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시티, 청산도

2016.09.17 08:55

임두환 조회 수:103

슬로시티, 청산도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임두환



청산도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아시아 최초로 지정된 슬로시티(slowcity) 청산도(靑山島)는 하늘도, 산도, 바다도 푸르고,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느림을 통해 행복을 일깨워주는 청산도에서 섬사람들을 만나 하룻밤을 지새우며 파도소리랑 풀벌레소리를 들으며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두드리면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초등학교동창 다섯 명이 오래 전부터 부부동반모임을 갖고 있었다. 모임을 가진 지 오래되었지만 격월(隔月)로 얼굴만 확인하고 헤어질 뿐 바깥나들이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S가 주선하여 1박2일 코스로 꿈에 그리던 청산도를 다녀오게 되었다.

청산도는 이름 그대로 푸른 섬이었다. 완도항에서 페리호로 45분쯤, 거리상으로는 19km쯤 달리면 청산도항에 닿았다. 항구가 마치 소쿠리 안 같아서 파도를 막아주는데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5개 섬으로 이루어진 청산면의 인구는 약 2,500명으로 반절은 농사를 짓고 반절은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요즘에는 관광객들이 찾아와서 도움이 된다며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면소재지 도청리는 육지의 소도시에 버금갈 만큼 에너지가 넘쳤고, 이곳저곳 펜션에서는 여행객을 맞이하느라 손길이 바빴다. 우리 일행은 도청리를 벗어나 해안가 아늑한 곳, 권덕리 유자향펜션에 여장을 풀고 곧바로 범바위 전망대에 올랐다.

청산도는 2011년 12월에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의 소도시 ‘그레베인 키안티’시장인 파울로 사투르니가

“빨리 빨리 살 것을 강요하는 현대생활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바이러스”

라고 주장하며, 마을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보존하면서 느림과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하는 국제적운동이라 할 수 있다.

슬로시티는 국제연맹본부의 현지답사를 거쳐 일정기준을 통과해야 인정 받을 수 있다. 슬로시티가 출범한 이래 27개국 174곳으로 불어났는데, 우리나라에는 청산도를 비롯하여 11곳이 지정되어 있다. 내가 사는 전주한옥마을도 이 곳 중 하나이다. 전주한옥마을은 전주시 풍남동과 교동에 위치한 곳으로 우리나라 전통건물인 한옥(韓屋)이 800여 채나 밀집되어 있다. 골목골목에는 전통문화시설과 향토음식점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하늘과 산과 바다가 푸르른 청산도가 있다면, 느릿느릿 변화하는 도시 전주에는 멋과 맛을 이어가는 한옥마을이 있어서 내 마음도 뿌듯해진다.

청산도는 가는 곳마다 돌담으로 쌓여 있다. 논두렁 밭두렁이 그렇고, 집들도 모두가 돌담집이다. 심지어는 묘지도 돌담으로 둘러져 있으니, 언뜻 보면 제주도를 연상케 한다. 제주도는 현무암으로 돌에 구멍이 숭숭 나있지만 청산도는 하나같이 구들장 돌처럼 얇고 넓적하다. 땅만 일구면 지천으로 돌이 나와 처치곤란이란다. 지형은 가파르고 물이 부족하다보니 농사를 짓는데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구들장 논이다.

청산도 구들장 논은 섬사람들의 생계를 유지케 하는 혁신적인 농업관개시스템으로 2013년 1월,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국가중요농업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그 이듬해인 2014년 4월,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에서 주관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어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구들장 논은 제일 밑층에 크고 넓은 구들장 돌을 깔고서 층층이 돌과 흙을 쌓은 뒤 제일 위층에는 진흙으로 다져 놓아 물이 새지 않도록 했다. 자투리땅도 놀리지 않으려는 섬사람들의 슬기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청산도는 느리게 걷고 깊게 파고드는 슬로우 길에서 참신함을 느낀다. 슬로우 길은 주민들이 마을과 마을로 이동하던 길을 잘 닦아 놓았다. 청산도를 온전히 구경하려면 느릿느릿 걸어야 제격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투어버스를 이용한다. 투어버스를 타게 되면 슬로우 길을 따라 스쳐가기 쉬운 청산도의 숨은 이야기를 해설가인 운전기사에게 들을 수가 있다. 우리는 승용차를 가지고 들어간 것이 후회스러웠다. 승용차는 마음대로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지만 안내판에 의존하다보니, 그 지역 본모습을 속속들이 알 수 없어 아쉬웠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권덕리에 있는 범바위였다. 보적산 8부 능선의 가파른 곳에 위치한 범바위는 어미호랑이가 뒤따라오는 새끼를 돌아보는 형상이었다. 범바위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탁 트인 바다 비경(秘境)과 청산도 전겅(全景)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마디로 한 폭의 거대한 풍경화였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문도와 제주도가 보인다고 해서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가뭇없었다.

그다음으로 찾은 곳이 ‘서편제’ 촬영지 당리마을이었다. 당리마을에는 그 당시 촬영했던 초가집이 잘 보존되어 있었고, 서편제의 주인공 유봉과 송화, 동호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돌담길을 내려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청산도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것은 고인돌이었다. 읍리마을에는 고인돌 16기가 있었는데 20여 년 전, 도로공사 때 훼손되어 지금은 3기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청산도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여 더욱 감명을 받았다.

청산도 슬로우 길 10코스에는 지리해수욕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폭 100m에 길이 1.5km의 백사장에는 밀가루 같은 잔모래가 펼쳐져 이채로웠다. 주변 언덕에는 200여 년 된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있어 텐트가 필요 없을 정도였고, 바다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은 장관이었다. 언젠가 짬을 내서라도 손자손녀들과 더불어 온가족이 꼭 한 번 다시 찾고 싶은 곳이 지리해수욕장이었다.

청산도를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갯바위 낚시터, 상서마을 옛 담장, 진산리갯돌해변, 향토역사문화전시관 등이 있다. 청산도에 들어서면서 눈에 띄었던 것은 슬로우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었다. 파란바탕의 나무목각에 달팽이그림이 청산도를 알리는 일등공신인 것 같아 눈길이 쏠렸다. 청정지역 청산도를 다녀오면서 아쉬움이 있다면 생선회를 먹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하필이면 그 무렵 거제도에서 콜레라균이 검출되었다는 소식 때문에 생선회 맛을 보지 못하고 전복죽으로 대신해야 했다.

공기 맑고 아늑한 섬, 청산도는 이름 그대로 하늘과 바다와 산이 푸른 아름다운 곳이었다. 일상(日常)에 치어 내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면 느리게 걸어야 하는 곳, 청산도를 다시 찾고 싶다.

(2016.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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