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심도

2012.01.17 05:18

최문항 조회 수:357 추천:47

단편소설

초점 심도


                                                                              최 문 항  
  인천국제공항은 듣던 대로 화려했다. 세관검사를 끝내고 돌아서는데 말끔한 정장 차림의 두 젊은이가 내 앞에 나타났다.
  “공 선생님!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날 아십니까? 난 하나 관광….”
  “네! 명회장님이 모셔오라고 하셔서….”
  회색 그랜저는 미끄러지듯 경인가도를 달려 광화문 중심가에 있는 잘 지어진 유리빌딩 앞에 멈추어 섰다. 대한의 날개를 타고 와서 인천 공항에 내릴 때까지는 나의 평균속도를 잘 유지했었는데 이 젊은이들을 따라나서면서부터 마치 우주선에 올라앉은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빌딩 내부는 온통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날 4층 입구에 내려놨다. 복도 오른쪽 벽 장식 장 안에는 아주 낡은 사진기들이 은은한 조명 아래 청자화병처럼 품위 있게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서두르는 젊은 놈들이 싫어서 느린 걸음으로 진열품들을 음미하면서 걸었다. 1900년대 초 미국에서 만든 키스톤 머피트코 8mm, 16mm 프로젝터를 비롯해서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며 골동품상에서 수집해 왔다던 수십 년 된 라이카 다코라 데쥴을 비롯해서 120mm 박스 Argus 1930년대 브라우니 주니어 그리고 렌즈 네 개가 조론히 달린 Nishka 30mm Quadra 카메라가 눈에 띄었다. 옛날에 쓰던 노출기, 필터, 망원(Zoom), 광각(Wide) Macro 렌즈 등 지금은 디지털 시대가 되어서 퇴역한 수십 종의 진기한 사진 기기들이 복도 끝까지 잘 진열돼 있었다.
  나를 안내하던 녀석이 문에 달린 전자장치 비밀번호를 누르니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저쪽 이규제큐티브 책상 뒤에 앉아 무슨 사진을 보고 있던 나의 친구, 명 회장님이 쌍수를 들고 날 환영해 주었다.
  “웰컴 투 코리아!!”
  나는 그의 유창한 영어에 답할 말이 잘 생각나지 않아서 우물거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어~ 고마워!”
  “마침 잘 왔어! 칸느가서 상 타온 나소영이 지금 옆방에 와서 사진 찍고 있는데 한번 드려다 볼래? 내가 키운 앤데 좀 컸다고 이젠 내 말 잘 안 들어!”
  나는 그저 멍청하니 명가 뒤만 쫓아갔다. 깨끗한 베이지색 배경에 반사우산 조명라이트와 바닥에 흩어져 있는 전선, 사다리 위에 한 사람, 그리고 마룻바닥에 앉아있는 촬영기사가 모델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명가와 내가 들어섬과 동시에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얇은 옷을 걸친 나소영이 왼쪽 방에서 나와 한가운데 섰다.
  “프로그아이(Frog Eye) 스탠바이!” 명가가 소리쳤다. 조명 담당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바닥에 앉은 기사 쪽으로 몰려오고 모델도 생글방글거리면서 눈길을 아래로 모아 보냈다. 수 십장을 순식간에 찍어대고 나자 명가가 이번에는 “버드아이(Bird Eye) 준비” 하고 소리쳤다. 또 조명이 움직이고 모델도 사다리 위에 있는 카메라를 보면서 포즈를 취해줬다. 그는 하는 말마다 반토막짜리 영얼 쓰는데 그 영언 나만 못 알아듣지 거기 졸개들은 아무 지장 없이 척척 알아듣고 움직이고 있었다.
  “거 미국물 좋다더니 그간 폭삭 늙어 버렸구먼, 그 광우병 쇠고기만 먹어서 그런가? 사람이 우글쭈글 해졌어! 나같이 채식을 해야지, 머리에 가발만 올려놓으면 아직도 40으로 보는데 말이야!”
