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오세영(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시인)
모국에서 시집을 내겠다고 이월란 씨가 원고 한 뭉치를 들고 내게 찾아왔다. 처음 대면한 분이었다. 내 사무실을 방문하겠다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 나는 내심 어떻게 원고 청탁을 거절할 것인가를 강구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작품들을 대면한 순간 아, 내가 이래서는 아니 될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원고를 놓고 가시라 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간 뒤 그 남겨놓고 간 원고들을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애초의 생각과 달리 내 자신 그녀의 시심으로 녹아드는 것을 발견했다. 상상외로 개성적인 시들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 시집의 서문을 쓰게 된 경위라면 경위다.
공개적으로 잡지의 글을 통해 밝힌 바도 있지만 나는 사실 15,6년 전부터 시집들의 해설을 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꼭 원칙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어서 부득이 추천해주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나는 해설 대신 가끔 서문을 써 드리는 것으로 나의 미안함을 달래곤 해 왔다. 그러나 아무 인연이 없는 생면부지의 시인에게 이런 유의 글을 헌사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이월란 씨의 시는 내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이 인연으로 먼 이국의 한 여성시인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또한 축복으로 여긴다.
저자 약력에서도 밝혀 있듯 이월란 씨는 아주 오래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갓 수십여 년 이국생활을 하시는 분이다. 물론 그곳에서 결혼도 했고 직장에도 나간다고 한다. 이렇듯 많은 세월을 외국에 살면서도 모국어를 잊지 않고 그것도 모국인 이상으로 아름답게 구사할 수 있는 그 정신의 높이가 우선 고고하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국생활이란 고단하고 바쁜 나날의 연속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도 힘겨운 시간에 틈틈이 짬을 내어 인생과 세계를 성찰하고 그것을 현지의 생활어도 아닌 모국의 언어로 보석처럼 빚어낸다는 것은 국내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시를 쓰는 우리 시인들로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국의 생활은 외롭다. 나도 몇 차례 방문을 해 봐서 알지만 그녀가 살고 있는 유타주의 솔트레이크는 더군다나 몰몬교의 성지이다. 금욕과 신성성이 지배하는 도시다. 우리 교민도 거의 살지를 않는다. 그런 공간에서 쫓기듯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면 이월란 씨는 한없는 외로움을 느꼈으리라. 그것은 물론 물리학적 공간이 주는 외로움으로 인해 더 가중되긴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집의 내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정신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외로움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움이다.
물론 이 시집 수록 시들의 외면에 그 외로움이 직접적으로 진술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여러 형식의 정신적 반란, 그래서 흡사 포스트 모던하게까지도 보이는 의식의 해체는 실상 그 내면에 자리한 외로움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었던 구원의 끈이 바로 ‘그리움’이었다. 사실 이월란 씨의 시들은 이 그리움의 대상을 찾아서 몸부림치는 정신의 방황일지도 모른다.
저 산 너머엔, 저 별 너머엔 그리움의 나라가 세워져 있을 거라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들은, 멀어진 것들은 모두 그 그리움의 나라로 생을 반납하고 투항해버린 난민들의 수용소일거라고
-「그리움의 제국」중에서
이월란 씨의 시는 매우 다이나믹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매우 전위적이면서도 서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모순을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이월란 씨의 시적 재능은 어디에서 오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만일 국내 문단이 그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녀는 머지않아 한국 여성시단의 반짝이는 샛별의 하나로 뜰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집의 간행을 축하드린다.
2008년 가을 어느 날
청강(聽江) 오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