제 시작이니 용기를 가지라고 따뜻한 손 내밀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출항의 고비를 모른 채 순항하고 있는 배에 무임승차한 나는 억세게도 운이 좋다. 오래 전, 끔찍한 공포 속에서 그렇게 잠시 사라졌던 아닌 코큰 아저씨의 가슴에 안겨 내 품으로 다시 돌아왔었다. 시를 쓰면서 그런 기쁨과 희열이 종종 내게 찾아왔음을 기억한다. 길을 잃은 아이들은 늘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그때 나의 아이도 왔던 길로 되돌아가 울고 있었단다. 백지 위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나 또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울고 있었다. 스스로 가두어지기도, 스스로 놓아버리기도, 그래서 다시 찾아오고야 마는 시의 집, 그 집 가득 단세포였던 내가 불온한 방법으로 세포분열을 일삼은 잡종처럼 수많은 미아가 되어 길목마다 길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길은 늘 외길이었지만 시의 집 속에 은하수를, 억겁을 품어도 남을만한 여백이 아직도 온전히 남아 있다. 고집스런 술래가 되고 싶다. 제대로 길을 잃고 싶다. 내 생의 난간이 허물어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