   ~글쎄, 먹는 건 어떤지 몰라도 사진은 내가 식물성 지향이고 회장님은 생고길 즐기셨잖아?~
  “민경이 보고 싶지 않나? 프린세스 호텔 사장 됐는데 일층 라운지에 사진을 전시해놓고 자네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오늘 저녁에 오픈 리셉션을 한다고 신문에 광고 내고 난리치두만은.”
  “뭐 사진 전시회?”
  “그래, 그동안 자네가 보내준 사진중에서 민경이가 고른 것으로 준비한 거야!, 그 여잔 아직도 날 포르노 작가로 보고 있지만 말이야!…”
  시내 한복판에 유리로 된 6층짜리 건물 앞에 명가 놈이 가발 쓰고 턱수염 달고 슬쩍 옆으로 찍은 실물 크기의 대형사진을 걸어 놓았는데 그 밑에다‘사진작가 명규철’이라고 적어 놓았다. 작가? 제가 언제 무슨 콘테스트에 입상한 적이 있다고 작가래? 작품사진 한번 그럴 듯한 공모전에 출품한 적도 없는 녀석이 넉살도 좋다. 명규철이 무슨 사진작가 협회 이사장이고, 심사위원에 초보자들을 위해 인물사진 촬영법 특강까지 한다고 했다.
  그놈은 옛날부터 윤리관이 뭉그러지고 억지 논리를 늘어놓으며 자신이 하는 일만 옳다고 주장하는 놈이었다. 없던 일도 꾸며대고 조그만 일도 굉장한 일로 과장해서 나중에는 책임 회피하느라고 진땀을 빼곤 했다. 매일 헬스클럽에 나가서 근육 운동하지 골프하지 주치의가 챙겨주는 식단을 어기면 죽는 줄 알고 혈압이 어떻고 당이 어쩌고저쩌고 홍삼에 로열젤리 키토산 하여튼 일제 건강식품만 다 챙겨 먹어도 배가 터지겠더구만, 요즘같이 좋은 세상에 60 이면 아직 청년이라나, 앞으로 이 삼 십 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그놈처럼 챙겨 먹는 게 어디 흉이 되겠어? 자랑거리지!
  그런데 M-STUDIO라는게 정말 히트를 날린 거다, 제일 아래층은 유명한 카페처럼 차려놓고 늘씬한 아가씨들이 차를 대접하고 긴 의자에 손님들이 기다리다가 안내양이 약속된 방으로 보내주면 각방마다 최신 CANON EOS 40D 17 디지털 카메라를 갖춰놓고 경험 많은 촬영기사들이 원하는 대로 사진을 찍어 준다고 했다.
  2층은 아동들을 위한 시설이 잘돼 있고 3층은 가족사진, 결혼, 약혼, 일반 기념사진을 찍는 시설이, 4층에는 회장 사무실 겸 개인 촬영실이 있는데 여기에서 많은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5층에는 특수 촬영 팀과 그래픽디자인팀 그리고 컴퓨터 특수 효과팀 등 제법 회사 기밀을 취급하는 높은 분들 방이 즐비해서 웬만한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결혼사진은 여섯 팀으로 나뉘어서 아예 유명 예식장에 진을 치고 예약손님만 받고, 덕수궁 비원 한강 남산 같은 유명한 관광 명소에는 스마트폰으로 무장한 촬영기사들이 M-STUDIO 명찰을 앞가슴에 자랑스럽게 달고 상주해 있다가 본사 촬영 지휘부에서 내려오는 지시대로 무슨, 무슨 장면 몇 장씩 찍어주고는 저녁 시간이 되면 조그만 메모리카드를 6층 작업실에 드려 밀면 ‘일과 끝’ 하는 직원만도 수십 명이 된다고 했다.
  사진 예술이고 나발이고 명규철 회장님이 그냥 위대해 보이고 친구지간인데도 어려워져서 저절로 말이 높여지더라니까!



