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또 쓰다 보면

2016.10.12 05:47

박세정 조회 수: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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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또 쓰다 보면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박세정



“무슨 일로 전화를 그렇게 빨리 받아요?
“보고서도 끝냈으니, 급한 일도 없고 전화라도 빨리 받아야지요.”
“제출한 보고서가 지난 번 것과 비슷하던데, 특별한 것도 없고.”
“그럼 우리 삶은 뭐 얼마나 다르던가요? 모두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대전제를, 각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가는 것일 뿐이잖아요? 보고서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결국은 성과 향상인데, 그것을 위해 매월 만드는 보고서가 얼마나 달라지겠어요? 이렇게 하겠다느니, 저렇게 하겠다느니, 영업방식을 다채롭게 늘어놓는 것에 불과하지요.”

오후 늦게, 본부 L팀장으로부터 업무와 관련하여 몇 가지를 물어본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대화 도중 보고서가 별 볼 일 없다는 그의 말이 나를 자극했다. 내가 말을 해 놓고도, 비약이 심했다는 생각과 함께 일방적으로 몰아 부친 것 같아서 미안했다. L팀장은, 장난삼아 한 말인데 과민반응을 보인다면서 멋적어했고, 급기야 사과까지 했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다시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를 떠난 말들이 다시 돌아와 빈 가슴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듯해서, 오후 내내 불편했다. 불현듯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면서, 보고서나 우리 인생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우쳤다.

​ 올여름 나는, 괜찮은 수필 하나 얻으려고 주말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썼다.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작업을 하는데도 땀이 날 정도로 무더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더웠던 여름도 순리를 거역할 수 없었는지 저 만큼 등을 보이며 떠나고 있다. 그 빈자리에 가을이 성큼 들어와 주위를 물들이고 있는데도, 나는 여전히 여름을 헤매고 있다. 농어촌진흥공사가 주최하고 한국문인협회가 주관하는 농어촌문학상에 응모한 글이 발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접수 마감일이 하필이면, 더위가 절정에 달한 8월 31일이 될 게 뭐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글을 쓰고 또 썼다. 그렇게 준비한 글을 다 쓰고 난 뒤, 염치없지만 교수님께 보내서 평을 부탁했다. 나의 야심작에 교수님께서는 괜찮다는 답을 보내주셨다. 1차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으니 심사위원들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는 2차 관문을 뚫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형식에 맞춰 글을 옮겨 적고 메일을 전송했다. 기다리는 동안, 내가 마치 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설마?’ 와 ‘내가 만약?’ 사이를 오가면서 발표일을 애타게 기다렸다. 발표일이 며칠 지나도 소식이 없자, 불길한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실제가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인터넷상으로 검색해보니 내 이름은 심사평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번에도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미련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수상자와 수상작을 살펴보았는데 제목부터가 남달랐다. ‘둑’, ‘호미의 낮잠’, ‘겨의 노래’ 등등.

​ 떨어졌다는 허탈감이 글쓰기에 대한 회의로 번져, 나를 점점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상을 타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번번이 떨어지다 보니 흥이 나질 않았다. 내가 좋아서 쓰는 글이었지만, 글을 통해 인정받고 싶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욕심이, 어느새 내 안에서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내 길인지에 대한 확신도 흔들리는 듯했다. 만약 그렇다면, 종착역으로 생각하는 그곳은 애당초 내가 가 닿을 수 없는 곳이 아닐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언제쯤 신은 나에게도 기회를 주실까?’이런 저런 생각으로 뒤척이다가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아침을 맞았다. 아득함이 실제가 되는 날을 꿈꾸면서 지금의 이 고단함을 견디고 있는데, 그날이 나에게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 가을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00문학상’ 수상자와 수상작들이 발표되고 있다. 수상한 작품들을 읽는 즐거움이, 이 가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글을 읽으면서,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풀어가는 삶의 방식도 참으로 다채롭다는 것을 깨우친다. 글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면서 뭉클하게 와 닿는 순간이 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울컥해지는 찰나, 여지 없이 몇 방울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눈물이다. 글을 쓰는 작가 입장에서 수상작들은 부러움을 넘어 시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너무 높고 깊어서 다다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형식의 글이라도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작가가 얼마나 진실되게 삶에 임하는지에 대한 정신이다. 달리 표현하면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얄팍한 머리로 주판알을 굴리는 이해타산적인 방식이 아니라 우둔하리만치 묵묵히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모습,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웃과 함께 하려는 공존의 자세가 느껴지면 숙연해지면서 고마움이 인다. 아무리 슬픈 일도 그들의 손이 펼치는 마술에 의해 멋스러운 글로 다시 태어난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지나고 나면 모두가 다 애틋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그들의 글을 통해 깨우친다.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고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하는데, 글보다 더 나은 것은 없는 것 같다.

​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릇의 형태가 다를 뿐이지 그 안에 담긴 것은 매 한가지일 것이다. 다만, 삶에 대한 사고와 자세가 얼마나 깊고 긍정적인지에 따라서 그릇 안에 담긴 액체의 농도는 달라질 것이다. 글은 결국 우리 삶을 대신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내 생각에 변함은 없다. 이쯤되면 답은 분명해진다. 내가 화두로 삼아야 할 것은, 문학상이 아니라 삶에 임하는 자세일 것이다. 삶에 얼마나 충실했는지에 따라서 내가 쓰는 글 숲에도 웅숭깊은 바람이 불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해 가다 보면, 이 일련의 과정들이 글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나타날 것이다.

​ 오늘도 글을 쓰려고 새벽에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알고 지낸 P수필가님이 수상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메일로 들어왔다. 요 며칠 상심한 마음을 달래느라 그렇게 노력했건만, 메일을 보는 순간 애써 되찾은 평정심이 오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마음이 다시 요동치며 문학상에 대한 유혹으로 손을 뻗게 한다. ‘나도 상을 한 번 받아봤으면!’곧바로, 어딘가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쓰고 또 쓰다보면, 언젠가는 찾아 올 것이다.'

​ 생각이 깊어지는 계절 가을이 찾아왔다. 내 사색의 뜨락을, 난잡한 글로 얼룩지게 할 것이 아니라 생활을 반영한 소박한 글과 생각들로 채우고 싶다. 한층 더 숙성되고 농익은 맛이 풍기는 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누구에게라도 감칠맛 나는 글을 쓸 때까지, 내 삶에 최선을 다하는 날들을 만들어가야겠다.
(201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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