  이른 봄 주말에 충무로 D.P점 아저씨가 버들강아질 찍어오라고 했다. 춘천을 한참 지나 올라가 관대리 눈 덮인 산골짜기를 헤매다가 명가는 뿌연 안개 낀 골짜기를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 버렸고 나는 버들강아질 찾아서 골짜기를 헤매고 다니다가 눈 녹은 양지바른 곳에 핀 노란색 꽃 한 송일 발견했다. 꽃잎이 겹겹이 포개져있고 아직 덜 익은 과일같이 녹색 줄이 갤 쪽 한 꽃잎 한가운데로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것이 정말 수줍어하는 봄 처녀 볼을 만지는 것 같았다. 수도 없이 돋아난 수술머리에는 성애가 돋아난 것처럼 하얀 가루가 칼바람에 흩날리고 가운데쯤엔 마치 발정 난 암사슴 엉덩이처럼 도톰한 연두색 암술이 수줍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남은 마지막 필름 한통을 몽땅 찍었는데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 설연(雪蓮)이란 꽃이었다.  
  충무로 아저씨가 내 필름은 한통에 오백 원씩 쳐주고 명이 찍어온 필름은 이백 원밖에 안 쳐 줬으니 우린 벌써 실력 내지는 안목에서 큰 차이가 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명도 꽃을 찾아 나섰는데 꼭 야생 난초를 찍는다고 했다. 슬슬 날 따돌리고 다른 놈들만 데리고 한라산에 난초 찍으러 갔다가 백록담 근처에서 텐트치고 야영하던 S 여대생들을 만났는데 그중에 민경이란 아가씨를‘콕’찍었다고 했다. 아니 사진을 찍어 준 게 아니고, 쉬운 말로 꼬신거지 뭐! 그리곤 급하기도 하지, 백치 아다다같이 어수룩한 애를 그날 밤 딱 한 번 건드렸다고 했다.
  명가는 서울에 올라와서도 그 여잘 매일 만나고 있었다. 청산시장 큰 빌딩 집 외딸인데 검은 안경 쓴 놈들이 학교까지 찾아와서 그 애, 아다다 사진 보여 주면서 청산빌딩 17층까지 끌고 올라가더니 무슨 각설 쓰라고 하더란다.‘언제든 부르기만하면 총알같이 달려온다.’라고 써주고 겨우 풀려났는데 불려 갈 때마다 흰 봉투에 용돈을 두둑하게 넣어 주더란다.
  명가는 완전히 걸려들어서 진퇴양난이라고 하면서도 싫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그 여잘 만나러 나갈 때마다 날 호위병같이 데리고 다녔다. 꼭 호텔 커피 샾에서 만나곤 했는데 명가하고 그녀 옆 테이블에 날 앉혀놓고 지들끼리 시시덕대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명가가 내 곁에 와서는 ‘미안하다, 조금만 참아 달라, 이 일만 잘되면 은혜는 절대 잊지 않는다.’고 하면서 커피도 시켜주고 담배도 몇 개비씩 떨어뜨려 주고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가서 남자 녀석이 간사한 웃음을 흘리는 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니면 뭔가 받아 챙긴 값을 하느라고 그러는지 서로 사귀는 사이 같아 보이질 않았다. 혹시 부잣집 딸 호위병으로 나까지 끌고 다니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미스터 공 인사드려 민경씬데 가끔 나 대신 잘 모셔야 할 꺼야!”
  나는 숙녀에게 머릴 꾸벅해 줬다.
  “인사드렸으면 됐어, 나가서 기다려...”
  ‘아니 제가 언제부터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했어? 여하튼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난 우물쭈물 일어나서 두 사람에게 다시 한 번 꾸벅 인사해주고 호텔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날 저녁 명이 중국집에 방 하나 잡고 빽알에 오향장육을 시켜놓고 한참 마시다가 하는 소리가 정말 걸작이었다.
  “야! 공사일, 나 좀 살려주라, 민경이가 나한테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데 잘못하다가 그 짓 하고 다니는 걸 민경이 부모가 알게 되는 날에는 난 그 검은 안경 쓴 놈들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 그래서 말인데 네가 나대신 좀 만나주라.”
  “너 허풍이 너무 쎈것 아니냐? 그건 그렇다치고 만약에 나한테도 덤벼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냐? 골빈 애들이 그건 또 되게 밝힌다던데!”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해야지 내가 어떻게 하냐? 넌 그저 만나서 차나 마시고 여기저기 같이 돌아다녀 주기만 하면 될 거야! 민경인 아직 어린애니까!”
  “그러니까 내가 네 뒷설거질 해주면?”
  못 이기는체하면서 내가 직면한 문제를 조건으로 내 걸었다.
  “뭐든지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 테니까!”
  “친구끼리 서로 도와줘야지, 그저 네 하숙집에 나도 좀 붙여주라, 그리고 교통비 정도는 생각해 줘야 뭐 움직일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솔직히 말해서 명가녀석 아니었으면 어떻게 나 같은 놈이 사채업계의 대부 어 씨 집 외동딸을 달고 다닐 수 있었겠어? 부잣집 딸이라면서 뭐가 부족해서 그런지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 같이 비쩍 마르고 갸름한 얼굴에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오솜조솜 걷는 모양이 가련해 보일 때도 있었다. 좀 모자라는 애란 소릴 들어서 그렇지 별로 말도 없고 몇 번 만나다 보니 귀엽게도 보이곤 했다. 꼴에 클래식 음악 감상실이나 음악다방 좋아해서 르네상스, 아폴로, 아카데미, 돌채, 나중에는 팝송 나오는 세시봉, 디쉐네까지 날 앞세우고 겁도 없이 휘졌고 다녔다. 음악이나 제대로 알아듣기는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음침한 조명 밑에서 남들처럼 머리를 살살 흔들고 어떤 때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것이 그저 백치는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곤 했다. 어떤 때는 음악을 듣는 건지 무슨 깊은 생각에 잠겼는지 실눈을 뜨고 날 유심히 보는 것 같기도 했는데 한번은 날보고 일어서라고 하더니 빙글 돌아보라고 하면서 생글거렸다. 하기야 그 유명한 여자 대학 다니는 사람이니 어쩌면 나 같은 무지렁이보단 열 배 났겠지만 말이야! 나는 뒷주머니에 꾸겨 넣고 들어간 무협지 따윌 읽으면서 시간을 죽이곤 했다. 샹송 재즈 팝송으로 시간 보내고 쓴 커피 몇 잔 마시고 나면 그녀는 고급 구슬 핸드백에서 찻값 두 배쯤 되는 돈을 꺼내 접시 밑에 슬쩍 깔아 놓고 우아하게 구두 뒤축을 튕기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리면 난 조금 늦게 뒤따라 나가면서 천연덕스럽게 그 돈으로 계산하곤 했다. 물론 담배 한 갑 추가하고 남은 잔돈은 몽땅 내 주머니로 들어가는 거고….    
  “미스터 공! 내가 하숙집으로 전화하면 1분 내로 답해야 돼! 알았지! 밤에는 꼭‘공’이 받고 말이야…”했다.
  밤 전환 꼭 내가 받아야 한다고?
  그리고 한 주가 지난 토요일, 밤 여덟시는 됐을 텐데 전화가 왔다.
  ‘미스터 공! 우리 춘천 갈까?’
  ‘요게 꼭 자기 집 자가용 운전사 부르듯 미스터 공이래...’
  전화를 받고 나니 나도 모르게 급해져서 공부고 나발이고 하던 일 다 집어치우고 택시 타고 총알같이 장충동으로 달려갔다. 그 집에도 나 같은 놈들이 줄줄이 나와서 공주 같은 민경이가  손짓하는 대로 영국 여왕 타는 랜드로버 지프에 캠핑 도구 다 준비해 놓고는 우리가 출발할 때까지 공손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집이 사채업계의 거두라며! 그러니 수금하고 경비 보는 개 같은 놈들이 필요하긴 하겠구만서두, 뭐 이따위 년 앞에서 두 손을 모아잡구 꾸부정하니 참 꼴들 좋다, 하숙비가 얼만지는 잘 모르지만 나도 뭐 별로 다를 게 없잖아 이거! 과외선생도 하는 판에 부잣집 딸 호위병도 괜찮은 아르바이트 자리지 뭐!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소양강 둔덕에 차를 세웠다. 저쪽 위에 낚시꾼 등불이 깜박거리는 것 말고는 사방이 고요했다. 우리도 가스등 켜고 부지런히 텐트치고 모닥불 피워놓고 대낚시 쫙 펴 놓고 막 담배 한 대 빼어 물려는데 갑자기 민경이 텐트 안에서 비명을 질러대면서 날 불렀다. 헐레벌떡 달려갔더니 글쎄 들쥐가 텐트 안에 들어왔다고 내 팔에 매달려 안달을 했다. 아무리 뒤져봐도 쥐는 못 찾았는데 무섭다면서 텐트에서 같이 자자고 했다.
‘마당쇠는 차에서 새우잠 자기’라고 열 번을 강조하더니 이제 슬쩍 수작을 부리는데 정말 미치겠더구만, 그냥 눈 찔끔 감고 한번 안아 줄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떻게 명가가 품었던 각시를?
  ~그때부터 민경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진땀 나더구만,~ 하는 수 없이 완력으로 그녀를 확 밀쳐버리고 턴트 밖으로 뛰쳐나와 버렸다. 왠지 큰 올가미에 걸려 들것 같고 또 검은 안경 쓴 놈들도 눈에 어른거리고… 내일을 생각하니 그 짓만은 아니었다. 실눈썹 같은 그믐달이 서편으로 기운 밤하늘에서는 온갖 별들이 우박같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훤하게 동틀 때쯤 됐는데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민경이 낚시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내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나 수영 할 줄 몰라 씨~”라고 중얼거리며 천천히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겨우 물에서 끌어내 담요를 덮어 줬는데 민경은 텐트 안에 들어앉아서 해가 다 떠오를 때까지 엉엉 소릴 내면서 울었다. 내가 정말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안한 맘이 들었다.
  짐 다시 꾸려가지고 호숫가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했는데 민경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내 얼굴을 빤히 드려다 보면서 생글거렸다.
“멍하곤 많이 다르네요, 앞으로 우리 친구 해요!”
  아주 정중하고 품위 있게 내미는 깨끗한 손을 잡으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는 생긴 것부터가 나 같은 촌놈하곤 품격이 달라 보이고 입은 옷이나 장신구들이 어디 먼 나라에서 물 건너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멍이 자기 집 일보는 주사 아들인데 학비 대주고 공부시켜준다면서 무슨 일이든지 맘대로 시켜도 된다고 해서 생각 없이 막 대했는데 그런 건 아니죠? 그런데 왜 부르기만 하면 언제나 불평 없이 나오곤 했어요?” 민경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놓았다.
  “네 오랜 친구죠, 그놈은 뭐든지 제 생각대로 축소 과장을 잘하지요! 자기 집 주사 아들이랬어요? 한심한 놈! 지금이 조선시댑니까?
  “정말 미안해요, 사람을 몰라봤나 봐요!”
  밤으로의 긴 여행 이후 민경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어느덧 가을이 깊어가고 대학신문 공모전에 출품할 사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명은 어디서 그런 모델을 구했는지 열댓 살 난 깡 촌 처녈 낡은 창고 문 앞에 세워놓고 정면에서 찍은 사진을 출품했는데 고갱의 유명한 그림‘타히티 여인들’을 흉내 낸 사진이었다. 물론 누드 사진인데 망고도 없고 빨간 꽃도 없었다. 그놈은 마치 네쇼날 지오그라픽 잡지 표지 사진 같은 걸 출품했는데 당연히 교수님들이 퇴짜를 놔버렸다. 그때 내 사진은 고색창연한 포도원 돌담에 기어올라가는 붉고 노랗게 퇴색된 담쟁이넝쿨이 우거진 그늘 밑에 세워둔 한쪽 바퀴 빠진 낡은 손수레였다. 그때 무슨 상을 탔었던 것 같은데….



  내가 미국 들어와서 작품사진에 몰두하면서도 인물사진을 기피한 이유가 혹시 명규철 때문은 아닌지 가끔 생각하곤 한다. 물론 나도 사람 얼굴이 들어간 기록사진이나 스냅 사진은 가끔씩 찍곤 하지만 말이야….
  T.V 방송국이나 영화사 주변을 맴돌면서 혹시 촬영 팀 잡일꾼 자리라도 얻어 볼까해서 버뱅크나 허리욷 근처를 어슬렁거릴 때였다. 저쪽 길 건너편에서 흑인 청년 두 명이 길을 건너 날 향해 뛰어오더니 “하이! 부르스 리! 우쥬 싸인 포미”하면서 부르스 리가 주먹을 앞으로 쑥 내민 사진을 꺼내 들고 준비한 굵은 싸인 펜까지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나밖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걸 봐선 이놈들이 날 정말로 부르스 리로 착각한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왕휘지 필체로 홱 갈겨써 줬다. 물론 영어로󰡐Bruce Lee󰡑라고 말이야, 그 녀석들 아직도 그 사진 어디에 잘 모셔 놨을 걸 아마! 그도 그럴 것이 그때 한창 부르스 리 영화가 인기 절정일 때였으니까…. 나도 장발에 청바지 청자켓에 대만에서 드려온 회력 농구화까지 갖추어 신고 있었고 또 생김새도 비슷한 체구에 쪽 째진 눈까지 그대로 부르스 릴 빼어 닮았었으니까! 그런데 왜 영화 찍는 스텝이나 감독들은 날 못 알아봤을까? 그 후에도 여러 사람한테서 부르스 리 많이 닮았단 소릴 들었었다.
  내가 할 일 없이 허리욷 거리를 헤매고 다닐 때 명은 죽기 살기로 어 민경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공을 쌓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씨 가문에 사냥개로 입문해서 나대신 민경이 운전사 노릇 하다가 점차 그녀 아버지 눈에 들면서 개인 비서로 승격되더니 결국은 그 집 데릴사위 자릴 꿰어찼고 그 능숙한 솜씨와 민경이 돈으로 서울 한복판에 M-STUDIO를 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명규철의 숨은 실력이 빛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2층, 3층과 야외담당 촬영 팀이 그런대로 수지타산을 맞춰 나갈 즈음부터 4층 명규철 팀은 광고와 연예계를 겨냥해서 이름을 얻어가고 있었다. 연예계 진출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작가 명규철이 직접 찍어준 전신사진이 붙은 포트폴리오를 들고 오디션에 들어가야 평점을 잘 받는다고 굳게 믿을 정도였고 5층 특수촬영 팀은 재벌 가족이나 세도가, 유명 연예인들이 은밀히 드나드는 비밀 촬영장소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명가는 그의 명성에 어울리게 그를 둘러싼 여인들과의 추문이 그칠 날이 없었다.
  세상에 돈밖에 모르던 자린고비 어씨는 그 많은 돈을 몽땅 외동딸 민경에게 남겨주고 쓸쓸히 병상을 떠나갔다. 명가 주변에 퍼져있던 추문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던 민경이 덕수궁 근처에 있는 프린세스 호텔을 인수하고 난 직후 명규철에게 위자료로 M-STUDIO를 물려주고 이혼해버렸다.
  그 후 민경은 프린세스 호텔을 중심으로 음악회 미술전시회등 많은 문화행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전국 각지에 부동산이 깔려있어서 평생을 써도 다 못써보고 죽을 만큼 돈이 많다고 하고 무슨 새마을금고니 지방 백화점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그러니 옛날 호위병으로 끌고 다니던 나 같은 놈의 사진전도 열어주는 모양이었다.
  “오늘 저녁 6시에 오프닝 리셉션이 있다니까 조금 있다가 함께 건너가자고, 옷은 내 것 중에서 하나 골라봐!”
  “사진쟁이가 양복을 걸치면 어색하지 않겠어? 난 이대로가 좋겠는데!”
  명가와 나는 한 시간 전쯤에 프린세스 호텔로 갔다. 그놈은 이혼했다면서도 마치 제집 드나들듯이 회장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23층 꼭대기 층에 있는 스카이 룸으로 올라갔다.
  “공사일 작가님! 귀국을 환영합니다.”
  요즈음 취임했다는 아르헨티나 여자 대통령같이 귀티가 철철 흐르는 중년 부인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마중 나오면서 나를 반겨 주었다.
  “네! 안녕 하셨습니까?”
  젠장! 나는 옛날‘미스터 공’으로 다시 돌아가서 바짝 긴장한 몸짓으로 어색한 답례를 올렸다. 전체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방이 유리로 된 방안에는 좀 어색한 공기가 차올랐다. 역시 명가가 분위길 살리려고 조금 큰소리로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자네가 보내준 CD가 수십 장은 될 걸세, 그때마다 민경이 가져가곤 했는데 이번에 그중에서 20컷을 골라 M-STUDIO 팀이 한 달 동안 작업했지, 물론 내사진도 꼭 20장으로 제한해서 만들었고….”
  “먼저 공 선생님 추천을 받았어야 했겠지만 그렇게 되면 전시회의 목적이 퇴색될 것 같아서 제가 좋아하는 작품으로 준비했습니다. 사진 제목도 제 생각대로 붙여 봤고요. 왜들 그러잖아요, 써프라이즈 파티!!”
  민경이 얼른 명가의 말을 이어갔다.
  “말씀 듣고 보니 정말 설레는데요? 과연 어떤 사진을 민경씨가 좋아하시는지?”
  명가가 내미는 팜프렛에는‘한미 사진 교류전’이라고 쓰여 있고 왼쪽에 가발 쓴 명규철이, 가운데 위쪽으로 민경 그리고 오른쪽에 내가 길섶에 서서 사진 찍는 옆모습이 인쇄돼 있었다.
  “명규철씨 작품은 평소에 많이 보아왔지만 공사일 작가님 사진은 이번에야 자세히 볼 기회가 생겼는데 두 분은 같은 소재를 서로 다른 눈으로 접근한 것 같더군요, 한 분은 스스로 벗어버린 치마 속을 드려다 보고 또 한 분은 속치마 벗기를 강요한 것 같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더군요! 제가 잘못 본걸까요?”
  “네? 치마 속이라니요? 자연의 신비로움을 화인다에 옮겨 놓았을 뿐인데 저를 마치 치한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좀 거북스럽군요!”
  “공 선생님은 학생 시절과 하나도 변한 게 없군요! 무슨 큰 의미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고,좀 예술적으로 표현해 보자니까 그렇게 비유한 셈인데 굉장히 예민하시네요.”
  우리는 정색을 하고 마치 말다툼이라도 벌이는 것 같이 행동했다.  
  “자, 이제 슬슬 내려가 봅시다. 연예계 사람들도 꽤 올 텐데 말이야!”
  명규철이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막아서는데 갑자기 수십 년 전 소양강 둔덕 텐트 속에서 울고 있던 날씬한 민경의 나신이 떠올라 잠시 정신이 아득했었는데 마치 내 생각을 읽었는지 민경이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 내려가셔서 전시된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시면 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느끼게 될 겁니다. 가능한 한 두 분 사진을 짝을 지어서 비교시켜놨으니까요!”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일 층까지 내려왔다. 벌써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명규철에게 온 화환들이 입구에 즐비했다. 안내하는 아가씨가 내 왼쪽 가슴에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달아주었다. 오른쪽에 우뚝 서 있는 코린트식 대리석 기둥에서 시작된 실크테이프가 중앙 분수대까지 늘어져 있었고 그 앞에는 은색 프레임에 뮤지움 글라스로 잘 장식된 8 X 10 크기의 포도원 담장사진과 타히티 소녀 같은 시골처녀 누드 사진이 양쪽에 전시되어있었다.  
  “어떻게 이 사진을 구했습니까?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내가 민경에게 물었는데 명규철이 대답했다.
  “오늘의 M-STUDIO는 이 두 사진에서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입상작과 낙선작으로 말일세!”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전시회였다고 입선 낙선하나? 겨우 교내 출품작이었는데….”
  “난 지금도 이 소녀를 사랑하고 있다네, 그리고 평생을 살아서 움직이는, 희로애락을 표현할 수 있는 얼굴 표정을 찍으면서 살았지! 거기에 인생의 깊은 뜻이 담겨 있거든, 너나 민경인 내가 젊은 여체에 미쳤다고 하지만 몇 작품은 희망과 희열 사랑 그리고 절망까지 담아내고 있다네!”
  사회자의 안내로 테이프 커팅이 끝난 후 두 작가 현황이 많이 과장되게 소개되고 명규철의 긴 인사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냥 앉은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손을 흔들어 주는 것으로 인사에 대신했다. 대부분 손님은 민경과 명규철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역시 노련한 화법과 연기로 다정한 부부같이 행동했다. 손님들이 다 가고 난 로비에는 직원들과 우리 셋이 남았다. 민경의 안내로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전시된 사진을 둘러보면서 지나간 옛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짝을 지어놓은 사진은 두 작가의 성품 내지는 기법을 완연히 구분 짓고 있었는데 한쪽에서는 렌즈를 최대한 활짝 열어서 원하는 피사체에만 초점을 맞추고 주변 물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뭉개버렸다면 다른 한쪽은 초점 심도를 최대한 깊게 조여들어서 솜털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아니 어쩌면 사람의 눈으로는 감지해 낼 수 없는 것까지 끝까지 추적해 내는 집요함을 보여 주었다고나 할까?  
  까만 점 같은 암술에 초점을 맞춘 진달래꽃 사진 옆에는 만지고 싶도록 토실한 엉덩이를 드러낸 남자아이의 뒷모습과 손가락을 입에 물고 앞을 바라보며 서 있는 계집아이의 천진난만한 벌거벗은 사진이 수채화용 고급 프레임에 포장되어 복도 오른쪽 벽에 걸려있었다. 엷고 불그스레한 여러 겹의 선인장 꽃잎 가운데 선명하게 드러난 하얀 암 수술이 벌 나비를 유혹하고 있는 옆 사진은 단정한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둘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
  둥글게 둘러선 수술과 별꽃 암술에만 초점을 맞춘 데이지 한 송이, 노란 은행잎 두 장, 미루나무 잎 사이에 선명히 드러난 동그란 열매들, 몸체가 흐릿한 나비의 돌돌 말린 빨대, 교미하며 꼬부라진 고추잠자리, 작은 수놈을 등에 업고 풀잎에 대롱 매달려있는 메뚜기,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모습이 고스란히 마크로 렌즈 안에 붙잡혀 있는 내 사진 옆에 명규철은 그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또 다른 신비를 캐고 있었다.
  페인트가 다 벗겨진 낡은 문짝 앞에 볼록한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똑바로 앞을 쳐다  보고 서 있는 홀딱 벗은 단발머리 소녀, 안나(Nude in the Sunlight)의 동그란 젖에 포커스를 강조한 듯한 20대 처녀의 상반신 사진, 반투명한 드레스를 입은 다이애나를 닮은 중년 여인. 유명 배우들의 개성있는 표정, 각종 영화의 Still 사진들, 모자이크 된 유명 여배우의 반 누드….
  내가 모네의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면서 화려한 꽃의 암, 수술을 찍고 있었다면 명규철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르느와르의 그림첩을 옆에 감추어두고 그림 속의 여인들이 입고 있던 화려한 드레스와 모자를 모두 벗겨버린 자기모델의 누드를 찍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그를 값싼 관음증 환자 정도로 매도하고 있지만 그는 언제나 뱀을 만나기 전의 이브를 그리워한다고 지껄이곤 했었다.  
  화려한 호텔 라운지에 값비싼 프레임과 크리스털 조명 아래 걸려있는 작품들이 마치 하긴 뮤지움(The Haggin Museum)에 걸려있는 유명화가들의 명작처럼 빛나 보였다.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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